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인 단계까지 추적해 들어가면 우주는 에너지로 설명된다. 에너지는 수학적인 접근이다. 수학은 어떤 둘의 상대적인 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물질 내부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은 물질의 성질이다. 그런데 물질이 성질을 가지면 그 성질을 단서로 한 번 더 내부를 쪼갤 수 있다. 물질이 성질을 가지면 그것은 궁극적인 단계가 아니다. 여기서 내부냐 외부냐다. 속성이 내부라면 수학은 외부다. 에너지는 수학으로 보는 접근법이고 수학은 외부를 본다. 1이 2가 되면 2는 4가 되는 것은 수학이다. 1은 건드리지 않는다. 내부를 쪼개지 않는다. 2는 1보다 크므로 외부의 사정이다. 수학은 내부를 건드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외부를 논한다. 물질의 존재를 궁극적인 단계까지 추적했을 때 우리는 물질 내부의 속성을 판단할 수 없고 오로지 외부의 관계만 판단할 수 있다. 에너지의 성질은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관측하는 것은 변화이며 변화는 움직임에 의해 일어난다.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여 밀어내며 그러다가 교착되면 한 곳에 모인다. 여럿이 일제히 움직이면 결국 모두 한 방향으로 모이게 된다. 여기서 방향이 탄생한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물질의 고유한 성질은 없고 우리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단서로 삼아야 한다. 처음에는 무방향이다. 에너지는 좌충우돌 한다. 그런데 저절로 방향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계라고 한다. 자원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충돌하면 보다 효율적인 것이 승리하기 때문이다. 자원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빈 공간이 만들어지고 진공이 주변을 끌어당겨서 가속적인 쏠림을 유발하므로 죄다 붙어버리는게 중력이다. 그것이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에너지의 방향은 오직 확산과 수렴이 있을 뿐이며 확산은 단절되고 수렴은 연결된다. 우주에는 연결과 단절만 있다.
궁극적인 단계는 수학으로 접근된다. 궁극적인 단계까지 추적하면 우주 안에는 오직 사건의 연결과 단절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만약 무언가 단서가 있다면 거기서 한 번 더 쪼개야 한다. 그동안 인류는 원자 중심의 사고를 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계를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 원자는 1이고 계는 집합이다. 1은 성질이 없고 집합이 성질을 가진다. 원자는 쪼갤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쪼갤 수 없다는 것은 고유한 성질이 없다는 의미다. 만약 성질이 있다면 그것을 한 번 더 쪼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이해했다면 당신은 이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것은 사유의 결실이 아니라 동물적인 자극과 반응에 따른 것이다. 원자를 대체하는 계의 지정에서부터 비로소 인간의 생각이 작동한다. 때로는 원자개념이 계를 대신한다. 그러나 원자는 기본적으로 대상을 두드려보고 반응을 끌어내자는 개념이지 수학적인 접근이 아니다. 대상과 접촉하면 오염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개입이며 그것은 순수하지 않다. 관찰자의 선입견이 반영되어 있다. 그 경우는 순수학문이 아니라 응용학문이다. 철학자의 탐구방법은 사고실험뿐이며 그것은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다. 원자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개입대상을 특정하려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왜곡된 것이다. 인간의 편견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수학은 피라미드에 올라가지 않고 피라미드의 높이를 잰다. 인간은 달에 가지 않고도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를 잰다. 대상에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각은 백퍼센트 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생각은 순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