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극치를 홀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이 구절은 이상의 소설
날개 서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오늘 신문에 지도층의 타락과 관련하
여 지성의 결핍을 꾸짖은 대목이 인상적이더군요.
이 시대에 지성이 있는가? 지성이란 무엇일까요? 제 이야기의 일관된
규칙은 에고를 배제하고 지성의 원칙을 쫓는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
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세웠다지만 저는 지성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소아적으로 깨닫기는 쉬워도 범아적으로 지성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깨달음은 개인적 영역이고 지성은 공적, 사회적, 우주적 영역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깨달아 능히 이루고서도 부단히 이 시대와 대화하지 않
으면 지성이 아닙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타인과, 타인인 님과 제가 대화
하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지성인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누구와라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성인은 길 가운데 선 사람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신분의 이름으로 지위의 이름으로 자기를 울타리에 가두고
창너머로 담너머로 고함쳐 소리질러대며 어슬프게 통화하려고 합니다.
대화하려면 소통하려면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길 가운데로 나오세요.
안방에 앉아서 창문너머로 담너머로 진정한 대화는 가능하지 않습니
다.
당신은 흑인과 장애자와 여성과 이교도와 외국인과 노인과 그대에게
적대적인 계급과 적군과 게릴라와 양과 토끼와 하늘과 자연과 진리와
역사와 신과 대화하고 있나요?
대화가 없다면 단절되어 있다면 소통을 거부한다면 그 언어가 옳고 그
름을 판단하기 앞서 배제됩니다. 님의 말이 옳을지 그를지 판단하기
앞서 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성은 대화하기 위해 길 가운데 서기입니다. 님은 제게 말을 걸었습
니다.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길 가운데로 나오세요. 대화할 수 있는 진
리의 공적영역으로 나오세요. 그렇지 않다면 우울한 독백에 다름 아닙
니다.
왜 진리가 필요한가? 왜 진리는 하나여야 하는가? 하나의 공간에 서
로가 마주함으로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상대성, 다원주의 좋습니다. 물론 특수성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를 거부하고 동굴에 몸을 감추고 대문을 닫아걸고
담장을 높여 쌓고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그 안에서 고함쳐 대는 사람과
같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영역은 단 하나입니다. 우
리는 하나의 선로, 하나의 홈페이지, 하나의 게시판, 하나의 공감으로
만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 아하 그것은 각자가 자기 동굴에 갖혀 서로 다른
층에서 서로 다른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 밖으로 떠들어 대는 것과 같
습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며 소통이 아니며 진짜가 아닙니다.
각자의 동굴에서 먼저 나와야 합니다. 진리의 광장으로 나오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절대이며 순수이며 보편
자이며 일반자입니다.
물론 우리가 24시간 대화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설도 하고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헛짓거리도 합니다. 그것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영
역입니다. 혼자 하는 배설에 혼자하는 놀이에 진리가 순찰하지 않습니
다.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님은 제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역시 님께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말을 걸려면 서로가 동시에 수화기와 송화기를 들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대를 공유하지 않으면 통신은 두절입
니다.
진리라는 이름의 단 하나의 주파수대를 공유할 때 통화는 성공입니다.
우리는 지성의 이름으로 노상 진리의 원칙, 두 사람이 동시에 수화기
를 들어야 통화가 가능하다는 원칙을 상기하고 또 상기하며 항상 서로
통화하려는 노력, 소통하려는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24시간 통화축선대기입니다. 다섯 살 아이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하여 꼭 전화번호와 이름이 쓰여진 명찰을 달고 다니듯이
우리는 서로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의 진리의 원칙을 항상 의식하고 노
상 닦으며 또한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언제 그대에게 역할을 부여하기 위하여 호출할지 모르기 때문에
날개 서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오늘 신문에 지도층의 타락과 관련하
여 지성의 결핍을 꾸짖은 대목이 인상적이더군요.
이 시대에 지성이 있는가? 지성이란 무엇일까요? 제 이야기의 일관된
규칙은 에고를 배제하고 지성의 원칙을 쫓는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
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세웠다지만 저는 지성인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소아적으로 깨닫기는 쉬워도 범아적으로 지성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깨달음은 개인적 영역이고 지성은 공적, 사회적, 우주적 영역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깨달아 능히 이루고서도 부단히 이 시대와 대화하지 않
으면 지성이 아닙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타인과, 타인인 님과 제가 대화
하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대화할 수 있습니다.
지성인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누구와라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성인은 길 가운데 선 사람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신분의 이름으로 지위의 이름으로 자기를 울타리에 가두고
창너머로 담너머로 고함쳐 소리질러대며 어슬프게 통화하려고 합니다.
대화하려면 소통하려면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길 가운데로 나오세요.
안방에 앉아서 창문너머로 담너머로 진정한 대화는 가능하지 않습니
다.
당신은 흑인과 장애자와 여성과 이교도와 외국인과 노인과 그대에게
적대적인 계급과 적군과 게릴라와 양과 토끼와 하늘과 자연과 진리와
역사와 신과 대화하고 있나요?
대화가 없다면 단절되어 있다면 소통을 거부한다면 그 언어가 옳고 그
름을 판단하기 앞서 배제됩니다. 님의 말이 옳을지 그를지 판단하기
앞서 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성은 대화하기 위해 길 가운데 서기입니다. 님은 제게 말을 걸었습
니다.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길 가운데로 나오세요. 대화할 수 있는 진
리의 공적영역으로 나오세요. 그렇지 않다면 우울한 독백에 다름 아닙
니다.
왜 진리가 필요한가? 왜 진리는 하나여야 하는가? 하나의 공간에 서
로가 마주함으로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양성, 상대성, 다원주의 좋습니다. 물론 특수성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화를 거부하고 동굴에 몸을 감추고 대문을 닫아걸고
담장을 높여 쌓고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그 안에서 고함쳐 대는 사람과
같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영역은 단 하나입니다. 우
리는 하나의 선로, 하나의 홈페이지, 하나의 게시판, 하나의 공감으로
만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원주의, 상대주의 아하 그것은 각자가 자기 동굴에 갖혀 서로 다른
층에서 서로 다른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 밖으로 떠들어 대는 것과 같
습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며 소통이 아니며 진짜가 아닙니다.
각자의 동굴에서 먼저 나와야 합니다. 진리의 광장으로 나오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절대이며 순수이며 보편
자이며 일반자입니다.
물론 우리가 24시간 대화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배설도 하고 식사도
하고 잠도 자고 헛짓거리도 합니다. 그것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영
역입니다. 혼자 하는 배설에 혼자하는 놀이에 진리가 순찰하지 않습니
다.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님은 제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역시 님께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말을 걸려면 서로가 동시에 수화기와 송화기를 들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대를 공유하지 않으면 통신은 두절입
니다.
진리라는 이름의 단 하나의 주파수대를 공유할 때 통화는 성공입니다.
우리는 지성의 이름으로 노상 진리의 원칙, 두 사람이 동시에 수화기
를 들어야 통화가 가능하다는 원칙을 상기하고 또 상기하며 항상 서로
통화하려는 노력, 소통하려는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24시간 통화축선대기입니다. 다섯 살 아이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하여 꼭 전화번호와 이름이 쓰여진 명찰을 달고 다니듯이
우리는 서로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의 진리의 원칙을 항상 의식하고 노
상 닦으며 또한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언제 그대에게 역할을 부여하기 위하여 호출할지 모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