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구조론 구조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흔히 관측대상 내부의 고유한 속성을 알고자 한다. 그런데 그 사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구조다. 사물에 내재하는 고유한 속성은 없다. 속성에 대한 믿음은 막연한 추측이며 우주 안에 고유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러므로 속성도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하려는 마음이다. 사물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그러한 것이다. 종교적 대상과 같다. 그것이 있어야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의지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사물에 내재한 고유한 속성이다. 원자개념과 같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 원자다. 사실은 너무 깊이 들어가면 피곤하니까 대략 이 선은 넘지 말자고 암묵적인 한계를 정한 것이다. 속성은 내부에 감추어진 것이고 고유한 것은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니 이 선을 넘어 안쪽은 건드리지 말자는 제안을 한 거다. 인간은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선에 도달하면 내막을 알았다고 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가 특히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창조라고 하고, 도道라고 하고, 공空이나 무無라고 하고, 신神이라고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위협에 불과하다. 우주 안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상대적인 구조가 있을 뿐이다. 절대적이라거나 고유하다거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선을 넘어가지 말라거나 이것만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위협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용감하게 그 선을 넘어버리는 것이다. 일단 그것은 없다. 지목되는 대상이 없다. 그것은 관측자인 인간에 의해 지목되어 가리켜지는 관측대상이다. 즉 대상은 없는 것이다. 대상이 있는 것은 관측자 때문이다. 관측자를 배제하면 대상도 사라진다. 그것이 없으므로 그것의 고유한 성질도 없고 그것으로 지목되는 사물도 없고 그 본성도 없다. 고무가 무르고 돌이 단단한 것은 그것의 내부를 채우는 인자들의 결합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구조다. 만물의 특성은 사물에 내재한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대적인 구조의 결합방식이 결정한다. 여기서 사물이냐 사건이냐다. 사물은 그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것이 없다. 사물이 없다. 대신 사건이 있다. 사물은 쪼개지지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사건은 원래 쪼갤 수 없지만 굳이 쪼개고자 하면 쉽게 쪼개진다. 사물은 쪼개지므로 사물의 구조는 분해하여 알 수 있다. 반면 사건을 쪼개면 being의 ~ing이 중단되므로 사건을 쪼갤 수는 없다. 주변의 많은 것이 사건으로 존재한다. 사건은 관측자인 인간에 의해 지목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사물이 아닌 사건이다. 사물 역시 잘게 쪼개서 양자역학 단계로 깊이 들어가 보면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세계에 그것은 없고 벌여놓은 일~ing만 있다. 사물을 쪼개면 원자가 되고 거기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그러나 원자개념은 자연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이 편의로 인식한계를 정한 것이다. 인간의 기술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한계다. 그 선을 넘으면 양자역학이다. 결국 사물, 고유한 속성, 원자개념은 모두 얼버무리는 말이다. '수소분자 두 개와 산소분자 한 개의 공유결합'이라고 하면 문장이 너무 길어지니까 그냥 물이라고 하는 식이다. 시시콜콜 따지자면 한이 없다. 그것을 구태여 따지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의 정신으로 보자면 세상에 사물은 없고 속성은 없으며 다만 사건이 있고 구조가 있을 뿐이다. 원자는 없으며 에너지의 계가 있을 뿐이다. 넘지 말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선을 과감하게 넘어버려야 한다. 짜고 치지 말자. 세상은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대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구조도 절대적이다. 구조를 밖에서 보면 상대적이고 안에서 보면 절대적이다. 사건은 아날로그다. 얼개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 사건을 닫힌계에 가두면 디지털이다. 관측자가 밖에 있으면 상대적인 관계다. 똑같은 물질이 어떤 조건에서는 액체가 되고 어떤 조건에서는 고체가 된다. 이는 환경과의 상대적인 관계다. 고체와 액체의 성질은 고유한 것이 아니다. 오행설이나 사원소설은 그것을 고유한 성질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자의적으로 정한 것이며 시시콜콜 따지면 피곤하니까 건드리기 없기로 합의한 것이다. 원자설은 그 선을 깨뜨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선을 그었다. 사원소설의 물, 불, 공기, 흙은 각각 액체, 플라즈마, 기체, 고체다. 그것은 고유하다고 믿어졌다. 물은 언제나 물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물도 추우면 고체가 되고 때로는 영하 40도인데도 액체가 된다. 그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형을 만나면 아우가 되고 아우를 만나면 형님이 된다. 그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가족관계 안에서 서열은 절대적이다. 부모 입장에서 첫째는 언제나 맏이고 둘째는 언제나 막내다. 사물이 외부의 환경조건에 대해서는 절대적이지만 사건 안에서 절대적이다. 다만 가리켜질 수 없다. 사건은 움직이기 때문이다. 관측자가 정지해 있으므로 지목되지 않는다. 사건은 에너지를 타고 간다. 계 안에서 에너지의 진행으로 보면 언제나 절대적이다. 세상이 상대적이라면 그것은 상대적인 관점 곧 외부 관측자의 위치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닫힌계를 정하고 사건에 태워서 에너지 기준으로 보면 존재는 절대적이다. 사건의 구조는 절대적이다. 흔히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상대적이라고. 이 문장은 어색하다. 하나가 빠져 있다. 세상은 관측자에 대해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단 관측자의 위치가 바뀌어야 한다. 사건에 태우고 계에 가두어서 에너지로 보면 모든 존재는 절대다. 과학은 엄격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구조로 보고, 사건으로 보고, 절대성으로 보고, 에너지로 보고, 닫힌계로 봐야 한다. 그런 통제절차 없이 관측자 기준으로 보고, 대충 막연히 바라보고, 암묵적인 한계선을 그어서 바라보면 세상은 상대적이다. 그것은 바라보는 눈이 비뚤어진 경우다. 도구를 써야 한다. 눈이 있으므로 볼 수 있다. 눈이 인간의 관측도구다. 그러나 피상적인 관측일 뿐 진리의 도구는 아니다. 구조는 진리의 도구다. 눈은 빛을 이용하여 관측대상과 관측자를 연결한다. 그 연결수단이 존재해야 한다. 존재가 곧 사건이라면 인간과 어떻게 연결하는가? 눈은 사물을 관측할 뿐 사건을 관측하지 못한다. 사건을 관측하는 방법은 셋이 있다. 첫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원인측을 보는 것이다. 둘째, 사건의 진행 중에 연결고리를 보는 것이다. 셋째, 사건이 종결된 후에 대상에 직접 작용하여 보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방법은 세 번째다. 이 방법은 틀렸다. 혹은 제한된 정보를 제공한다. 상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상대적인 것은 닫힌계에 가두어 구조화한 다음 사건으로 보고 에너지로 봐야 한다. 크다는 말은 비교대상에 대해 상대적이다. 비교대상을 고정시키면 크다가 아니라 크기가 된다. 그냥 크다는 건 없다. 기준이 되는 아무개에 대해서 크다. 보통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판단기준으로 삼는 자기소개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간단하다. 동사로 말하지 않고 명사로 말하면 된다. 명사는 길이고 동사는 길다. 길이가 맞다. 명사는 무게고 동사는 무겁다. 무게가 맞다. 뭔가를 아는 사람인지는 때로 3초 안에 드러난다. 상대어를 구사하면 아닌 거다. 절대어로 바꾸면 된다. 세상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가 상대적이다. 동사로 표현하므로 상대적이다. 명사로 표현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답은 통제가능성이다. 날아가는 새를 통제할 수 없다. 새장에 가두면 통제된다. 상대성은 절대화하고 주관성은 객관화한다. 알 수 없는 것은 확률로 보면 된다. 존재를 통제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원인통제다. 둘은 다단계 수법과 같은 간접통제다. 세 번째는 직접통제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원인을 통제하는 자는 에너지를 틀어쥐어야 한다. 애초에 될성부른 떡잎을 찾아야 한다. 일을 못 하면 연봉을 깎으면 된다. 이 경우 절대적으로 통제된다. 다단계로 간접통제하는 방법은 하사가 병장을 통제하고 병장이 후임병을 통제하는 피라미드 수법이다. 왕이 귀족을 통제하고, 귀족이 평민을 통제하고, 평민이 노예를 통제한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은 물리적으로 직접 작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사건을 통제하는 방법이 아니라 사물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진행 중인 사건에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
1) 원인통제 - 연봉을 올려준다. 원인통제가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돈이 든다. 서로 경쟁시키는 간접통제는 비용을 줄이지만 희생자가 있다. 군대 따위에서 선착순을 적용하거나 혹은 시험에 석차를 정하는 것이다. 에너지를 제한하고 서로 경쟁시킨다. 보수꼴통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반드시 피해자가 생겨난다. 마지막은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몽둥이로 패면 말을 듣는다. 개를 길들여도 같다. 칭찬요법과, 경쟁요법, 처벌요법이 있다. 처벌요법을 쓰면 당장 말을 듣지만 나쁜개가 된다. 눈앞에서는 복종하지만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짖는 개가 된다. 방송에서는 쓰지 않는다. 경쟁요법은 어미개가 새끼를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을 다스리는 데 효과적이다. 칭찬요법이 확실하지만 시간과 돈이 든다. 메이저리그라면 어떨까? 일단 돈이 많다. 경쟁요법이나 몽둥이찜질요법을 쓰지 않는다. 어느 분야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반드시 에너지로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교도소에 수용된 전과자라면 어떨까? 몽둥이로 패야 말을 듣는다. 오죽하면 감옥에 가둬놓겠는가? 칭찬과 경쟁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을 쓰는 것이다. 뭐든 칭찬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지만 그게 항상 먹힌다면 감옥은 필요가 없다. 매를 들 때는 들어야 한다. 에너지로 통제하는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이며 경쟁은 중간단계의 대책이며 물리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물론 보수꼴통은 무조건 매를 들어야 한다거나 무조건 경쟁만능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는 게 힘이라 했다. 아는 것이 곧 에너지다. 보수꼴통은 지식이 없기 때문에 나쁜 방법을 쓰는 것이다. 진보는 지식이 있으므로 칭찬요법을 쓰지만 문제는 과연 지식이 있느냐다. 개도 강형욱 훈련사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칭찬요법이 먹힌다. 일반인은 모르고 칭찬하다가 되레 버릇을 나쁘게 만든다. 가능하면 칭찬이 좋다. 국군이 다단계 경쟁요법을 쓰는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병장이 상병을 지도하고 상병이 일병을 지도하고 일병이 이병을 지도하는 방식은 모병제 군대에 쓸 수 없다. 모병제라면 해고하면 된다. 월급을 안 주면 된다. 돈 안 쓰고 부려먹으려니 이상한 다단계 수단을 쓰는 것이다. 존재는 세 가지다. 사건이 촉발되기 전의 원인측과 사건이 현재 진행 중인 전개측과 사건이 종결된 사물측이다. 우리는 셋 중에서 사물모드 한 가지를 알고 있지만 엄밀한 기준으로 보면 오직 사건만 있고 사물은 없다. 에너지로 보면 세상은 절대적이다. 돈이 없으므로 상대적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은 내게 에너지가 없고 힘이 없고 돈이 없어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경우 약자를 만나면 강자가 되고 강자를 만나면 약자가 되니 운에 달렸다. 그러나 경마장도 주최측은 항상 돈을 딴다. 절대적으로 돈을 번다. 이유는 그들에게 돈이 꽤 있기 때문이다. 백퍼센트 돈을 버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무조건 돈을 번다. 발권력을 가진 은행이나 동원력을 가진 정부다. 그들은 절대성의 세계에 살고 있다. 에너지가 없고 힘이 없으면서 힘을 휘두르니 상대적이다. 운 좋으면 먹히고 운 나쁘면 당한다. 당신은 당연히 힘이 없고 에너지도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과학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돈을 따는 주최측의 방법을 써야 한다. 마사회의 방법을 써야 한다. 그들은 어느 말이 우승하든 항상 돈을 번다. 국가는 항상 돈을 번다. 은행은 무조건 돈을 번다. 잘 연구하고 장기전을 하면 당신도 그 방법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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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돈을 따는 주최측의 방법을 써야 한다. ~ 잘 연구하고 장기전을 하면 당신도 그 방법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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