결따라 가야 한다. 문제는 이미 결따라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나온다는 갤럭시폰이 물리버튼을 없앴다고 한다. 그럼 지문인식은 어떻게 하느냐? 폰 뒤쪽에 있다고. 근데 옆에 카메라가 있어. 지문이 렌즈를 막아버려. 결론은 사용자 경험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제조사 편의를 따라가느냐다. 두 개의 결이 있다. 사용자가 사용하기에 편하도록 제조한다는 소비자 중심의 결과 제조사가 제조하기에 편하도록 제조한다는 제조사 중심의 결이다. 전자를 따르면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창의는 돈싸움이다. 잡스가 창의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픽사의 성공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삼성은 성과주의라서 돈이 안 되는 것을 만들면 바로 짤린다. 창의할 수 없다. 베낄 수밖에. 경쟁만능주의, 성과주의, 실용주의는 인류를 파멸로 만든다. 이명박의 실용주의가 무엇인가? 제조사가 제조하기에 편하도록 하는게 실용주의다. 기업가는 기업하기 편한 환경을 원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다. 통치자는 통치하기에 편한 정치를 원한다. 독재다. 관료는 공무원 노릇 하기에 편한 환경을 원한다. 관료주의다. 이쯤 되면 실용주의가 얼마나 고약한 괴물인지 알만한 거다. 합리주의라야 한다. 합리주의는 진리의 결을 따른다. 두 가지 결이 있다. 소비자의 편의냐 제조사의 편의냐. 소비자가 답이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진다. 치열하다. 문학이라면 독자들에게 아부하느냐 아니면 작가로서 독자 위에 군림하느냐의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있다. 무수히 말했지만 스탕달의 적과 흑은 작가가 독자 위에 군림한다. 뒤마의 삼총사는 독자가 작가 위에 군림한다. 적과 흑은 진짜이고 삼총사는 가짜다. 문학성으로 보면 그렇다. 뽕짝은 팬에게 아부한다. 서태지 이후 멸망했다. 전쟁이다. 아카데미즘은 독자 혹은 소비자에게 아부하는 미술이다. 인상주의로 전쟁에 돌입했다. 어느 한쪽은 완전히 전멸한다. 이발소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이건 노골적인 선전포고다. 개기면 죽인다. 그게 바로 창의다. 철학이라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의사결정능력에 대한 과학이다. 의사결정능력은 에너지에서 나온다. 에너지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인간 마음의 결을 따라갈 것인가? 마음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진리의 결을 따를 것인가? 진리에서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 사실의 결을 따를 것인가? 자연의 사실에서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다. 역사적 진보라는 방향성에서 성립하는 결을 따를 것인가? 진보에서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 그냥 편한대로 사기쳐먹을 것인가? 독재자의 방법이나 종교의 방법은 편의주의다. 의사결정의 편의라는 결을 따라가는 것이다.
1) 우주의 진리에서 에너지를 찾는다.. 신과의 일대일이다.
의사결정원리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출발은 타자성의 문제입니다. 아와 피아의 대결구도에서 사건은 시작되고 호응에서 완성됩니다. 반대로 의사결정의 편의에서 답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던대로 하는 것이며, 습관과 전통과 권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의사결정원리를 재조직하는데 진정한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과의 일대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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