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면 화살이 어디로 가는지 활은 알고 있다. 총알이 어디로 가는지 총은 알고 있다. 구조로 보면 답이 나온다. 구조의 대칭원리에 따라 하부구조가 어디로 가는지 상부구조는 알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려면 원인측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부분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자 한다면 전체를 보아야 한다. 끝이 어디로 가는지는 시작에서 결정된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 바다는 알고 있다. 비행기가 어디로 가는지 하늘은 알고 있다. 나무가 어디로 가지를 뻗는지 숲은 알고 있다. 개인이 어디로 가는지 공동체는 알고 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집단지능 시스템이다. 개인의 지혜를 모아 공통의 지성을 조직해 가는 것이 철학이다. 개인의 삶이 어디로 가는지는 전체의 진보하는 방향성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지구촌 60억 인류 전체의 지혜가 모여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철학의 궁극적인 귀결점이다. 철학이란 인생을 쏘아진 화살로 보고 그 화살을 쏘아보낸 활을 찾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화살이라면 공동체의 진보는 활이다. 개인은 태어나고 죽어가며 한 마디의 삶을 끝내지만, 인류라는 이름의 공동체는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만남 이후 줄곧 한 길을 달려왔다. 끝없는 만남을 조직하고 설계하며 쉼없이 달려왔다. 개울물이 흘러 어디로 가는지 바다는 알고 있다. 그 분명한 방향성에서 답은 얻어진다. 그렇다. 아담과 이브는 서로를 만나려 했다. 개울물이 만나 강의 지류를 이루고, 강의 지류와 지류가 만나 큰 본류을 이루고, 결국 바다에서 모두 만나듯이 인류 최초의 한 만남이 또다른 만남을 설계하기를 무수히 반복하여 마침내 인류 전체가 결집되는 위대한 만남의 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정상에서 모두 만나야 한다. 그것이 정답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종교가 전부 대답을 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으면 ‘너희는 모두 하느님 자식이다’ 하고 정답을 딱 찍어준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삶이란 예배당에 가서 눈 감고 앉아있는 거란다’ 하고 정답을 일러준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으면 ‘어디로 가긴! 전생에서 와서 현세를 거쳐 내세로 가는 거지’ 하고 정답을 말해준다. 여기에 주목해야할 구조가 있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교회는 모임이다. 흩어진 개인은 답을 낼 수 없지만, 전부 한 곳에 모아 놓으면 윤곽이 드러난다. 일정한 방향성이 드러난다. 개인은 제 마음 가는대로 가도 되지만,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 모든 진보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모든 가지는 태양을 향해 자란다. 만약 가지가 위아래로 뻗어가며 제멋대로 자란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 충돌한다. 얽히고 설키고 만다. 구조적 모순에 의해 나무는 죽고 만다. 암세포는 무질서한 성장으로 인하여 인체를 죽인다. 한 대의 자동차는 제 맘대로 가도 되지만, 열 대의 자동차는 줄을 맞추어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 구조원리에 의해 모든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의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답을 알 수 있다. 인생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므로 일정한 방향성이 있고 주어진 목표가 있고 답이 있다. 도서관 입구에 총류 코너가 있다. 각종 백과사전과 보도연감, 옛날 영인본 신문 따위가 진열되어 있더라. 지식의 총류가 있다. 바로 그것이 철학이다. 어떤 지식이든 반드시 목차가 있고 타이틀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식이 또다른 지식을 낳는 형태로 새끼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게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렇다. 개별적 지식을 전부 한 줄에 꿰어내는 것이다. 이런 저런 철학이 알려져 있지만 그것들은 이런 저런 컨셉이다. 어원으로 보면 concept은 ‘꿰다+잡다’는 뜻을 가진다. 날을 심에 꿰어 잡아서 고정시키는 것이다. 바퀴살을 바퀴축에 꿰고, 구슬을 실에 꿰듯이, 이런 저런 지식의 파편들을 하나의 중심되는 원리에 꿰어 전부 연결하여, 통짜 덩어리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철학이다. 누구나 보고 응용할 수 있도록 입체적인 모형을 꾸리는 것이다. 노자와 공자는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더 큰 원리로 보면 한 줄에 꿰어진다. 좌파와 우파는 다른 포지션을 가지고 경쟁하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공격수와 수비수처럼 제각기 역할이 있다. 정상에서는 모두 만나 하나가 된다. 인류 전체의 지혜를 모두 꿰어내려면 그 바퀴축은 매우 튼튼한 것이어야 한다. 아랍의 구슬, 아프리카의 구슬, 유럽의 구슬을 모두 꿰어내려면, 진보의 구슬과 보수의 구슬을 모두 꿰어내려면 그 실은 굵고 질긴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과거의 구슬, 현재의 구슬, 미래의 구슬까지 꿰려면 그 실은 성장형 구조를 가져야 한다. 중심에서 변방으로 계속 가지를 쳐나갈 수 있는 진화형 생장구조로 세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 모든 것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려면 그 그릇은 점점 커지는 그릇이어야 한다. 철학이란 인류의 지혜를 하나로 꿰어내는 실이며, 인류의 문명 전체를 한꺼번에 움직이는 바퀴축이며, 인류 모두의 사상을 쓸어담는 큰 그릇이다. 철학의 그릇은 나무처럼 계속 자라고 있다. 모든 자라는 것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다. 철학이란 인류 모두의 지혜를 하나로 합치기 위해, 진보와 보수의 지혜,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지혜를 모두 합치기 위해 컨셉을 부여하고 방향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것은 집단지능이다. 집단지능이 독립적 인격을 얻으면 그것이 곧 지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내 삶의 동기를 찾기 위해서다. 최초의 동기를 알아야 그 맞은편에서 최종적인 귀결점을 알 수 있다. 시작점과 종결점을 알면 그 대칭성에서 진행하는 방향성이 나온다.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라면 우왕좌왕하지 않고, 좌충우돌 하지 않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애초부터 합리적인 방향설정을 해야 한다. 뱃속에서부터 알고 가는 사람은 없다. 가다보면 저절로 길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가다가 도중에 길을 바꾸려면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이 생긴다. 가더라도 방향을 알고 가야 일관되게 갈 수 있다.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첫째 본능, 둘째 욕망, 셋째 사회관계, 넷째 미의식, 다섯째 깨달음이다. 첫 번째 본능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이 주로 생리현상으로 나타난다. 식욕은 식사 후에 끝나고 성욕은 섹스 후에 끝난다. 그것은 말단의 것이라 큰 의미가 없다. 두 번째 욕망은 권력욕, 명예욕 따위다. 이는 개인의 본능을 사회에 투사한 것으로 크게 보면 역시 본능과 닿아있다. 침팬지의 무리에서도 권력욕, 명예욕은 발견된다. 두목 침팬지가 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이 원숭이 무리의 습성이다. 세 번째 사회관계는 윤리, 도덕 따위다. 이는 본능과 욕망에 합리성을 부여한 것이다. 길게 본 본능이며 크게 본 욕망이다. 작은 범위에서 보자면 배고플 때는 먹는게 이익이지만 큰 범위로 보면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이익이고, 다이어트를 고려하는 것이 이익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이익이다. 네 번째 미의식은 한번 시작한 일을 완성하려는 욕구다. 이는 합리성을 그 일의 내용에 투사하여 완전성을 끌어낸 것이다. 내 기준으로 내게 이익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그 자체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음악이면 음악 안에 완전성의 결이 있고 그림이면 그림 안에 완전성의 결이 있다. 도공이 최고의 도자기를 빚기 위하여 결함있는 작품을 깨뜨리듯이 작품 자체의 욕구를 존중하는 것이다. 나무는 자라고자 하고, 꽃은 피고자 하고, 열매는 전파되고자 하고, 소문은 퍼지고자 하고, 물은 흐르고자 하고, 사람은 사랑하고자 한다. 모두가 자기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 결을 따라가는 것이 완전성이다. 다섯째 깨달음은 합리성 그 자체다. 어떤 대상의 합리성이 아니라 순수한 합리성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합리성은 어떤 성장하고 발달하는 것, 피가 돌고 맥이 뛰는 것, 생명있는 것에서 잘 관측된다. 가만이 머물러 있다면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가 없다. 그러나 몸을 움직여서 길을 간다면 곧은 길과 굽은 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곧은 길로 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성장하고 진보하고 발달하는 것, 생명의 속성을 가진 것이 합리성을 추구한다. 이렇듯 욕망의 근원을 추구할수록 모든 것이 합리성 하나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합리성은 간단히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손해가 되는 일이 허다하다. 길게 보면 그러하고 크게 보면 그러하다. 나무가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는 것은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이기적 행동이지만, 그 결과 나무의 가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전개할 때 개인의 이익은 전체의 이익으로 수렴된다. 물론 단기적으로, 국소적으로는 얼마든지 마찰과 모순이 일어난다. 결국 본능이니, 사회성이니, 합리성이니, 완전성이니, 생명성이니 하고 구분해 놓은 것은 짧은 사이클이냐 긴 사이클이냐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섹스라고 응답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오늘 하루만 본다면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맞다.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고, 삶은 계속되기에 철학이 필요하다. ● 생존 - 본능 ● 욕망 - 본능+사회성 ● 사회관계-본능+사회성+합리성 ● 미의식 - 본능+사회성+합리성+완전성 ● 깨달음 - 본능+사회성+합리성+완전성+생명성 길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오늘만 생각하고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부분만 눈에 들어오고 전체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본능과 욕망과 사회관계와 미의식과 깨달음 중에서 본능만을, 혹은 본능과 욕망만을 추구한다. 단기적으로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도리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그것을 막는 것은 지성이다. 지성은 모든 사람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때도 그것이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시스템을 조직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자가 있지만 그러한 의도가 원천봉쇄되도록 시스템을 정비할 때 개인의 이익은 전체의 이익이 된다. 범죄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이익을 해치지만 그러한 의도를 봉쇄해놓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체의 이익을 해치는 행동이 자기에게는 감옥행이라는 손해로 나타나게 사회의 시스템을 조직하는 것이다. 부자가 제멋대로 과소비를 하여 사회의 단합을 해친다면 중과세로 이를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잘못을 뒤에서 비난하고 징벌할 것이 아니라 선제대응으로 애초에 잘못된 기동이 실패하도록 사회를 조직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교육과 문화로도 가능하고 법률과 제도로도 가능하다. 자연의 생태계에는 이미 그러한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사슴이 지나치게 번식하여 숲을 망가뜨리면 모두 죽는다. 먹이사슬의 꼭짓점에 있는 사자가 새끼를 열 마리씩 낳아 무한번식을 한다면 모든 사슴을 잡아먹고 결국 먹이가 없어져서 자신도 죽는다. 사슴이 사라지고 사자도 사라지면 그 사슴이 조절하는 식물생태계도 다양성을 잃게 된다. 워터벅, 스프링벅, 임펠러영양 등 작은 사슴 종류가 앞서가며 봄에 난 새순을 먹고, 그 뒤에 오는 큰뿔 영양과 누떼, 물소떼가 키가 큰 풀을 먹고, 한편으로 코끼리떼가 초원과 초원사이를 가로막는 덤불숲에 길을 열어 생태계의 다양성을 조직함으로써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자연에는 이기적인 폭주가 없으며, 누군가 폭주하면 반드시 그것을 막는 암행어사가 뜨도록 시스템이 정비되어 있다. 에이즈나 사스 같은 신종질병이 나타나도 결국 자연히 제어되게 밸런스가 조정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내가 이루고, 얻고, 기뻐하는 모든 것들은 나보다 타인들에게 더 유익하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 개척과 혁신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대개 그 혁신과 창조의 당사자가 아니다. 남편의 수고는 아내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아내의 수고는 남편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부모의 수고는 자식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우리 세대의 수고는 다음 세대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 한 개인 차원에서는 근원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 사는지, 왜 오늘 하루를 사서 고생하는지 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나는 나 아닌 남을 위하여, 타자를 위하여 헌신하는가? 아니다. 더 큰 나가 있었던 거다. 공동체는 남이 아니라, 타자가 아니라 더 큰 나다. 본래의 나다. 모든 인간이 본래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하면 사회가 발전한다. 자기와 타자를 가르는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이다. 그것을 내 몸뚱이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나의 이익은 대개 나 아닌 것에서 오기 때문이다. 나의 수고는 아내와 자식의 이익으로 돌아가듯이 나의 이익 역시 부모와 이웃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부모를 버리고, 이웃을 버리고, 공동체를 버리고, 국가를 버리면 나만 손해다. 그래서 인간은 손해를 덜보기 위해 친구를 사귀고 교회에도 나가는 것이다. 나의 바운더리를 되도록 크게 잡아야 한다. 필자 역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고안한 언어와 문자로 이 글을 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해 놓고도 별로 써먹지 못했다. 저작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나의 범위를 내 가족, 내 이웃, 내 나라, 인류모두, 역사전체로 확대해야 바른 답은 얻어진다. 범죄자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 왜? 모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이익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감방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살인을 하면 단기적으로 이익을 얻을지 몰라도 결국 살인자가 된다. 자신에게 손해다. 이를 지식인이 말해줘야 하는데 대개 말해주지 않았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라. 단 단기적으로 말고 장기적으로, 상대방의 대응을 보아가면서, 인류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항해하는 지구호의 배 바깥으로 질주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지식인의 충고를 들어가면서, 작은 나가 아니라 더 큰 나에게 이득이 되도록 행동하라. 이것이 철학의 가르침이다. 왜인가? 그래야만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순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지가 하나의 태양을 향해 뻗어야 구조적 모순에 따른 충돌을 막을 수 있다. 어떤 가지는 태양을 향하고 어떤 가지는 땅을 향한다면 암세포처럼 엉켜서 곤란해진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인류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좇아 제각기 자유롭게 나아가도 전부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도록, 하나의 바퀴축에 가지런히 놓이는 바퀴살처럼 질서가 잡히도록, 마침내 한 줄에 전부 꿰어지도록 사회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진보주의다. 그것은 집단지능에 의해 가능하고 집단인격에 의해 가능하다. 그것이 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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