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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845 vote 1 2008.06.25 (21:39:07)

2. 구조주의 역사

출발점 찍기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뜰앞에 피어난 화려한 꽃도 근본을 추적해 보면 하나의 작은 씨앗으로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씨앗은 그러한 성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씨앗은 원래 그렇다. 그것은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것이 옛 사람의 견해였다. 원자론이다. 원자는 만물의 씨앗이다. 씨앗은 원래 그렇다. 고유한 속성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세상은 원자라는 씨앗이 꽃을 피운 것인가? 틀렸다. 고유한 속성 따위는 없다. 원자는 없다. 씨앗 또한 중간에 거쳐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근본은 따로 있다.

꽃은 씨앗 속의 유전자가 피운다. 유전자는 정보의 집적이다. 정보는 관계에서 나온다. 씨앗은 물과 햇볕과 거름을 만나 관계를 맺고서야 꽃을 피울 수 있다. 관계는 만남이다. 만물의 근본은 정보다. 정보는 만남이다.

만남은 둘 이상에 의해 성립한다. 혼자서는 만날 수 없다. 혼자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만유의 성질은 물(物) 자체에 고유하지 않고 어떤 상대적인 만남과 그에 따른 관계맺기에 의해 2차적으로 성립한다.

칼은 도마 위에서 무우를 만나야 칼이다. 연필은 종이를 만나 글씨를 이루어야 연필이다. 만나서 관계를 맺으면 전봇대도 이쑤시개가 될 수 있고 임자를 만나지 못하면 고려청자도 한낱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론은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왜인가? 세상은 너무나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물 자체의 속성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면 그 현상의 숫자 만큼 원소가 있어야 한다.  

삼라만상의 온갖 현상을 씨앗의 논리로 설명하려면 온갖 씨앗이 있어야 한다. 원소의 숫자는 점점 증가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숫자처럼 증가한다. 힌두교에 등장하는 신은 많기도 하다.

일본의 신도라서 다르지 않다. 신의 숫자는 국어사전에 오른 개념의 숫자만큼 늘어난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할 때 하나의 신이 탄생한다. 이런 식이라면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구조주의는 세상의 모든 개별현상을 하나의 통합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일원론적 태도로 부터 출발한다. 세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추적해 보면 한 지점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은 산의 정상에서 모두 만난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보면 강의 하구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족보를 따라 거슬러올라가 보면 아담과 이브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결국 세상은 하나다.

세상은 크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신들의 숫자가 많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일원론이 다원론을 극복한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세상은 결국 하나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이 하나인 이유는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연결하는 것은 길이다. 길은 도(道)다. 도(道)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되돌린다. 그러므로 진리는 예로부터 도(道)로 표현되어 왔다.  

엄마와 아빠와 자녀들은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대한민국국을 이룬다. 머리와 몸통과 손발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사람을 이룬다.

구조는 연결이다. 연결될 때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관계맺기에 의해 만유의 고유한 속성이 유도된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짓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구조적 관점의 탄생

세상은 크고 현상은 다양하다. 하나의 주머니에 우겨 담으려면 그 주머니는 매우 커야 한다. 가장 큰 주머니는 무엇일까? 거짓말하기 시합과 같다. 먼저 말하면 진다. 상대가 어떤 거짓말을 해도 더 큰 거짓말을 댈 수 있다.

가장 큰 숫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주머니는 어떤 주머니인가? 그것은 점점 커지는 주머니다. 고무풍선처럼 계속 커지는 주머니가 있다면 모두 담을 수 있다.

계속 커지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점점 커지면서도 본래의 하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큰 나무다. 큰 생태계다. 큰 도시다. 큰 조직이다. 그것은 큰 나라다. 큰 네트워크다.

그것은 유전인자다. 씨앗이 되는 어떤 기초적인 소스가 있다. 그 소스로 부터 복제하여 점점 양이 많아진다. 나무처럼 커지고 개미집처럼 커지고 도시처럼 커진다. 그러면서도 최초의 출발점과 연결을 유지한다.

그 연결이 끊어지면? 풍선은 터진다. 둘로 쪼개진다. 그 경우 정체성을 잃고 변질되고 만다. ‘하나여야 한다’는 전제와 어긋난다. 변질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연결되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도 서로 통해야 한다.

산의 정상은 하나여야 하고 강의 하구도 하나여야 한다. 하나이기 위해선? 연결해야 한다. 무엇이 연결하는가? 도로다. 길이다. 도(道)다. 추상화 하면 관계다. 구조는 세상을 관계망으로 이해한다.

세상은 붕괴되지 않는다. 도시가 너무 커지면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도로에 의해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붕괴되지 않는다. 보존된다. 세상이 보존되듯이 보존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질서다.

질서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둘로 쪼개져서 서로 떨어져 있게 되어도 연결이 유지되는 것이다. 자녀가 크면 분가한다. 부모와 헤어진다. 그러나 연락은 유지된다. 소통은 유지된다. 그것이 질서다.

질서가 있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자라고, 점점 커지고, 점점 복잡해져도 하나의 단일체를 유지하면서 보존되어 계속 가는 것이다. 가족이 커져서 국가가 되고 나무가 커져서 숲이 되어도 질서가 있으므로 본질은 유지된다.   

점(點)은 분리된다. 쪼개진다. 떨어진다. 하나가 아니게 된다. 선(線)은 연결하지만 단지 길어질 뿐 커질 수 없다. 크기가 없다. 면(面) 역시 넓어질 뿐 커지지 않는다. 크기가 있는 것은 입체다.  

그러나 입체는 딱딱해서 커지기 어렵다. 입체처럼 크기를 가지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것은? 점점 커져서 분리 되면서도 본체와 연결을 유지하므로써 최초의 단일체가 갖는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밀도다.

본래 하나로부터 비롯되고, 점점 커져서 마침내 분가하게 되며, 그러면서도 연결을 유지하여 가족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질서를 유지하며 보존되는 것은? 그것은 어떤 기초적인 소스로부터 무한복제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은 그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구조다. 구조는 망이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한 지선을 차지하고 거기서 사이트를 개설하여 점포를 열고 독자적인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열린 구조라야 한다.

그럴 때 구조는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발전된 구조가 세상 모든 것을 두루 포용하여 낼 때 그것은 패러다임이다. 구조론은 관계에 대한 이론이며 동시에 진보에 대한 이론이고 또 질서에 대한 이론이다.

● 속성 - 만유의 속성은 관계가 낳는다.

● 진보 - 관계는 점점 커지면서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 질서 - 구조는 네트워크에 의해 연결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속성은 씨앗이다. 진보는 씨앗의 성장이다. 질서는 꽃이다. 한 알의 작은 씨앗이 물과 흙과 태양과 거름을 만나 새싹으로 진보한다. 발전한다. 점점 커진다. 마침내 꽃을 피운다. 거기에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일찌기 이러한 구조적 관점에서의 착상이 있었다. 탈레스의 물 일원론이 그 시작이라 하겠다. 탈레스가 최초로 구조를 사유하였다. 물은 무르다. 딱딱하지 않다. 물은 생명을 자라게 한다. 물은 하천으로 강으로 바다로 연결된다.

물은 구조의 모든 성질을 가진다. 탈레스가 물 일원론을 주장했을 때 물의 어떤 속성을 빗대어 말한 것이지 물(水) 자체를 말한 것은 아니다. 물도 있고 돌도 있고 쇠도 있고 불도 있는데 유독 물만 선택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물의 속성을 뽑아 추상화하여 독립적인 개념을 만들어야 한다. 이 수준에서 나온 착상들 중 하나가 원자론이다. 원자는 씨앗이다. 그 씨앗은 쌔싹으로 자라나서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러나 틀렸다.

원자론은 위에 열거한 많은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원자는 돌처럼 딱딱하므로 스스로 커질 수 없다. 씨앗은 흙과 물과 태양과 거름을 만나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 원자론은 그 만남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작은 씨앗에서 한 떨기 어여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원자 개념을 상상했지만 틀렸다. 씨앗은 껍질이 있다. 딱딱하다. 구조는 성장한다. 딱딱한 것은 성장할 수 없으므로 무른 개념이 제시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이 구조와 가깝다. 그리이스 철학의 카오스와 코스모스 개념도 그러하다. 도교의 도(道) 개념, 장자의 혼돈개념에도 구조적 측면이 사색되어 있다.

중국철학 특유의 음양론과 오행론 역시 일정부분 구조원리를 반영한다. 음양론의 조화설 개념은 구조가 점점 성장하는 성질을 반영한다. 오행론의 상생상극개념은 구조론의 관계망 개념과 닮은 부분이 있다.

석가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개념과 금강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개념에도 구조의 관계-상대성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인연의 인(因)은 씨앗이다. 최초의 소스다. 연(緣)은 그 씨앗의 성장이다. 기(起)로서 꽃 피운다.

근대에 와서는 헤겔의 변증법이 구조론을 닮아있다. 정(正)과 반(反)의 대칭개념은 구조론의 평형계 개념을 닮았다. 다만 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합(合)에서 다시 정으로 되돌아가서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졌다.  

데카르트의 연역법과 그의 방법적 접근이 거둔 일부 성취는 중요하다. 연역의 제 1원인 개념은 구조론이 말하는 ‘성장하여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어도 네트워크에 의해 연결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질서개념과 닮았다.

인간에게 칼을 주면 곧 휘두른다. 자(尺)를 주면 곧 사물을 잰다. 그 칼과 그 자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특히 동양사상은 실용적인 산술에 관심을 가졌을 뿐 근거가 되는 보편원리의 발견에 소홀하였다.    

세상 모든 것은 높은 질서≫낮은 질서로 간다. 근본을 돌아보지 못하고 실용에 빠져버린다. 반면 데카르트는 수학자였지만 연산에 몰입하지 않고 시선을 그 반대편으로 돌려 근원을 더듬었다. 수학의 자궁을 찾은 것이다.

수학의 최초 탄생지점이 중요하다. 반드시 자궁이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수학의 자궁을 탐색한 사람은 없다. 항상 근본이 있다. 낙동강은 황지에서 시작되고 한강은 검룡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들은 물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을 뿐 물길을 거슬러 그 수원지를 조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주의가 발명한 눈에 보이는 온갖 신기한 물건들에 홀려서 호기심많은 아이들처럼 줄지어 뒤따라갔다.

현대철학의 구조주의도 그러하다. 이름만 구조를 내세울 뿐 누구도 구조의 자궁을 탐색하지 않았다. 황지와 검룡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구조로 설명하기를 시도했지만 하나의 소스인 구조체를 해명하지 않는다.

소스인 C언어도 모르면서 실용적인 소프트웨어만 개발한 격이다. 소스를 모르면 반드시 한계가 있다. 씨앗을 찾았다고 다가 아니다. 만유의 소스가 있고 만유의 유전인자가 있다. 씨앗 속에서 그 유전인자를 찾아야 한다.

카오스이론의 일부 개념이 오히려 구조의 본질에 가깝다. 카오스이론이 주목한 난류는 곧 밀도의 장(場)이다. 밀도의 장이야 말로 구조체의 자궁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탄생했다. 장자의 혼돈 개념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혼돈은 질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질서의 자궁을 탐색함이다. 무질서는 질서의 파괴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세상에는 질서가 있다. 모두들 질서를 좋아한다. 아이들처럼 그리로 졸졸 따라갔다.

그들이 근대의 모든 성취를 일구었다. 대단하다. 그러나 완전하지 않다. 아름답지가 않다. 고결하지 않다. 사색했어야 했다. 그 질서의 자궁을 탐색했어야 했다. 자궁은 낳는다. 세상은 위대한 낳음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른 것이 낳을 수 있다. 질서는 딱딱해서 낳을 수 없다. 장자에 의하면 태초의 혼돈에 일곱개의 구멍을 뚫어 질서를 부여하였더니 혼돈이 죽었다고 했다. 혼돈처럼 커다란 하나의 주머니가 있다.

구조는 세상의 자궁이다. 모든 것을 낳았다. 아기를 잉태한 자궁은 점점 커진다. 그러면서도 애초의 하나를 유지한다. 꽃처럼 화려하면서도 씨앗처럼 소박하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제각기 독립하면서도 네트워크로 소통한다.

구조주의에서 구조론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군 특유의 발달한 조직과 전술, 시스템은 본래 로마에 정복당한 에트루리아인의 뛰어난 석조건축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들은 건축가의 마인드로 군대를 운영한 것이다.

로마군은 특히 숙영지 건설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잠시 쓰고 버릴 숙영지라도 교범에따라 튼튼하게 짓는다. 단지 전투에 승리할 목적이라면 그렇게 튼튼한 숙영지가 필요하지 않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회의 전투로 사태가 종결되기를 기대한 게르만족은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숙영지가 주둔지로 변하고 주둔지가 식민도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전투는 장기화 되고 성질급한 게르만족은 그만 질려버린다. 전의를 상실한다.

건축가가 집을 짓듯이 조금씩 쌓는다. 게르만의 땅을 야금야금 먹어간다. 적의 땅을 일거에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빈 땅을 개척하여 조금씩 도시를 건설해 간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의 전략가들이 말하는 바와 접근방법이 다르다.

전장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중요하고 장수의 임기응변하는 지휘능력이 중요하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은 전쟁의 명분이고 리더가 주입하는 것은 전쟁의 목표다. 그러나 로마군은 다르다.

그들은 본래 돌을 쪼는 석수장이였다. 석수장이처럼 열심히 쌓아댄다. 한니발과 같은 장수의 천재적인 자질이나 제갈량과 같은 신묘한 전술구사와 다르다. 전술의 기본은 속임수라는 손자병법의 주장과 다르다.

전쟁이란 쓸어버리는 것이다. 방해자를 없애는 것이다.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은 반대다. 그들은 건설한다. 도로부터 닦았다. 항구를 열고 배를 보내고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로마군이 항상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은 건축가가 도시를 건설하듯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형태의 집요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경우 뛰어난 리더가 없어도 교범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게 된다.

쓸어버리는 데는 속임수가 필요하다. 속임수는 1회용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건설하는 데는 속임수가 불가능하다. 건설은 결코 한번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적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적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으로 승리했다. 적의 땅을 빼앗고 전리품을 챙겨 떠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저앉아 도시를 건설하고 눌러살며 상품을 교역할 것에 대한 신뢰였다.

그 신뢰로 이겼다. 전투에서는 한니발에 속아서 졌어도 전쟁에서는 결국 이겼다. 건축가의 마인드로 이겼다. 건축술과 국가의 시스템은 깊은 관련이 있다. 국가도 건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란 건축가의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만 구조론에 있어서 그 건축은 정보의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하드웨어다. 정보의 건축은 소프트웨어다. 건축은 질서를 추구하고 정보는 무질서를 통제한다. 반대다.

● 재래의 전쟁 - 방해자를 제거한다.

● 로마의 관점 - 쌓아올려서 건축한다.

● 구조의 관점 - 길을 열어서 서로 소통시킨다.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될 수 있다. 재래의 관점은 그저 앞길을 막는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보수세력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로라 부시의 유머에 이런 것이 있다. “전기톱으로 잘라버려!”

부시가 텍사스 농장에서 곤란한 일이 있으면 항상 던지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라크가 문제라구? 제거해버려! 북한이 문제라구? 제거해버려! 그들은 로마교범의 방법을 쓰지 않았다. 로마는 제거하는 대신 건축했다. 포용했다.

구조론은 건축한다. 그러나 구조의 건축은 단단한 하드웨어 건축이 아니다. 부드러운 소프트웨어 건축이다. 일의 구조, 정보의 구조다. 의미의 구조, 가치의 구조다. 변화의 구조, 진보의 구조다. 최종적으로는 소통의 구조다.

● 보수세력의 단선적 사고- 전진과 후진 밖에 없는 선(線) 위에서는 단지방해자를 제거할 뿐 다른 수단은 없다.

● 진보세력의 건설적 사고- 상하좌우가 있는 입체에서는 방해자를 뛰어넘어 우회할 수도 있고 포용할 수도 있다. 다른 수단이 있다.

● 구조론의 완전성과 소통 - 진보세력의 건설적 관점이 하나의 질서아래에서 점점 커질 뿐인데 반해 서로 분리되어서 네트워크를 이루고 소통한다.   

구조론은 서구의 구조주의 마인드와 다르다. 서구의 건축은 유형의 건축이다. 질서있는 건축이다. 그들은 지배하고 조직하고 통제한다. 구조론은 무형의 건축이다. 질서를 초월한 건축이다. 이심전심으로 소통한다.

서구의 구조주의 건축은 단지 입체를 조직할 뿐이지만 구조론의 정보건축은 밀도를 조직한다. 밀도는 무르다. 로마군단의 조직력이 뛰어났다지만 하나의 단일체라는 한계가 있었다. 구조론은 그 한계를 극복하다.

입체건축은 정보건축의 하부구조다. 정보건축은 입체건축의 상부구조다. 입체건축은 건물을 올려 집을 짓고 정보건축은 길을 닦아 도시를 건설한다. 입체건축은 하나의 대문으로 통제하고 정보건축은 사통팔달로 개방한다.

입체건축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정보건축은 여러개의 부도심을 가진다. 입체건축은 지배하고 정보건축은 호응한다. 근본적인 관점의 차이가 있다. 한 차원 더 높은 데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 동양적 사고가 있다.

서구의 구조주의 사조에는 미학적 완전성의 개념이 없다. 이심전심 수평적 소통의 개념이 없다. 로마처럼 지배할 뿐 인도처럼 공존하지 못한다. 동양철학에는 옛부터 그러한 발상의 씨앗이 있었는데 서구철학에는 원초적으로 없다.

서구의 구조주의 철학과 필자의 구조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의식적으로 구조주의와 관련한 서적은 피했다. 구조론이라 이름한 이유도 구조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차이가 있다. 구조론이 구조주의에 앞선다.

구조론과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차이는 기하와 대수의 차이와 같다. 동양수학은 기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보편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급기술자의 실용학문으로 수준이 낮아졌다.

구조주의가 대수학이라면 구조론은 기하학이다. 기하가 대수에 앞선다. 대수학은 기하학을 연산한 것이다. 대수학은 단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이지만 기하학은 그 문제가 어떤 원인으로 생겨났는지 추론한다.

구조론은 국어사전에 일정한 기술체계가 없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그 사전의 기술체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또 세상의 모든 오류가 실은 사실판단에서의 오류가 아니라 언어사용에서 빚어진다는 인식을 얻었다.

보이는 것은 같은데 그것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진 것이다. 언어를 과학화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풀린다. 그렇다면 문법에 답이 있다. 그리고 그 문법은 자연의 진리를 반영한다.

그 자연의 진리를 포착하는 언어는 1차적으로 대수학이고 2차적으로 기하학이다. 대수학과 기하학을 넘어 자연의 본래와 직접 연결하는 것은?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을 더 진전시킨 것은 불교의 인연 개념에 대한 깨달음과 린네의 분류이론에서 얻은 아이디어에서였다. 그리고 기하학의 점, 선, 면, 입체의 차원개념에서 구조론의 입력, 저장, 제어, 연산, 출력의 5를 얻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대칭원리를 얻고, 데카르트의 제 1원인에서 연역법을 얻었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모순되는 마르크스의 양질전화 개념에 대한 의문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모순문제가 풀렸다.

구조론은 이 모든 생각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에서 구조론이 나오 것은 아니다. 구조론의 씨앗은 순수하게 나의 내부에서 나왔고 이들은 햇볕과 물과 거름과 흙의 역할을 했다. 완성된 구조론을 모든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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