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는 형태가 없다. 에너지가 형태를 만들어야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에너지는 언제라도 형태를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너지의 가는 길을 알 수 있다.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그것이다. 에너지가 작용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에너지는 배후에서 은밀히 움직이지만 이 지점에서는 인간에게 모습을 들키고 만다. 딱 걸리는 지점이 있다. 이 길과 저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에너지는 잠시 멈추고 모습을 드러낸다. 에너지가 형태를 만들어 의사결정하는 지점을 포착해서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 ### 진리가 있다. 진리는 도구다. 자연은 도구를 쓴다. 의사결정구조가 도구다. 도구는 모으고, 연결하고, 주도한다. 에너지는 모아야 하고, 사건은 연결해야 하고, 게임은 주도해야 한다. 도구가 없으면 흩어지고, 단절되고, 종속된다. 흩어지면 허무주의가 되고, 단절되면 회의주의가 되고, 종속되면 상대주의가 된다.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는 도구가 없는 자의 신세한탄이다. 에너지는 결 따라간다. 인간은 먹히면 한다. 인간은 할 수 있는 짓을 하고 에너지는 갈 수 있는 길로 간다. 인간은 단지 그것을 잘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에너지는 단지 그 길로 잘 가기 때문에 그 길로 간다. 우리는 에너지가 가는 길을 알 수 있고 인간이 하는 짓을 알 수 있다. 정상에서 굴러간 돌은 기슭에 모여 있다. 경마장에서 돈을 딴 자들은 술집에 모여 있다. 뻔하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도구를 손에 쥐고 게임을 주도해야 한다. 허무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는 도구를 손에 쥐지 못한 자, 자연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자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사슴이 있는데 쏘려니 활이 없고, 미인을 만났는데 연락처를 물으려니 남친이 있고, 포도가 잘 익었는데 여우의 손이 짧아서 포도송이에 닿지를 않으니 그것은 허무한 것이며, 그것을 회의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상대적인 것이다. 그게 말하자면 자기소개다. 그것은 존재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형편이다. 자연이 허무하고, 회의되고,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러는 거다. 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인간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도구는 권력이다. 도구는 능동이다. 도구는 절대성이다. 도구가 없으면 권력이 없고, 권력이 없으면 상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눈치를 보며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 상대성이다. 문제는 인간의 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형상이다. 형상은 뇌에 비친 그림자다. 마음이라는 모니터에 띄워진 영상이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보는 불쌍한 존재다. 존재의 진실에 이르려면 능동적으로 보여지는 과정을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눈에 형상이 비치기 전에 에너지가 형태를 만들어 의사결정하는 과정을 포착해야 한다. 커튼으로 가리워진 무대 뒤에서 연출자가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알아내려면 의사결정구조라는 커튼을 들추어봐야 한다. 자연이 능동적인 연출자라면 인간은 수동적인 관객이다. 자연에 권력이 있고 인간에 권력이 없다. 자연이 능동적으로 게임을 설계하고 인간은 수동적으로 낚인다. 원하지 않는 게임에 말려든다. 그러므로 허무하고 그러므로 회의한다. 승부가 운에 달렸으니 상대적이다. 극장의 관객처럼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생각나는 것을 생각하는 식이라면 마술사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연출자의 테크닉에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연에 속는다. 자연이 쓰는 방법을 인간이 써야 한다. 의사결정구조를 도구로 사용하여 직접 사건을 설계하고 에너지를 통제하고 게임을 주도해야 한다. 무대 아래에서 졸고 있는 관객의 포지션을 버리고 무대 위를 휘젓는 연출자의 포지션으로 올라서야 한다. 딜러가 되어야 한다.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도구를 장악해야 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