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 생각해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이게 질문이 된다고 생각하나? 인간은 키가 큰가, 작은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대적이다. 악 속에 선이 있고 선 속에 악이 있다. 길다면 짧고 짧다면 길다. 그런데 '길이'라고 하지 '짧이'라고 하지 않는다. '넓이'라고 하지 '좁이'라고 하지 않는다. '밝기'라고 하지 '어둡기'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의 일방향성이다. 엔트로피다. 우주는 언제나 한 방향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성선설이 맞다. 성악설을 주장하는 자는 길이를 '짧이'라고 말하는 고집불통이다. 500방을 안겨줘야 한다. 정신 차리게 말이다. 키라는 말에 '크다'는 뜻이 숨어 있다. '키가 몇이냐'고 묻지 않고 '작기가 몇이냐?'고 묻는다면? 모자라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과는 상종하지 말자. 선악은 상대적인 표현이다. 과학가의 기술법은 엄격해야 한다. 상대어는 절대어로 바꾸어야 한다. 수학자가 나눗셈은 분수를 곱하는 것과 같다. 수학에는 나눗셈이 없다. 상대적인 것은 절대어로 치환해서 쓴다. 과학가가 상대적인 표현을 쓰면 모자라 보인다. 필자가 어렸을 때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개소리를 듣고 탄식하여 인류를 얕잡아보게 된게 구조론에 매진한 계기가 되었다. 인류의 지성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장난하자는 건가? 이 방면으로 루소의 교육이론과 홉즈의 리바이어던이 유명하다. 그런데 철학이라는게 대부분 이런 류의 개소리다. 무슨주의 무슨주의 하는게 다 그렇다. 진정한 사상가라면 모든 주의를 쳐부숴야 한다. 도대체 무슨주의 하는게 있어도 되냐? 왜 이렇게 난삽해? 일원화 시키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 철학할 자격이 있다. 잠이 온다는 말인가? 목에 가시가 돛지 않는다는 말인가? 루소의 선은 사회성이고 홉즈의 악은 반사회성이다. 교육은 원래 인간의 사회성에 주목하여 실시하는게 맞고 정치의 사회계약은 원래 인간의 반사회성에 주목하여 실행하는게 맞다. 분야가 다른 것이다. 소는 멍에를 지워 밭을 갈게 하고 말은 재갈을 물려 마차를 끌게 하는 것과 같다. 사회성은 사회성 대로 함양하고 반사회성은 반사회성 대로 계약한다. 인류는 선악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다. 그런데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선을 권장할 뿐 악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건 배반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목적은 이상사회의 건설에 있다. 답은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길거리에 똥도 있고 꽃도 있다. '저 꽃을 봐!' 하고 말을 거는 것이 정상이다. '저 똥을 봐!' 하고 말을 거는 자는 정신이상자다. 아침부터 똥타령을 한다면 곤란하다. 왜? 언어란 사회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한다. '굿 모닝'이지 '배드 모닝'은 아니다. '밥 먹었니' 하고 인사하는게 맞지 '굶었니' 하고 인사하는 넘은 역적이다. 윤석열에 진중권이다. 그게 반사회적 돌출행동이다. 냉정하게 진실을 들추어 보자. 호랑이는 반사회적 동물이다. 혼자 산다. 사자는 보다 사회적인 동물이다. 커다란 무리를 이룬다. 사자가 호랑이보다 지능이 높다. 개가 고양이보다 지능이 높다. 그런데 말이다. 천재견은 과연 천재일까? 천만에. 그게 사회성이다. 고양이는 알아도 반응을 안 한다. 오만하기 때문이다. 개의 지능에 서열을 매겨놓은 게시물이 있는데 문제가 있다. 콧대가 높고 오만한 개들은 지능이 낮게 나온다. 특히 시츄는 오만해서 인간에 집중하지 않으므로 훈련이 안 된다. 인간이라도 지능검사는 문명인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영국인들이 아이큐 테스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능검사는 흑인에게 불리하다. 하여간 사자가 호랑이보다 일단은 지능이 높다. 그런데 사자 수컷은 다른 무리의 어린 수컷을 죽인다. 왜? 사자가 너무 많으면 생태계가 파괴되니까. 사자의 동족살해는 악일까? 사자는 생태계를 지키는 환경운동의 선구자인가? 암컷은 죽이지 않는다. 왜? 암컷을 다 죽이면 멸종할 테고 골라서 죽이려니 기준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고 어린 수컷을 죽인다고 설명하는데 나는 이 개소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진화생물학은 걸핏하면 유전자를 남긴다고 하는데 유전자 남겨서 뭐하게? 개소리다. 답은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유전자를 남기려는게 아니고 다른 개체수 조절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럼 어쩌라고? 특히 인간은 유전자를 남기는데 관심 없다. 인간들이 전쟁으로 자멸하는 이유다. 전쟁이 종족보존이냐? 언어감각의 문제다. 학자들이 어휘력이 떨어진다. 중립적 표현을 써야 한다. 유전자를 남긴다는 둥 하는건 주관적 표현이다. 인간의 의도나 목적이 들어가면 안 된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가 맞다. 정리하자. 인간은 원래 반사회적인 동물이었다. 호랑이처럼 영역을 가지며 자기 영역에 외부인이 들어오면 죽인다. 호랑이는 주로 호숫가를 영역으로 가진다. 호수에 물 먹으러 오는 짐승을 사냥한다. 암호랑이는 딸 호랑이에게 특별히 영역 일부를 내준다. 인간은 열심히 영역을 지키고 외부인을 죽여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 5만 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많은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대집단이 출현했다. 그리고 인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원래 인간은 엄마와 자녀로 씨족을 이루었고 아빠는 존재가 없다. 1만5천 년 전에 종교가 등장하며 대집단이 출현하여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넓혀갔다. 바야흐로 문명이 일어난 것이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뀌고 낯선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게 되었다. 무엇인가? 인간은 원래 선과 악이 50 대 50으로 균형을 이루었다. 30만 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내왔는데 5만 년 전쯤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급속하게 세를 불리고 겉잡을 수 없는 이동을 개시하여 많은 원시부족을 멸종시키고 현생인류를 오대양 육대주에 퍼뜨렸다. 종교가 발생하고 대부족이 출현하며 51 대 49로 선이 악을 이겼다. 우리는 그 문명족의 후손이다. 야만족도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낯선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 제 손으로 죽이면 경찰에 잡혀가게 되니까 죽이자고 선동만 하는데 그게 차별의 언어다. 주로 소수자, 다문화, 노약자를 노린다. 그들은 무의식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51 대 49로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문명의 진보다. 악이 이기면 퇴보하고 균형이면 유지되며 선이 이기면 진보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새끼 때만 선하다. 늑대를 1년 이상 키우면 이빨을 드러내며 복종하지 않는다. 염소도 새끼 때는 귀여운데 크면 냉담해진다. 왜? 염소의 권력의지 때문이다. 대장염소가 암컷과 새끼를 통솔하려고 사람을 적대하도록 무리를 교육시킨다. 양들도 양치기를 뿔로 들이받아 죽이곤 한다. 양들이여. 인간 목자를 따르겠는가, 따꺼 양님을 따르겠는가? 계속 사람을 잘 따르는 개는 특이한 예다. 개는 강한 대장을 선호해서 사람을 따르지 은혜를 알기 때문에 사람을 따르는게 아니다. 그걸 몰라서 강형욱을 호출하게 된다. 왜 늑대는 사람을 따르지 않을까? 주인을 잊어먹은건 아니다. 헤어진 사자와 다시 만났을 때 사자가 사람을 반기는 동영상이 많다. 문제는 늑대의 사냥본능과 충돌하는 것이다. 맹수는 그냥 사냥하는게 아니라 화를 내면서 사냥한다. 배가 고프다. 사냥한다. 먹는다. 이건 인간의 생각이다. 맹수의 생각은 다르다. 내 구역에 이상한 놈이 들어왔다. 한심한 녀석이다. 저넘이 나를 무시하는가? 나를 본체만체 하네. 도망도 안 가네. 내가 만만한가? 내가 졸로 보이나? 내가 우습냐? 화가 난다.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죽인다. 죽었다. 먹는다. 이런 메커니즘이 있다. 맹수는 언제나 만만해 보이는 약자를 사냥하는 것이다. 덩치가 큰 넘은 왠지 존경심이 들어서 사냥하지 않는다. 작고 약하고 다쳤거나 늙어서 무리에서 낙오된 불쌍한 개체를 사냥한다. 그게 본능이다. 큰넘부터 사냥하는게 자신에게 이득이지만 큰넘을 사냥하면 안 된다. 대장을 죽이면 무리가 와해되어 모두 죽는다. 황소만 사냥하면 들소 무리가 깨져서 각개격파되어 다 죽는다. 소가 죽으면 포식자도 죽는다.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무리 중에서 가장 약하고 늙고 병든 개체를 사냥해야 한다. 다리를 저는 다친 소가 포착된다. 왠지 병신같다. 왠지 화가 난다. 공격한다. 죽인다. 먹는다. 이게 동물의 법칙이다. 그런데 인간들 중에서도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이 있다. 교실에서는 일진이라고 부른다. 약자를 보면 괜히 화가 나서 공격한다. 전땅크를 보면 왠지 존경심이 들고 노무현을 보면 왠지 죽이고 싶어지는 인간말종들이 있다. 빌어먹을 윤서인들 말이다. 이건 본능이기 때문에 약이 없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공포와 위엄으로 통치하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니깐. 특히 나쁜 놈들은 그렇다. 슬프지만 이게 적나라한 현실이다. 대통령이 위엄을 보여야 따른다. 정리하자. 선은 사회성이고 악은 반사회성이다. 선은 대집단을 이루고 악은 소집단을 이룬다. 선악이 50 대 50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생태계가 유지된다. 인류는 사피엔스의 역사 30만 년간 그렇게 반선반악으로 잘 살아왔다. 그런데 5만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 대집단이 출현하고 인구압력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오늘날의 인류가 되었다. 이들은 사람을 죽여서 인구를 조절하는 대신 신대륙으로 흩어졌다. 작은 카누를 타고 하와이도 가고 이스터섬도 갔다. 1만5천 년 전에 종교가 등장하면서 선이 악보다 강해졌다. 그 결과가 문명이다. 악이 세면 퇴보하고 선이 세면 진보하며 균형이면 유지된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춘 동물이지만 선을 강조해야 한다. 선은 공이고 악은 사다. 밥은 함께 먹고 똥은 각자 싸는 이치다. 밥은 각자 따로 먹고 똥은 모여서 함께 싸자? 미쳤다. 좋은 소식은 나누고 궂은 소식은 각자 해결하기다. 그것이 사회의 진보원리다. 손흥민이 골 넣으면 대서특필하고 못 넣으면 조용하다. 공정하게 손흥민이 골을 못 넣을 때도 대서특필 해야하는거 아냐? 미친 넘이다. 문재인이 잘못할 때만 대서특필 하는 기레기다. 진보는 상대방에게 말을 거는 장치다. 보수는 각자생존이다. 보수로 말 걸지 말라. '배드 모닝' 하고 인사하는 자는 쳐죽여라. 꽃을 들고 환영하지 똥을 들고 환영하랴?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문명이다. 그런데 안다만 제도의 부족민은 선과 악이 균형을 유지한다. 그곳에서는 문명이 없다. 악이 이기면 인류는 멸종한다. 선이 항상 이기는건 아니다. 선이라서 당연히 이기는게 아니고 이기는 선을 골라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는 선은 필요없다. 통제가능성의 원리 때문이다. 이겨야 상황이 통제되어 다음 단계로 간다. 문명은 위태로운 시스템이다. 문제는 성선설 성악설 바보논쟁이 철학의 제 분야에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다들 개소리를 한다. 무슨주의 무슨주의 타령이 그렇다. 주의라는 단어가 붙으면 일단 개소리로 보면 된다. 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적이다. 주의는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중심을 치켜세운 것인데 무려 과학자가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 주의하면 안 된다. 상대적 가치를 말하면 곤란하고 절대적인 방향성을 말해야 한다. 선악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가치고 계의 통제가능성이 절대적이다. 불쌍한 어린 개체를 잡아먹는게 좋을까, 아니면 덩치 큰 대장 수컷을 잡아먹는게 좋을까? 당신이 착한 늑대라면 덩치 큰 대장 수컷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 경우 양떼는 멸종한다. 착한 늑대가 양떼를 몰살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늑대는 흉악하다.
김정은이 북한의 대장이라서 살려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다. 적국을 공격해도 왕은 살려놓는다. 흉악한 일본도 고종황제는 살해하지 않았다. 마오쩌뚱은 푸이를 죽이지 않았다. 약해 보이는 개체만 골라서 공격하는 것이 원시의 본능이다. 인간들이 다 그렇다. 노무현만 물어뜯고 문재인만 공격한다. 그 점에서는 순자의 성악설이 맞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미개한 증거다. 그러므로 교육이 아니면 인류는 잘못된 길로 폭주하여 전멸을 면할 수 없다. 인류는 언제나 위태롭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