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이유 두려운 이유는 자신이 진정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두려운지, 호랑이의 공격이 두려운지, 호랑이에 물렸을 때의 고통이 두려운지, 아니면 그다음에 오는 죽음이 두려운지, 그 죽음 이후의 심판이 두려운지, 그 심판 이후의 내세가 두려운지 인간은 모른다. 아니 나는 아는데 뇌가 모른다. 인간의 지식은 막연한 것이고 뇌는 더 구체적인 데이터를 요구한다. 낱낱이 대응계획을 세워놓고 미리 충분한 시뮬레이션을 해두면 두렵지 않다. 호랑이가 덤빌 때는 어떻게 도망치고, 물렸을 때는 눈을 찌르고 하며 전부 계획을 세우면 두렵지 않다. 재난에 대비한다면서 화장실을 벙커로 만들고 통조림을 비축해둔 사람이 있다. 그것을 실제로 써먹을 가능성은 0이지만 두려움을 극복할 수는 있다. 자신의 뇌를 속이는 기술이다. 재난이 일어나면 벙커 속에 숨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서 정보를 획득하고 동료와 연합해야 한다. 두려움은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변의 도움을 구하게 하는 장치다. 노약자는 호랑이에게 맞서기보다 비명을 지르고 제자리에서 굳어버리는게 낫다. 두려움은 동료를 호출하는 장치다. 인간은 그저 의사결정을 못 해서 두려운 것이며 어떻게든 의사결정을 하면 두렵지 않다. 전쟁터에서 패닉에 빠지는 이유는 명령체계가 붕괴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지 개인의 목숨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대부분의 병사는 주변의 동료가 하는 대로 한다. 한 명이 도주하면 일제히 도주하는 것은 적군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동료에게 밟혀 죽을까봐서다. 인간의 본능은 무리 속에 있어야 안심이 되게 한다. 장교가 없거나 리더십이 부족할 때 군대가 붕괴한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군대가 붕괴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마음속에 그려두고 있으며 계획대로 된다면 두렵지 않다. 계획이 어긋나고 약속이 깨지므로 두렵다. 스토리를 명확하게 파악할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말기 암환자는 생각보다 잘 적응한다. 스토리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암진단 사실을 숨긴다면 현명하지 않다. 암진단을 받고 패닉에 빠지는 사람은 극소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버킷리스트를 수행하는게 현명하다. 두려운 이유는 세상이라는 사건과 나라는 사건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겉돌고 있다는 말이다. 당연하다. 세상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배역을 따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배역을 따는 것도 좋지 않다. 엑스트라가 되어 지나가는 행인 1에 머무르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나라는 이야기를 건설하는게 인간의 삶이라면 두 이야기가 잘 연결되도록 조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권력을 가져야 한다. 나의 돈, 나의 명성, 나의 지식, 나의 가족, 나의 지위, 나의 권리가 나의 배역이자 권력이다. 그러나 대개 주관적인 감상이다. 나의 돈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내가 쓰고 자녀가 쓴다. 나의 명성이라고 착각하지만 변희재와 진중권의 허명이다. 나의 가족이라고 하지만 말을 안 듣는게 남보다 못하다. 내 것이라고 착각했다가 어색하게 되기가 다반사다. 나의 스토리와 세상의 스토리가 서로 일치해야 한다. 진짜 권력은 거기에 있다. 나의 스토리가 자아실현이라면 세상의 스토리는 집단적 자아실현이다. 나는 박정희 죽은 날 만세를 불렀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가능성을 보고 사회로 복귀했다. 예견이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하려고. 세상이 가는 방향과 내가 가는 방향이 일치하는지 본다. 나는 한국이 세계를 리드하는 때가 온다고 예견을 했고 그것이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구조론이 세상을 바꾸는 날이 언젠가 온다. 지금은 세상이 구조론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개인적 자아실현은 주관적인 감상이고 집단적 자아실현이 삶의 진짜다. |
"나의 스토리와 세상의 스토리가 서로 일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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