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156 vote 1 2021.12.11 (14:13:26)

    경주 시내 한가운데에 많은 고분이 있다. 그중에 반은 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 왕비나 갈문왕도 왕으로 대우받던 시절이었으므로 모두 왕릉은 아니다. 금관은 제사장의 상징인데 황남대총 남분에 금관이 없고 하사받은 작은 금동관 넷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위가 왕이 되고 왕비가 제사장 노릇을 한 것이다. 황남대총의 다른 유물은 남분이나 북분이나 급이 같은데 금관만 다르다. 불교가 없던 시절은 왕이 종교다. 왕을 신으로 숭배한다. 무덤이 크다고 왕이라고 볼 수는 없는게 무덤이 너무 다닥다닥 붙었기 때문이다.


    후대로 갈수록 무덤이 작아도 능원이 독립해 있다. 지마왕, 일성왕은 릉이 남산 밑에 있는데 앞에 제단이 만들어져 있는게 형식이 비슷하다. 일성왕은 석실분이므로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의 릉은 어쩌면 후대의 혜공왕, 선덕왕, 소성왕, 애장왕 중에 하나일 게다.


    서악동 고분군은 가야고분군 비슷하다. 가야는 멀리서 잘 보이도록 산꼭대기에 무덤을 쓴다. 신라가 가야를 먹어가던 시기에 잠시 유행한 것이다. 배리 삼릉도 산줄기를 따라 나란한 것이 비슷하다. 시내의 고분군은 5대 파사왕부터 22대 지증왕 사이로 봐야 한다.


    파사왕이 월성을 쌓아 도읍을 북쪽으로 옮겼으므로 무덤은 오릉이 아닌 경주 시가지로 옮겨진다. 가장 큰 무덤이 파사왕의 능일 수 있다. 파사왕이 신라 최초의 정복왕이다. 법흥왕 이후로는 불교의 영향으로 무덤이 작아지고 왕릉이 경주시내 외곽으로 진출한다.


    경주가 커져서 시내에 무덤자리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도 무덤이 도시를 삼켰기 때문이다. 위성지도로 보면 알 수 있다. 불교가 전래하자 왕이 더 이상 신이 아니므로 무덤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 시내 고분은 350년간 조성된 것이다.


    파사왕부터 지증왕까지 17대에 걸쳐 왕과 왕비와 갈문왕, 고위 귀족 무덤을 조성했다고 본다면 숫자가 맞다. 무덤형식이 같고 크기가 크다. 거대왕릉 조성시기는 신라가 가장 허약할 때다. 왜에 털리고 고구려에 씹히던 시기에 거대왕릉, 황금보물이 쏟아진 것이다.


    신라가 초기에는 가야와 전쟁을 하다가, 다음 왜와 전쟁을 하고, 다음 말갈과 전쟁을 한다. 점점 더 멀리있는 세력과 대결한다. 초기부터 백제, 낙랑과 전쟁한 기록이 있지만 한성백제가 아닌 마한의 백제 동맹국이나 낙랑 동맹국과의 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봉건시대는 맹주가 소집하면 우르르 몰려가는데 맹주는 변한다. 춘추오패처럼 일시적으로 강성했다가 약해졌다가 다시 강해진다. 백제가 마한 속국이었다가 다시 마한을 먹었다가 다시 마한과 전쟁하는 기록이 이상할게 없다. 군사적 동맹에 따라 이합집산을 한다.


    익산의 건마국은 큰 마한인데 목지국과 다른 마한이다. 동맹관계에 따라 백제가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제대로 된 성곽이 있으면 고대국가이고 성곽이 없으면 부족국가다. 신라사는 월성을 쌓은 파사왕 때부터 시작된다.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올라선 것이다.


    지마왕은 가야를 치다가 실패하고 왜의 침략에 시달린다. 신라와 가야는 비슷하게 출범했지만 등자를 갖춘 말이 전쟁의 주력무기가 되면서 배를 타야 이동이 가능한 가야는 불리했다. 가야군은 배에 말을 싣고 낙동강 건너 다시 말을 타야 해서 대군을 이끌 수 없다.


    가야는 위치가 좋지 않다. 너무 바닷가에 붙어 있다. 이래서는 일본과 싸울 수 없다. 일본은 화산지역이라 철광이 없다. 나중에 사철로 일본도를 만들지만 사철은 잘 깨진다.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는 주물로 만든 검이다. ‘니들은 이런거 못 만들잖아. 구경이나 해봐라.’


    하고 엿먹이려고 일본에 준 것이다. 경주에서 대구까지 고개와 장벽이 없다. 말이 전쟁의 주력으로 뜨는 순간 신라가 순식간에 대구까지 먹어버린 것이다. 말의 등장은 말갈의 침략을 부른다. 말갈은 동예인데 이들이 안동, 상주, 의성을 놔두고 신라를 침략했다고?


    역으로 말갈의 침략에 경북이 신라로 귀순한 것이다. 말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기병이 전쟁의 주력으로 등장하면서 신라와 가야는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의 침략에 시달리던 가야가 왜를 끌어들이고, 강원도의 동예가 말을 타고 대구까지 쳐들어온 거다.


    신라는 가야, 왜, 말갈 세 세력과 동시에 싸웠는데 자동으로 영토가 커졌다. 말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까지 영토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파사왕, 지마왕 때부터 신라가 안동, 풍기까지 접수했다고 봐야 한다. 증거는? 무덤이 커졌다. 큰 무덤이 40개 정도 시내에 있다.


    법흥왕 이후 도시팽창으로 무덤이 외곽으로 밀려난 사실을 감안하면 20명의 왕이 시가지에 묻혔다. 서악동+삼릉도 포함하여 왕+왕비+갈문왕+고위 귀족으로 보면 얼추 계산이 맞다. 지마왕 이후로 AD 150년~300년 사이 원삼국시대에 그만한 무덤은 어디에도 없다.


    가야와 신라는 묘제가 다르다. 뿌리가 다른 세력이다. 아마 오릉도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닌 다른 묘제일 것이다. 야금기술을 가진 석씨가 말을 타고 등장하면서 묘제가 바뀐 거다. 신라 파사왕에서 광개토대왕까지 300년간 야금기술과 기병이 역사를 흔들어놓은 거다.


    정리하면 AD 300년 이사금시대까지 원삼국이고 신라는 경주일원의 소국이며 멀리 있는 백제, 낙랑, 말갈과 전쟁했다는 기록은 후대의 역사를 소급한 뻥이라는 식민사학계 주장은 틀렸고 신라는 파사왕 때부터 경북까지 지배했다. 왜? 야금기술+말+석씨 때문에.


    신라상대 기록에 오류가 많은 것은 왕이 없던 시대 때문이다. 최규하나 장면처럼 구데타를 당하면 기록말살형으로 왕이 지워진다. 왕이 지워지면 그 시대 일을 다른 왕의 계보에 끼워넣는다. 이집트 왕들이 기록말살을 당해 지워진 경우가 많은데 투탕카멘이 그렇다.


    기록이 지워져서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 기록에 혼선이 있지만 신라가 가야와 충돌하고, 왜와 다투고, 말갈과 싸우면서 영토가 커지는 흐름은 고고학적 성과와 맞다. 결정적으로 신라가 가장 약한 시대에 황금유물과 거대고분이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순식간에 흥했다가 쇠퇴했다가 다시 흥하곤 한다. 신라는 파사왕 때 야금기술과 기병의 전래로 순식간에 커졌기 때문에 가야와 왜, 말갈과 충돌한 거다. 작은 나라를 왜와 말갈이 공격할 리 없잖아.


    신라가 기병을 이용하여 가야를 삼키는 순간 왜는 무쇠를 구하지 못해서 국가를 보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가야는 낙동강에 막혀서 신라를 칠 수 없다. 기병의 등장과 동시에 경북 북부는 신라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낙랑 역시 망할 수밖에 없었다.


    낙랑고분에는 엄청나게 많은 쇠뇌가 출토되는데 방아쇠가 구리다. 쇠뇌는 발로 밀어서 거는 구조이므로 보병만 쓸 수 있다. 낙랑은 기병이 없어서 고구려에 밟힐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낙랑이 망하고 잔존세력이 가야와 왜로 이동하면서 광개토대왕이 토벌한 것이다.


    광개토대왕 이후 나제동맹 덕분에 가야가 잠시 살아남았지만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가야는 백제와 신라에 나누어 흡수되었다.


    왜는 왜 신라를 괴롭혔나? – 주철이 없어서


    가야는 왜 망했나? – 기병으로 낙동강을 건널 수 없어서.


    신라는 왜 흥했나? – 석씨가 옮겨오며 북방의 기병전술이 보급되어서


    광개토대왕은 왜 남정했나? – 왜와 결탁한 낙랑의 잔당 해상세력을 쳐부수려고


    낙랑은 왜 망했나? – 구리로 만든 쇠뇌+보병 방진을 주력무기로 삼다가


    가야는 왜 오래버텼나? – 나제동맹 덕분에


    백제는 왜 흥했나? – 나제동맹 전성기 백제, 신라, 왜, 가야 4국연합 맹주라서


    백제는 왜 망했나? – 연합을 유지하려고 외교에 올인하다가 중앙집권 실패로


    고구려는 왜 망했나? – 수, 당을 견제하던 돌궐이 추위로 멸망하는 바람에


    한강유역은 왜 신라가 먹었나? – 돌궐이 고구려 치고 고구려 내분에 주워먹음


    백제는 왜 한강유역을 뺏겼나? – 고구려가 백제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만만한 신라에 맡겼다가 나중 되찾으려 했는데 돌궐 때문에 계산대로 안 된 거.


    ###


    이상은 개인적으로 궁금하던 부분인데 역사책에 안 나오므로 내가 추론해서 대략 이런 흐름이 아니겠는가 하고 써두는 거. 


    원삼국시대는 혁거세, 남해, 유리, 탈해까지로 봐야 함. 파사왕 다음 지마왕 때부터 왜와 전쟁을 하는데 왜가 뭐 먹을게 있다고 바다 건너 조그만 소국을 치겠는가? 왜도 살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다. 봉건시대는 무력시위로 겁 한 번 주고 형님 동생 서열 정하고 화해하는게 보통이다.


    왜가 위기를 느끼게 만들었다면 뭔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무덤이 갑자기 커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설의 어원 김동렬 2024-12-25 6225
5631 에너지의 이해 김동렬 2021-12-13 3358
5630 일본의 몰락과 한국의 전략 4 김동렬 2021-12-13 4525
5629 쉬운 엔트로피 김동렬 2021-12-12 3258
5628 윤석열 짐승을 타격하라 김동렬 2021-12-12 3857
5627 확률과 게임 김동렬 2021-12-11 3103
» 원삼국의 문제 김동렬 2021-12-11 3156
5625 쥴리의 진실 1 김동렬 2021-12-10 5029
5624 사유의 법칙들 김동렬 2021-12-09 3149
5623 누가 볼츠만을 죽였는가? 김동렬 2021-12-09 3816
5622 갈릴레이의 확신 김동렬 2021-12-08 3102
5621 사건의 해석 김동렬 2021-12-08 3179
5620 설거지 당한 남자 윤석열 김동렬 2021-12-08 3830
5619 양질전화는 없다 김동렬 2021-12-07 3235
5618 구조론의 5단계 김동렬 2021-12-07 3077
5617 슬픈 대한민국 김동렬 2021-12-06 4208
5616 비겁한 과학자들 김동렬 2021-12-05 3640
5615 구조론의 힘 3 김동렬 2021-12-04 3417
5614 사건의 퍼즐 맞추기 김동렬 2021-12-03 3463
5613 구조의 발견 김동렬 2021-12-02 3167
5612 우주는 너무 크다 김동렬 2021-12-02 3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