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있고 어둠은 없다. 빛은 광자가 있고 어둠은 암자가 없다. 눈을 감으면 시야가 어둡다. 그 어둠은 관측자인 인간의 사정이다. 누가 눈을 감으라고 했지? 그냥 눈을 뜨고 보면 된다. 존재가 있으면 변화한다. 존재와 그 존재의 변화까지 둘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가 존재한다. 둘로 착각하면 그것이 이원론이다. 존재가 관측자 혹은 비교대상과 나란히 움직이면 하나로 보이고 어긋나면 둘로 보인다. 관측의 오류이거나 비교대상의 오류다. 다른 말로는 상대성이다. 명사와 동사가 별도로 존재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동사는 명사에 종속된다. ‘바람’과 ‘불다’가 각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불지 않을 때도 내부에서는 불고 있다. 불은 타지 않을 때도 타고 있으며, 빛은 빛나지 않을 때도 빛나고 있다. 모든 불은 켜진 불이며 꺼진 불은 없다. 죽은 삶은 없다. 불은 이리저리 옮겨붙을 뿐이다. 불은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우주 안에는 그러한 연결밖에 없다. 구조는 어떻게 연결되느냐다. 문제는 관측자다. 관측자 위치가 바뀌면 다르게 보인다. 곧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자신의 변화를 관측대상의 변화로 착각한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내가 움직이면 바람이 얼굴에 부딪힌다. 자전거를 타보면 깨닫는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면 느끼지 못한다. 자전거타기를 한다면 바람과 햇볕을 등지고 코스를 잡으므로 가는 길은 언제나 쉽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빡세다. 세상은 일원의 메커니즘으로 존재하지만 관측자의 사정과 관측대상의 사실로 나누어져 2로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혹은 상호작용 대상이나 비교대상의 사정이 반영된 허상이다.
1) 존재의 움직임을 별도의 존재로 착각한다. 이원은 원리적으로 없다. 애초에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1은 으뜸이고 2는 버금이니 차다. 굳이 말하자면 2원론이 아닌 2차론이라고 해야 한다. 이원론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왔다. 기독교의 천사에 해당하는 스펜타 마이뉴와 사탄에 해당하는 앙그라 마이뉴가 있고 그 위에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자 아후라 마즈다가 있다. 스펜타 마이뉴는 아후라 마즈다에 밀려서 점차 잊혀지고 중세에 이르러서는 앙그라 마이뉴가 아후라 마즈다의 상대역으로 격상된다. 빌런이 점점 강해져서 주인공급으로 격상되고 사이드킥은 슬그머니 잊혀진 것이다. 천사는 사이드킥이고 빌런은 사탄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느라 3위 1체 같은 것이 도입되고 그러는 것이다. 정과 반이든, 선과 악이든, 음과 양이든, 진보와 보수든, 공급과 수요든 둘이 대칭되는 것은 모두 가짜다. 그것들은 주인공을 포장하기 위해 동원된 사이드킥과 빌런이다. 우리는 강자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강자는 선택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의 역량이 있는 것이다. 역량의 문제다. 역량이 없으니까 꼼수를 쓴다. 외부에 의지하면 진보가 되고 내부를 쥐어짜면 보수가 된다. 에너지가 있으면 선악이 없다. 작가의 작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남의 작품을 해 먹으니 로열티를 지불하면 선이 되고 짝퉁을 판매하면 악이 된다.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고 있으면 이미 망해 있다. 선악은 어린이에게 적용된다. 어른은 주식투자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기 책임이다. 실패해도 데이터를 얻고 성공해도 양도세를 낸다. 주식시장 안에서 상호작용으로 용해되는 것이다. 잃는 사람이 있어야 따는 사람이 있으니 선이다 악이다 추궁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이는 잘못되면 부모가 대신 깨진 유리창값을 물어줘야 하므로 선악이 있는 것이다. 퇴계는 선한 사람이다. 이미 망해 있다. 스티브 잡스는 선악을 초월한 존재다. 일론 머스크도 선악을 초월한다. 그러나 손정의나 마윈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선하거나 혹은 악하다. 이재용도 선하거나 혹은 악하다. 삼성에서 고액연봉을 받고 잘나가는 직원에게 이재용은 선하고 백혈병에 걸린 직원들에게 이재용은 악하다. 신은 선한가 악한가? 신은 선악을 초월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정의를 휘두르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진정한 사람에게는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다.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참도 없고 거짓도 없다. 복제본에게는 진퉁이냐 짝퉁이냐 하는 참과 거짓의 판별이 있는 것이다. 선악은 하부구조에 해당된다. 여야는 선악이 있다. 국민은 선악이 없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음양, 선악, 진위, 대소, 경중 따위 이분법으로 보고 있다면 진정한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빛은 입자이니 음양이 없다. 정상에서 보면 위아래가 없다. 기슭에 있는 자만 위아래 서열이 있는 것이다. 정상에는 모두 평등하다. 오직 사건이 있고 메커니즘이 있고 연결구조가 있다. 세상은 연결이며 연결의 중심은 선악이 없다. 코어에는 선악이 없다. 선악은 주변에 있다. 돌아가는 팽이의 중심점은 돌지 않는다. 어떤 구조이든 힉스 입자와 같은 비대칭적인 존재가 반드시 하나는 있어야 한다. 신하는 대칭되지만 왕은 코어이니 대칭되지 않는다. 의원들은 소속이 있지만 국회의장은 소속이 없고 표결도 없다. 다른 층위가 있다.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는 진정한 세계가 있다. 이매진의 가사를 떠올려 보자. Imagine there's no heaven 천국이 없다고 상상하라. It's easy if you try 해 보면 쉽다네. No hell below us 우리 아래에 지옥이 없고 Above us only sky 우리 위엔 하늘만 있어. 존 레넌이 뭔가를 느낀 것이다. 직관으로 알았다. 존 레넌은 강자였기 때문에 천하인의 시선으로 본 것이다. 모든 대칭되는 것은 에너지 결핍의 결과다. 가슴에 설렘을 품은 사람에게는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선진보 후보수로 디자인을 최적화하여 구조문제에 대응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외부에 라인을 개설해서 자원을 더 조달해와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에너지가 매우 부족하면 있는 라인을 잘라야 한다. 그것이 보수다. 돈이 궁하면 자식을 더 낳아서 노동력을 증가시켜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돈이 매우 부족하면 자식을 하나 죽여서 입을 덜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는 것이 돈이 조금 부족한 자와 매우 부족한 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진보는 젊으니 상대적으로 궁핍을 덜 느끼고 보수는 늙어서 궁핍을 더 느낀다. 둘 다 궁핍하다. 선악이든 정의든 평화든 평등이든 행복이든 마찬가지로 궁핍하다. 진정한 자는 구애됨이 없으니 무애의 경지에 이른다. 거기서 선악도 정의도 평화도 평등도 행복도 잊어버린다. 어린아이의 해맑은 미소처럼 구김살 없는 경지다. 진정한 자에게는 선악이 없다. 매너도 없고 에티켓도 없고 정치적 올바름도 없다. 지식을 빙자한 갈굼질이 없다. 선악은 주연을 못 딴 사이드킥과 빌런의 관심사다. 조연은 받쳐주므로 선악이 있다. 주인공이 되어 일원의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세상을 구하지도 않고 파괴하지도 않는다. 다만 피드백을 조절할 뿐이다. |
"진정한 자는 구애됨이 없으니 무애의 경지에 이른다. 거기서 선악도 정의도 평화도 평등도 행복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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