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리가 하나인가?
그 원래의 하나에다 진리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씨앗일 때는 하나였죠.
근데 싹이 트고 가지가 나고 잎이 맺히면서 여럿으로 보이기 시작했죠.
그러나 본래 하나입니다.
물론 씨앗이 자라 또다른 열매를 맺듯이
본래 하나인 진리가 여러형태로 응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용음악(대중음악), 응용미술(팝아트, 상업미술), 응용수학, 등 응용분야는
끝내 응용으로 남아있지 결코 진리로 되지는 않습니다.
님의 시를 좋은 시로 보던 혹은 그러하지 않던
그것과는 별개로
어디에나 순수분야와 응용분야가 있으며
순수분야를 진리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여기에 김동렬이 있는데
아이디로 a11111a도 있고 홍동지도 있고 안녕하슈도 있는데
누구는 또 저를 바우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김동렬은 안녕하슈이며 바우이며 홍동지이며
애벌레(a11111a)인가? 천만에
백번 죽었다 깨나도 김동렬은 김동렬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김동렬을 바우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김동렬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진리는 순수의 영역에 있으며
응용될 때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즉 미술과 건축이 결합한다던가 문학과 시장이 결합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응용은 반드시 관계를 가지게 되며
진리를 그 관계를 배제한 채 순수의 이름 만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순수한 시는 하나 뿐입니다.
그 시를 가지고 노랫말을 만들고 유행가가 되어
100만장의 음반이 팔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별개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설마 여러분께서 순수한 나와
사회적으로 알려진, 관계맺은, 제조된, 연출된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변하지 않는 것만이 진리이며
관계는 부단히 변화하고
우리는 순수해지고서야 그 변하지 않는 한 개의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우리를 타락시키고 눈을 멀게하고 감각을 마비하고
순수를 멍들게 합니다.
인생은 관계와의 부단한 투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관계의 노예가 되어 거기 휩쓸린다면
잠시 행복할 것이나 결국 가치판단능력을 상실하고 인생의 제목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 연출된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극이 끝나면 자기 본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관계맺을 줄 알아야 하지만
본래의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 또한 끝내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한 개의 사과는 먹혀지기 위해(관계맺기 위해)
존재하지만 먹혀지고 말면 그 뿐
사과는 사라지고 내 존재 또한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은 관계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관계함과 함께 그 자신도 소멸되고 맙니다.
사과라는 진리는 인간의 입으로 먹혀지는 순간 더 이상
사과가 아닙니다.
배설된 찌꺼기는 사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단코 사과가 아닙니다.
요리된 사과, 소화된 사과, 썩은 사과는 사과가 아닙니다.
고로 인간은 관계맺기에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영감이 떠오를 때
그 순수한 마음속에 시가 있는 것이며
언어에 의해 제조되었다면 이미 관계한 즉
타락한 바 순수를 잃은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물론 유행가자락도 시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통조림이거나 사과요리거나 사과맛탕이거나
간에 사과가 아닙니다.
그 원래의 하나에다 진리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씨앗일 때는 하나였죠.
근데 싹이 트고 가지가 나고 잎이 맺히면서 여럿으로 보이기 시작했죠.
그러나 본래 하나입니다.
물론 씨앗이 자라 또다른 열매를 맺듯이
본래 하나인 진리가 여러형태로 응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용음악(대중음악), 응용미술(팝아트, 상업미술), 응용수학, 등 응용분야는
끝내 응용으로 남아있지 결코 진리로 되지는 않습니다.
님의 시를 좋은 시로 보던 혹은 그러하지 않던
그것과는 별개로
어디에나 순수분야와 응용분야가 있으며
순수분야를 진리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여기에 김동렬이 있는데
아이디로 a11111a도 있고 홍동지도 있고 안녕하슈도 있는데
누구는 또 저를 바우라고 불러요.
그렇다면 김동렬은 안녕하슈이며 바우이며 홍동지이며
애벌레(a11111a)인가? 천만에
백번 죽었다 깨나도 김동렬은 김동렬이지 다른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김동렬을 바우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김동렬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진리는 순수의 영역에 있으며
응용될 때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즉 미술과 건축이 결합한다던가 문학과 시장이 결합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응용은 반드시 관계를 가지게 되며
진리를 그 관계를 배제한 채 순수의 이름 만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순수한 시는 하나 뿐입니다.
그 시를 가지고 노랫말을 만들고 유행가가 되어
100만장의 음반이 팔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별개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설마 여러분께서 순수한 나와
사회적으로 알려진, 관계맺은, 제조된, 연출된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변하지 않는 것만이 진리이며
관계는 부단히 변화하고
우리는 순수해지고서야 그 변하지 않는 한 개의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우리를 타락시키고 눈을 멀게하고 감각을 마비하고
순수를 멍들게 합니다.
인생은 관계와의 부단한 투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관계의 노예가 되어 거기 휩쓸린다면
잠시 행복할 것이나 결국 가치판단능력을 상실하고 인생의 제목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 연출된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극이 끝나면 자기 본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는 관계맺을 줄 알아야 하지만
본래의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 또한 끝내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한 개의 사과는 먹혀지기 위해(관계맺기 위해)
존재하지만 먹혀지고 말면 그 뿐
사과는 사라지고 내 존재 또한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은 관계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관계함과 함께 그 자신도 소멸되고 맙니다.
사과라는 진리는 인간의 입으로 먹혀지는 순간 더 이상
사과가 아닙니다.
배설된 찌꺼기는 사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단코 사과가 아닙니다.
요리된 사과, 소화된 사과, 썩은 사과는 사과가 아닙니다.
고로 인간은 관계맺기에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영감이 떠오를 때
그 순수한 마음속에 시가 있는 것이며
언어에 의해 제조되었다면 이미 관계한 즉
타락한 바 순수를 잃은 것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물론 유행가자락도 시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통조림이거나 사과요리거나 사과맛탕이거나
간에 사과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