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사람을 찾다
나무통 속에서 개처럼 살았던 현자 디오게네스. 알렉산더가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시니컬한 표정으로 ‘햇볕이나 쬐게 비켜달라’고 했다던 사람. 어느날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외쳤다고 한다. ‘진정 사람은 없는가?’ 내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이 시대에 진정 사람은 없는가?
“나는 진정한 삶을 원했다.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삶이 아닌 것은 모두 엎어버리기를, 수풀과 잡초를 쳐내고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압축시켜 인생의 비천함과 숭고함을 드러내어 참다운 보고를 할 수 있기를 바랬다.”(소로의 월든에서)
디오게네스는 거리의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을 찾으려 했고, 소로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참다운 삶을 찾으려 했다. 디오게네스가 뭇사람들 가운데서 찾으려 했던 사람은 시시한 일에 울고 웃는 우리네 보통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참된 사람, 바로 소로같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니다. 전혀! 디오게네스는 소로 같은 사람이라면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을 거다.
소로가 평범한 일상의 반복되는 삶 가운데서 찾으려 했던 참다운 삶은 인생의 모든 엑기스가 농축된 진정한 삶, 뜨겁고 치열하게 사는 멋진 삶, 하얀 재 한톨 남김없이 화끈하게 태우고 가는 후회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아니다. 전혀! 그런 멋진 삶은 흔하다. 세상에는 멋진 모험가도 많고, 잘 나가는 배우도 많고, 위대한 혁명가도 많다. 그들 역시 후회없는 삶, 치열한 삶을 선택했다. 소로가 그 호숫가에서 찾으려 했던 삶은 다른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찾으려 한 사람은 알렉산더와 같은 영웅도 아니고, 탈레스와 같은 현자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불평꾼도 아니고, 재주있는 사람도 아니고, 멋쟁이도 아니고, 웃긴 사람도 아니고, 잘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고, 사람의 원형 그 자체여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된다. 그래야 나무통 안에서 세상을 향해 외쳐볼만한 의의가 있다.
권력있는 사람, 명성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은 많다. 세상에 미인도 많고, 멋쟁이도 많고, 착한 사람도 많고, 소박한 사람도 많다. 디오게네스는 소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석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니컬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디오게네스다. 그라면 예수 앞에서도 시니컬한 표정으로 지나쳤을 것이다. 석가 앞에서도 백안시 했을 것이다. 그래야 이야기가 된다.
소로도 마찬가지다. 인상을 쓰고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어 보이며 환경을 염려하고 지구온난화를 고민하는 그런 진지한 삶, 손에 흙 묻히며 고생하는 삶, 윤구병 선생과 같은 생태적인 삶, 권정생 선생과 같은 소박한 삶, 그런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 디오게네스가 찾으려 했던 것은 사람의 원형이어야 하고, 소로가 찾으려 했던 것은 삶의 원형이어야 한다. 천상병 시인이 찾으려 했던 것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기라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
인생의 세 질문은 ‘너는 어디서 왔는가?, 너는 누구인가?, 너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디오게네스의 모색은 첫째 ‘너는 어디서 왔는가?’이며 소로의 탐구는 둘째 ‘너는 누구인가?’이며 천상병의 답변은 셋째 ‘너는 어디로가는가?’이다.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사람의 근원을 찾는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 잘난 사람, 훌륭한 사람, 멋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복제된 것이며 찾아야 할 진짜는 원형이다. 원본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수만년 역사 위에 장대하게 펼쳐져 가는 사람 그 자체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소로가 진정한 삶을 찾는다는 것은 삶의 실존적 의미를 탐구한다는 거다. 삶의 소통과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원형을 찾고 소로가 실존을 찾으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존엄에서 와서, 자유로 출발하여, 사랑을 만나, 성취를 하고, 행복을 얻는다. 디오게네스는 존엄을 물었고, 소로는 사랑을 물었으며, 천상병은 행복을 말한다. 이렇게 나열하는 것도 거추장스럽다. 첫 번째 질문 안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의 질문에 소로와 천상병이 각각 응답한 것이다.
대낮에 사람을 찾는다. 사람 찾아서 뭐하려고? 터놓고 대화하려는 거다. 소통하려는 거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기투합하려는 거다. 의기투합하여 무엇하는가? 도원결의라도 하려는 건가? 그렇다. 바로 그거다. 디오게네스가 찾으려 했던 것은 어떤 룰이다. 천년 만년 이어갈 사람의 룰 말이다. 길과 같다. 처음 간 사람이 발자국을 남기면 두 번째 간 사람이 그 자취를 따른다. 발자국에 발자국이 보태어져 이윽고 길이 만들어진다. 룰이 만들어진다. 법이 만들어진다.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조직이 만들어진다. 발달하고 성장하고 번영한다. 소로가 찾으려 한 것은 인간이 지구에 오기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근원의 약속, 근원의 룰, 근원의 결의, 근원의 법도, 인류문명의 나아가는 방향성이다. 인류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그 답이 있다.
그것은 근원의 만남에 의해 결정된다. 아담이 혼자 숲속을 배회할 때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또 누구인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통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번 이브를 만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사람의 역사는 이전에 수만년이고 앞으로도 수십만년 혹은 수백만년 계속된다. 디오게네스가 찾으려 했던 사람은 그 수백만년 수천만년을 총괄할 통짜 덩어리로서의 사람 그 자체이지 아테네 어느 길 모퉁이에 서 있는 멋쟁이 신사, 위대한 영웅, 진지한 예술가, 진정한 괴짜, 참된 모험가, 소로와 천상병들이 아니었다. 디오게네스가 소로와 천상병을 만났다 해도 막걸리 두어되를 나눠마시고 서너시간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에는 각자 나무통으로, 월든으로, 귀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건 아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명성을 쫓아 달려간다. 그 배를 타고 삶의 강을 건너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물에 곤두박히고 빈 배만 강을 건너가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돈의 배, 권력의 배, 명성의 배만 남고 사람은 없다. 진짜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디오게네스가 사람을 찾으려 할 밖에. 어떤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똑똑한 사람, 지혜있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 사랑스런 사람, 의를 나눌만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람을 찾으려는 거다. 어떤 사람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찾으려 했던 삶은 멋진 삶, 모험으로 가득찬 삶, 열정적인 삶, 빛나는 삶이 아니다. 삶의 원형이다. 가장 순수하고 소박하고 근원적인 삶의 모습 말이다. 미래의 환경재앙을 예견해서 생태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삶의 근원적인 모습은 소통이며, 그것은 인간 사이의 대화가 아니다. 한 인간이 삶의 한 극적인 장면에서 우주의 무게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느냐다. 눈앞에서 일만명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일만명을 살리면 인류는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가고 만다. 당신이 판단을 내려 그 죽어가는 일만명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후로 수천만년 계속될 인류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인가이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부시가 이라크인 10만명을 죽여서 이라크의 미래 1000년을 보장할 것인가, 아니면 이라크의 민주화된 미래를 포기하고 10만명의 이라크인을 살릴 것인가이다. 소로가 월든에서 찾으려 했던 진짜는 이런 거다.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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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만한 가치가 있소?
하나의 판례를 만드는 것이오.
10만명의 죽음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10만명의 삶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판례 말이오.
미국은 인디언 100만의 죽음으로 국가를 건설했고 이를 판례삼아 숱한 인명을 희생시키며 역사를 써왔소.
이제 그러한 판례와 반대되는 사례를 만들어야 하오.
우리가 그러한 판례를 계속 만들다보면 전쟁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오.
적의 말살, 나와 다른 이의 절멸로 역사를 쓰는 게 아니라 공존이라는 가치로 역사를 쓰는 것이오.
한국도 사람없고
이라크도 사람 없으니
미래천년을 보장할 일 없고
십만명 살릴일도 없겠네요.
그럼 뭐할거냐고요?
궁하면 구조론방에 열심히
들락거려야죠.
부시나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나 ?
있다면
백범 김구 주석처럼
공공의 적이라 판단되는 확신
무고한 공동체(우리나라)를 해하는
왜놈과 그 앞잡이들은 처단하는 것이 옳다고 봄
김대중 대통령처럼 용서(?)하기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시장에 그 권리를 내놓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할 일은 하신 것이고
그 안이란 두가지 다 미국이라는 거대 힘 앞에서 벌어진 일이고
만약 백범 선생님이나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도
다른 시간속에 사셨다면
세 분 모두
백범선생님처럼 입에 피를 묻히셨을지도
김대중 대통령처럼 한미동맹을 인정하셨을지도
노무현 대통령처럼 파병도 하셨을지도
아니면 어쨌든 비슷하게 사셨을 것 같다
백범 김규식 여운형 조봉암 조소앙 김원봉 신채호 등등 ...
아니면 예수나 부처같이 사셨을까 ?
아~ 머리 아파...
오랜만에 동렬님의 좋은 글에 댓글 달려니 로그인까지하고 머리 아프다
어쨌든 난 죽음으로 몰고가는 버스운전사를 일단 죽여야 한다고 봄
다음에 일어날 일은 그 누구도 결정 못하는 것이고
다음 일어날 일이 미리 보인다면 모르지만
genration kill
어떻게 첨단무기들이 적국의 민간인을 죽이고, 아군의 무력함을 보고하는지...보여주는.
제 3세계의 비민주화와, 기름, 종교가 엉킨 중동.
그리고, 미군파병.
놔주면 이라크 독재. 안놔주면 석유 조공급,
이라크를 지나지 않으면, 아프간을 통한 중국 봉쇄로의 교두보를 놓침.
신을 믿고, 역사를 믿고, 사람을 믿고, 1만명을 살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