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교 혹은 존 프럼교 '인간의 지적능력'편과 이어집니다. 돌도끼로 나무를 자르는 오지의 부족민이 있다. 크지 않은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데 대 여섯 명의 장정이 달려들어 하루종일 작업을 한다. 백인 탐험가들이 그들을 가엽게 여겨 쇠로 된 도끼를 건네주었다. 탐험가들은 5분 만에 나무를 자르는 시범을 보여주었고 부족민에게 도끼를 주어 직접 자르게 하였다. 방법을 배운 부족민 역시 금방 나무를 잘랐다. 탐험가들은 만족하여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보니 그 부족민들은 여전히 돌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쇠도끼는 버려져 있었다.
왜 그들은 쇠도끼를 버렸을까? 금속의 단단한 성질 때문에 나무가 잘려진다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쇠도끼에 마법이 걸려 있다고 믿는다. 아마 쇠도끼를 휘두르다가 손을 다친 부족민이 있었을테고, 그 이유는 보나마나 쇠도끼 속에 갇혀 있는 정령이 화가 났기 때문일테고, 백인들은 정령의 화를 풀어줄 마법의 주문도 알려주지 않고 떠나버렸고, 그렇다면 부족민들만 골탕을 먹은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을 것이다. 부족민을 어수룩하게 보고 골칫거리 쇠도끼를 떠넘겨 재앙을 면하려고 백인들이 수작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원주민을 가르쳐 문명화 시키려는 백인의 노력은 대개 실패한다. 결국 마법을 모르는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수 밖에 없다. 어린이들에게 도끼 사용법을 가르치면 대개 성공한다. 이와 유사한 예는 매우 많다. 이누이트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초기 선교사들은 이누이트 여성들을 임신시켜 그 아기들에게 포교하는 선교방법을 쓰곤 했다. 이 방법은 성공했다. 이누이트 사회는 결혼제도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이 방법으로 수 백명의 자기 친자식을 기독교도로 개종시켜 성공적으로 개척교회를 운영하고 있다며 자랑스레 자서전을 낸 목사도 있다. 물론 100년 전 이야기다.
호주에서는 에버리진 어린이를 그 부모로부터 빼앗아 강제로 교회에 수용하거나 백인가정에 양자로 들이곤 했다. 2008년 호주 수상 케빈 러드는 이른바 ‘빼앗긴 세대’라 불리는 원주민들에게 과거의 죄악에 대해 사죄했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낮에 어린이를 가축처럼 몰아서 트럭에 쓸어담아 교회로 실어날랐다. 어머니들이 울부짖고 있는 가운데! 그 어린이들은 다시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동화정책의 잔혹함을 비난하기 앞서 백인들의 다른 모든 정책이 실패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선교사를 파견하는 방법, 통조림과 알콜로 유혹하는 방법, 부족민을 경찰 등 하급관리로 고용하는 방법 등 애버리진을 문명화 하기 위한 모든 소통의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마침내 어린이 납치라는 최악의 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그만치 인류의 지성은 무력하다.
인간의 판단력은 매우 낮은 것이며, 우리가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판단한다고 믿는 일들도 대개는 반복작업에 의해 학습된 것이며, 판단은 환경과의 대칭구조 안에서 포지셔닝을 읽는 것이어서 바깥뇌가 중요하다. 진정한 지식은 머리 속에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머리 사이에 있다. 인류는 지적 오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40보 밖에서 오줌냄새를 맡고 그 동물의 종을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는 인디언도 있다. 그러한 차별성이야말로 인류 지혜의 원천이다. 바깥뇌는 그러한 다름의 구조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확일화 되면 죽는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에는 화물교(Cargo Cult)라는 것이 있다. 파생종교로 비행장교와 부두교가 있는데 각각 비행장과 부두를 건설해놓고 재림 예수가 화물을 비행기나 상선에 가득 싣고 오기를 기다린다. 비행장을 건설한지 수십년이 되도록 화물은 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백인이 그 점을 들어 질문을 던지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겨우 20년 기다렸을 뿐인데 뭘. 당신들은 무려 2000년이나 기다렸다면서?”
화물교 중에서 비누아투섬의 ‘존 프럼’교가 유명하다. 먼저 온 선교사는 원주민들에게 모든 전통을 버리고 백인의 가르침에 복종하라고 요구했지만 흑인 하급장교 존 프럼은 부족민의 전통을 지키라고 가르쳤다. 선교사에 의해 금지된 부족 전통의 춤 축제는 부활되었다. 원주민들은 존 프럼이야말로 먼저 온 선교사가 떠들던 재림 예수라고 믿게 되었다. 같은 피부색일 뿐 아니라 장교의 권위로 백인 병사를 부렸기 때문에 부족민들이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TV에도 여러번 나왔는데 아프리카의 여러 오지 마을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매일 아침 성조기로 국기게양식을 하고 활주로와 관제탑을 점검하며 짚으로 모형비행기를 만들어 놓고 구세주가 화물을 가득 싣고 오기를 기다리는 식이다. 주로 2차대전 때 있었던 미군의 비행장 건설과 관련이 있다. 문제는 화물교가 한 둘이 아니고 수 십여가지나 되며 거의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거다. 대개 선교사가 손짓발짓으로 가르친 기독교 신앙을 자의적으로 변형하여 숭배하는데 그 대강은 백인들이 쓰는 모든 물건들은 하느님이 내려주는 것이고 언젠가 화물을 가득 실은 배나 비행기가 내려와서 모두들 통조림과 집과 옷과 자동차를 챙기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왜 이런 신앙이 생겼을까? 그 핵심은 화물이 공장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데 있다. 어떻게 인간이 이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뭔가 비밀이 있다. 어떤 부족의 예언자는 화물의 비밀을 알고 있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을 7만5천불을 주고 사려 했지만 미국이 대통령을 팔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답답해진 백인들이 지도자를 미국으로 데려와 공장을 견학시켜 주었지만 몇 년 후 조사해보니 화물교의 교세는 더욱 늘어나 있었다. 그 지도자가 섬으로 돌아갈 때 통조림 등을 들려보낸 것이 실수였다. 어쨌든 비행기는 떴고 닦아놓은 비행장은 그렇게 한번 써먹었고 그러므로 예언의 일부는 실혔된 셈이니 그들은 더욱 화물 예수의 재림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 바깥뇌인가? 정보는 팩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따라가고 테마를 따라가고 스토리를 따라간다. 이야기의 완전성을 따라간다. 예컨대 이런 거다. 정주영급 부자가 어느날 강변을 산책하다가 거지 한 사람이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부자는 곧 강으로 뛰어들어 거지를 건져주었다. 거지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자랑하려 한다. 그러나 부조리가 있다. 뭔가 어색하다. 거지는 이 사건을 동료에게 자랑하지만 동료는 알아듣지 못하고 ‘뭐라구? 네가 물에 빠진 부자를 구해주었다구?’ 하고 반문하다. 왜냐하면 거지가 부자를 구했다고 해야 말이 되지 부자가 거지를 구한다는건 도무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거지는 처음 당황하지만 그래도 꺼낸 말은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을 위조하고 만다. ‘맞아. 부자가 나를 구해줄 리가 없잖아. 내가 부자를 구해준게 맞을거야.’ 이게 말하자면 인지부조화다. 특히 대중들은 의사결정의 편의를 따라간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게 아니라 합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옳지만 합의하기 어렵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것은 배척된다. 그르지만 일단 합의가 쉽고 액션으로 들어가기 쉬운 것은 선택된다. 이 경우 보수가 더 민첩하게 대응한다. 진보가 주장하는 것들은 대개 옳지만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합의를 도출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하면 군중이 흩어져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겁쟁이 리더들은 무조건 대오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그것은 침략이다. 침략을 결정하면 대오가 유지되지만 후퇴를 결정하면 대오가 흩어져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마치 중국사에 많았던 황건적의 난이나 농민반란군 우두머리처럼 군중심리에 편승하는 결정을 내린다. 잔다르크도 이 방법으로 초반에는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이 전술은 공격에만 먹히고 수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고 만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 카렌 블릭센의 자전적 소설에 묘사된 키쿠유족의 늙은 족장 키난 주이는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키난 주이 역시 지능이 낮고 배움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겠지만, 적어도 10만명의 부족을 위엄을 가지고 무리없이 통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방법은 끝없는 인내심이다. MBC 특집 ‘아마존의 눈물’에서 조에족 사냥꾼 모닌이 잡은 짐승으로 요리하여 몇 안 되는 씨족원에게 배분하는데 무려 두 시간 이상을 허비하고 있음에서 보듯이 부족민들의 의사결정 난맥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데가 있다. 총기 오발사고로 누가 다쳤는데 피의자는 몇 마리의 소와 양으로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하여야 하는가 뭐 이런 거다. 대중들이 토론하며 설왕설래로 다투다가 거의 의견이 정리될 즈음 갑자기 누군가의 뜬금질문으로 산통을 깨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마침내 탈진하여 그로기 상태에 몰리는 것이며, 이는 인터넷 동호회원들 간에 충분히 토론하여 거의 정리가 되는 분위기인데 자다가 접속한 어떤 인간이 그동안의 토론과정을 무시하고 분위기파악을 못한채 ‘원칙은 그게 아니잖어.’ 하고 딴지를 걸어서 의장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주기를 끝없이 반복하다가 모두 지쳐버리는 것과 같다. 아프리카 부족민들은 대개 한가한 사람들이라서 시간끌기 대결로는 다들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다들 배가 고파지고 흐름이 끊길때마다 나타나서 분위기를 살려주는 ‘아이고 내자식 누가 다치게 했나. 동네방네 사람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한풀이 한마당도 쇼도 그치면 다들 의장이 독단으로 정리해주길 바라는 것이며, 슬슬 족장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며, 그때까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부동자세로 돌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워 미동도 않던 추장이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분위기 파악을 한 다음 느릿느릿 일어나 엄숙한 표정으로 결정을 내리면 모두가 승복을 한다. 왜? 24시간 연속토론, 48시간 마라톤 토론에 모두가 완전히 지쳤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또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다시 아프리카 방식의 밑도끝도 없는 48시간 연속토론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키난 주이 족장의 통치방식은 흥분한 대중의 광기를 따라가는 히틀러 방식, 오합지졸인 농민군 지도자 방식과 대비가 된다. 노련한 데가 있다. 그러나 의사결정이 느리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