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제 이야기는
석가때는 위빠사나로 다 깨달았고
당나라때는 간화선으로 다 깨달았는데
지금은 둘 다 안 먹힌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약발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그 사이에 깨달음의 정의도 달라졌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석가 때는 소승이라서
개인의 번뇌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개인의 번뇌를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번뇌라는 것 자체가 없어졌어요.
현대인들 다들 배 두드려 가며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저 혹시 번뇌 해결에 관심있습니까?’
이거 안먹힙니다.
당나라때 와서 달라진 것은
실존적 고민이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석가 때는 내가 가만 있는데 생노병사의 고라는 놈이
함부로 침투해 와서 나를 마구 두들겨 패기 때문에
그 생노병사의 고라는 놈의 시야로부터 잘 숨기만 해도 번뇌해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옛날 옛적 그야말로 호랭이 담배먹던 시절 이야기고
간화선의 화두는 '왜 사느냐?' '나는 무엇인가?'하는 실존적 고민이 되며
이건 석가의 고(苦)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실존적 고민은 소통으로 하여 해결이 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소통의 수단은 미학입니다.
간화선의 깨달음은 미학적 성(聖)의 깨달음이며
이는 석가시대와 비교할 때 문제의 레벨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의 지금은
생노병사의 고가 문제로 되는 시대가 아니고
실존적고민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생노병사의 문제는 그냥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면 되고
실존적 고민을 해결하려면 인터넷 동호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21세기에 와서 지금의 문제는
문제를 해결하는 답을 못찾겠다는 문제가 아니고
문제가 없어졌다는게 문제지요.
이제는 창조할 수 있어야 하고
내 안의 자궁에서 낳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문명화된 이시대로 말하면 소통이나 실존적 고민 역시 소극적 태도입니다.
지금은 각자 툴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창조에 나설 때입니다.
말하자면 자동차의 설계도(금강경), 자동차의 제작(위빠사나),
그리고 자동차의 운전(간화선)을 넘어서
그 자동차를 운행하여 갈 목적지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거지요.
이 시대에 간화선이 답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신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ㅋㅋ...창조를 못해서 답답한 모양입니다.
어디에다 목적지를 정할 것인가? 네비에 주소를 무엇으로 입력해야 하나...?
그것을 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가 봅니다. 주소 정한다고 바로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여담입니다만은...
간화선이 더이상 뭔가 안되고 정체한다는 것은
변모를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이 시대에서 낳을 것이 없기 때문인가 봅니다.
간화선이 물건너서 여행을 가본다면 몰라도...
한국의 불교는 그래서 다시 초기경을 받아 들이지만..그것은 결국 이제 출판,학술,선생이 늘어난다는 얘기이거나
간화선을 응용한다하여도 휴식처 제공의 큰 범위를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님들도 점점 각자의 생활방식을 존중받고 싶어하기도 하구요.
이러한 현상은 비판한다고 비난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런 진행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유기체가 살아남는 것은 그 시대에 맞게 변모를 했고 그 시대의 물음에 응답을 했기 때문이고 보면,
지금 불교는 시대의 물음에 응답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구요.
그러나 대부분 제가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요.
전기자동차가 나와도 석유로 이어온 동력의 근간을 바로 어찌할 수 없기에 유예기간을 가지려하는 것처럼...그러나 변화는 이미 거세게 불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어느순간 나타난 것이 아닐지라도 어느순간 확 바뀌게 되어버리는 것도...
모든 종교에 흥망성쇠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드니 안타까운 것이지만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쨌든 유예기간을 어떻게 연장하여 변화에 적응해 가는가가 중요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