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없다. 있어도 알 수 없다.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회의주의자다. 그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진리는 도구다. 진리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도구가 없다. 개나 고양이에게 언어가 없는 것과 같다. 회의주의자는 도구가 있어도 사용할 능력이 안 된다. 개나 고양이는 어차피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회의주의자는 도구를 알아도 그 도구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개나 고양이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다른 개와 다른 고양이에게 사람 말을 가르쳐 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게 자기소개다. 자연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어려운 형편을 말하고 있다. 진리는 있다. 자연에 있다. 자연은 진리를 도구로 쓴다. 구체적으로는 의사결정구조다. 자연이 존재하는 이유는 의사결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실패했다면 자연은 붕괴했다. 진리는 에너지가 형태를 만드는 데 쓰는 도구다. 암흑에너지는 형태를 만들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가 진리를 도구로 쓰고 나머지는 묻어가는 것이다. 인간 중의 일부는 진리가 없다. 도구가 없다. 인간 중의 다수는 도구를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그게 어딘가에 존재하여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들에게 진리는 태양과 같다. 인간이 임의로 태양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태양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들에게 진리는 능동적으로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적응해야 하는 환경이다. 자연은 당당한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는 자연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형편이다. 불쌍한 인간이 있다. 도구를 장악하지 못하므로 허무하다. 피아노는 있는데 연주를 못 하니 허무하다. 허무주의. 그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회의주의. 그것은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다. 상대주의. 도구를 장악하지 못하면 권력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불쌍하다. 그들은 의사결정권이 없고 그러므로 의사결정하지 못한다. 진리는 있다.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다.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여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단 말귀를 알아듣는 자들에게만 가능하다. 진리는 도구이고 도구는 권력이다. 권력은 사건을 설계하고 게임의 주인이 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