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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110 vote 0 2008.06.11 (23:12:59)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아는 사람이다. 먼저 완전성을 이해해야 분류할 수 있다. 외부와의 소통을 이해해야 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다.

완전은 외부와 소통하는 의미에서의 완전이다. 자동차는 항구에서 배와 만나고 공항에서 비행기와 만난다. 그 싣고온 화물을 배로 비행기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배를 알고 비행기를 알아야 자동차를 아는 것이다.

외부와 소통할 때 완전하다. 자동차를 안다는 것은 외부의 도로를 알고, 외부의 목적지를 알고, 외부의 배를 알고, 외부의 비행기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 자동차 내부만 알고 있다면 불완전하다. 아직 자동차를 모르는 것이다.

둘째 내부에서는 계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수단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한다. 하나의 논리로 전체를 설명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 대상을 장악한 것이다. 그래야지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동차는 핸들 하나로 조작한다. 운전기사는 한 명이어야 한다. 기어는 1단이거나 2단이거나다. 1단이면서 동시에 2단일 수는 없다.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동시에 밟을 수는 없다. 존재는 항상 1을 따라간다.

그래야 계 전체가 통일된다. 통일되어야 외부에 맞설 수 있고 외부에 맞서야 일할 수 있다. 일해야 낳을 수 있고 낳아야 완전한다. 안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머리와 몸통을 다른 논리로 설명하면 불완전하다. 정치는 정치논리로 설명하고 경제는 경제논리로 설명한다면 불완전하다.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통일하는 상위단계의 논리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불완전하다.

셋째 그러한 통일성을 위해서 하위 단계의 부품들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한다. 천칭저울처럼 하나의 조작으로 양쪽이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 그 긴장된 날 위에 올려져 있어야 한다. 대칭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마주보고 대칭되기 때문에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좌우의 두 페달이 대칭되기 때문에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 모든 방향으로 대칭성을 부여하면 바퀴가 된다. 자동차가 바퀴로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오른팔과 왼팔을 가지고 또 오른발과 왼발을 가지는 것은 몸통이 그러한 대칭구조 위에 올려져 있어야만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운전자는 언제라도 1의 논리를 따라가므로 1이 2를 통제하는 구조라야 제어가 가능한 것이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히 요소들을 선 위에 나열하는 줏어섬기기 식은 바른 분류가 아니다. 입체적 모형으로 이해해야 완전하다. 하부구조는 반드시 대칭되어야 하고 상부구조는 반드시 일원화 되어야 한다.

최상위 단계에서 소통의 창구는 외부로 열려있어야 한다. 손과 발은 대칭원리를 따라 마주보아야 하고 입력과 출력은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관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눈과 귀와 코는 바깥을 향해 창을 내어야 한다.

선장은 밖을 보아야 하고, 갑판장은 내부를 통솔해야 하며, 선원들은 2인 1조를 이루어 작업해야 한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류는 이러한 외적인 소통가능성≫내적인 통일성≫하부구조의 대칭성을 따라야 한다.

◎ 구조론의 주요개념들

● 구조는 정보≫일≫구조≫구조체≫시스템으로 발전한다. 정보는 방향성, 일은 정보의 전달, 구조는 심과 날의 포지션, 구조체는 하부구조의 세팅에 의한 통일성, 시스템은 외부와의 소통이다.

생물이나 자동차나 태풍이나 은하계처럼 독립적인 단위를 이루어 운행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시스템이다. 다른 것에 딸려 있지만 외부에서 작용을 가하면 독립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구조체다.

돌이나 물이나 지우개나 연필 따위의 물체들은 독립적인 존재의 단위를 이루지만 스스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외부에서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여 붙잡아주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위단계인 구조와 일과 정보는 그 외부의 힘이 붙잡는 절차다 구조는 평형계다. 포지션들이 밸런스를 이루므로 붙잡힌다. 일은 평형계가 붕괴되었을 때 포지션 이동이다. 정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다른 것에 얹혀 있다.

● 구조는 일한다. 일은 순환/분할/가역/연속/반복의 결정이다. 외부에서의 작용에 대응하여 판정한다. 구조는 저울이다. 평형계를 이루어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를 판정한다.

● 구조론은 자연에서 원리를 유도하는 기술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유도되어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은 없다. 반드시 외부에서 얻어오며 그 과정에 일정한 절차가 있다.

이때 핵심 유전인자만 얻어오며 그것이 원리다. 이치다. 질서다. 법칙이다. 거기에 덧입혀진 풍부한 살은 복제된 것이다. 존재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어기지 않고도 자기복제에 의해 무한히 양적인 증가가 가능하다.

존재의 속성은 궁극적으로 정보다. 그러므로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다만 그 복제된 정보가 내부에 밀도를 가지지 못할 때 외부작용에 대해서는 1로 환원되므로 질량보존의 법칙과 충돌하지 않는다.

우주는 매 순간 무한히 새롭게 창조되지만 모두 과거라는 창고에 저장되므로 1로 환원되어 세상은 여전히 제자리다. 여기서 1로 환원되어 제자리로 물러갔으나 절대량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에서 정보는 무한히 증가한다. 이전에 없던 것이 무수히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성질은 질량보존의 법칙과 충돌하지는 않으나 질량보존의 법칙이 정해놓은 세계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상식이 틀렸다.

세상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순 증가한다. 우주는 총체적으로 거대한 인플레 상황이다. 다만 늘어나는 속도와 같은 비례로 차곡차곡 접혀서 창고에 저장되므로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 구조는 포지션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포지션 변경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리바꿈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계절이 바뀌고, 인간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온갖 일들이 모두 포지션 이동이다.

태초이래 이 밖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해 무에서 유가 탄생하지 않으며, 단지 자리바꿈 곧 재배치, 재질서화만으로 존재의 스크린 위에 세상의 온갖 다양한 모습을 연출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커다란 하나의 무대이다. 스크린이다. 배우들이 대본에 따라 역할을 바꾸어가며 온갖 이야기들을 끌어낸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 상이다. 그림자다. 근본은 하나 뿐이다.

● 구조는 관계다. 사물의 고유한 본성은 없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믿는 것은 어떤 일의 진행과정에서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 유도된 것이며 그 관계는 1이 아니라 2에 의해 성립한다. 즉 나의 절반은 타인이 결정한다.

세상은 요소들이 어떻게 ‘만나고, 맞물리고, 맞서고, 합쳐지고, 통하는가’에 따라 2차적으로 결정된다. 나의 절반은 나와 접촉한 타인이 결정한다.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왜 어떻게 만났는가에 따라 나의 본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나의 절반만 순수한 나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의 가족, 나의 직업, 나의 재산, 나의 명성, 나의 세상, 나의 조국이 나의 나머지 절반을 구성한다. 그 외적으로 전개된 나머지 절반도 일정부분 나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다.

● 구조는 원자론을 극복한다. 원자론의 원자개념을 대체한다. 세상은 작은 원자의 집적이 아니라 크기와 무관한 구조체의 집적으로 이루어진다. 원자는 일정한 숫자가 존재하지만 구조체의 하부구성요소인 정보는 무한히 증가한다.  

원자의 세계는 일정한 숫자, 일정한 크기의 닫혀있는 세계지만 구조의 세계는 무한히 증가하고 무한히 작아지고 무한히 커지는 열려있는 세계다. 무한히 작은 구조체도 있고 우주만큼 큰 구조체도 있다. 우주도 하나의 구조체다.

물질을 무한히 쪼개면 무한히 작아지고 무한히 증가한다. 우주의 궁극은 정보다. 정보는 무한복제된다. 다만 외부와 대응할 때 1로 환원되므로 그 무한이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러나 일정한 영역 안에서는 무한히 증가한다.

북을 울리면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생겨나 무한히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 정상에 봉화를 올리면 무한히 많은 사람들이 그 불꽃을 본다. 그러므로 세상은 풍요롭다. 그 무한에 의해 넉넉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 구조는 존재의 알고리듬이다. 구조는 존재의 프로그램 순서도(flow chart)다. 순서도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작업이냐 반복작업이냐다. 단순작업은 아날로그 구조체이고 반복작업은 디지털 구조체이다.

디지털 구조체는 피드백을 가진다. 출력측의 입력전환이다. 그럴 때 완전하다. 소통이 가능하다. 존재는 관계맺기이며 그것은 나의 일부를 내가 만나는 상대방이 결정하는 것이다. 곧 피드백이다. 그렇게 소통의 창을 연다.

● 구조체는 한 쌍의 자와 콤파스다. 자와 콤파스로 작도할 수 있다. 콤파스는 두 자를 하나의 축에 종속시켜 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기하학은 콤파스만으로 성립될 수 있다.

두 자가 날이고 축이 심이다. 콤파스는 심과 날 사이에 지배-종속관계를 정한 것이다. 포지션을 지정한 것이다. 비가역적인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자는 왼쪽이나 오른쪽에서 긋기를 시작할 수 있지만 콤파스는 축에서만 벌리기가 시작된다.  

구조체를 (┳)로 나타낼 수 있다. (   )는 입력과 출력을 나타낸다. ┳는 하나의 축과 두 발을 가진 콤파스다. 이때 축이 심이 되어 날의 두 발을 제어한다. 저울 역시 콤파스를 반영하고 있다. 저울은 밀도를 나타낸다.

심에서 날이라는 일방향성에 의해서 우주에 첫 정보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격발되었다. 정보의 무한복제가 극도의 인플레를 이루어 거대한 우주를 창조했다.

구조주의적 세계관

● 존재는 언제나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위에서 아래로, 밖에서 안으로,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형식에서 내용으로, 불균일에서 균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복잡에서 단순으로 움직인다.  

바둑을 두어도 주변의 영역과 많이 물려있어서 밀도가 높은 화점에서 출발한다. 주변과 팽팽하게 물려있는 화점이 가장 긴장도가 높다. 그곳이 기둥줄이 되고, 근간이 되고, 줄기가 되고, 벼리가 된다.

● 양질전화는 없다. 존재는 질에서 양으로, 들뜬상태에서 바닥상태로 이행한다. 양질전화의 착각은 정보의 무한복제 때문이다. 물의 온도가 일정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면 일제히 끓는 것이 아니다. 이는 외견상의 착시다.

불과 물의 집적상태가 이미 높은 질서다. 곧 질이다. 닫힌 계의 한 부분에서 이미 높은 질서의 질이 달성되었는데 그 정보가 무한복제 되어 계 전체에 고루 전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국가 전체에 모순이 팽배해야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한 부분에서 이미 일어난 혁명이 전체에 전달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네티즌이 불만이 가득차야 정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도입 자체가 이미 혁명이다.

● 물고기가 꼬리를 왼쪽으로 치든 오른쪽으로 치든 몸통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심의 1이 대칭을 이루는 날의 2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새의 좌우 날개는 방향성이 없으므로 결국 원위치 된다. 몸통의 방향이 진짜다.

자전거는 먼저 균형을 잡고 다음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전진해야 저절로 균형이 잡힌다. 균형은 좌우의 날 2고 전진은 심 1이다. 구조는 심 1이 날 2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사회도 먼저 전진해야 진보와 보수의 밸런스가 잡힌다. 먼저 밸런스를 잡으려고 하면 끝내 그 밸런스를 잡지 못한다. 정치에서 중도노선이 옳은데도 중도파는 항상 패배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 힘이 꺾어지는 연결부위가 구조적 취약점이다. 모든 고장은 힘이 전달되는 연결부위에서 일어난다.

●  완전무결한 시스템은 없다. 구조는 고장이 나지 않게 세팅될 수 있으나 최초 입력과 최후 출력부분은 세팅될 수 없다.

● 어떤 존재든 1을 이루고 있다. 가만이 있는 물체도 무게중심이 있고 움직이는 물체에는 운동의 중심이 있고 작용하는 물체에는 힘의 중심이 있다. 내적 정합성이 있고 요소를 일관되게 통일하는 테마가 있다.

● 만병통치약은 없다. 존재의 절반은 나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바깥의 환경을 동시에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바깥의 환경은 부단히 변화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에 따른 부단한 미시제어 과정이 있어야 한다.

● 세상은 온통 역설이다. 정치는 역설이고 경제도 역설이다. 어떤 표적을 겨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표적을 닫힌계 내부에 가두어야 한다. 존재는 밖에서 안으로 이행하므로 먼저 밖으로 나아가 바운더리를 구획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작전에 임하여 표적의 반대방향으로 먼저 전개한다. 표적을 넓게 포위하는 것이다. 그 포지셔닝 과정은 오히려 표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역설이다.

● 주변부가 중심부를 치는 것이 역사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모든 변화는 밖에서 온다. 안에서 자가발전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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