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글은 다음카페 수원대 교협홈페이지에 올려두었었는데 기록보존을 위해 구조론 사이트에 다시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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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16년 3월1일 (3.1절 97주년입니다)
지금쯤은 세상에 밝혀 두어야 할 것 같군요..
예전에 써둔 글(2010년경)을 게재합니다.
2002년경에 하필이면 조선일보가 보도했네요.
자신의 건물과 가깝다고 그랬는지..
서울광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차량만으로 가득한 시청앞에 보행자광장을 만들자는 얘기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993년 즈음이었다. 필자는 그 이전부터 시청앞에 조그만 광장이라도 만드는 일을 줄기차게 제안해왔다. 1983년, 필자가 속한 강병기연구실에서 만든 서울주요가로변 도시설계보고서에 시청앞교통광장의 일부를 보행자광장으로 만들자는 안이 최초로 제안되었다. 하지만 군사정부와 노태우정부아래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교통광장을 통째로 보행광장으로 탈바꿈시키는 기술적인 개선방안이 나오면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겸직하면서 도시계획업무에 깊이 관여했던 필자는 故 강병기교수와 함께 이 광장의 초안작성을 주도하였다. 이때 제안한 내용을,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임명된 이원종시장과 뒤이은 최병렬시장이 관심을 갖고 김영삼대통령에게 보고도 하는 등 상당한 공론화의 과정을 거쳤다. 당시 국가상징가로 조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터라 실현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원래 광장이라는 이름을 달긴 했지만 당시의 교통광장 주변은 보행환경이 나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장을 걸어서 횡단해본 이라면 몇 번이고 지하도를 오르내려야 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도심한복판이 왜 자동차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사람에게 되돌려주자는 취지로 보행공간을 창출하려는 수년간의 의지의 산물이었다.
조사만 수십차례. 구상안을 위해 필자는 주변 옥상건물에 올라가지 않은 곳이 없다. 건물경비와 다투기도 여러 차례. 일일이 차량수를 세어가며 구상안을 도출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당시 교통처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거쳐 구상안을 완성한 후 세상에 처음 내놓았을 때는 대다수 교통학자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관계공무원들의 동의를 얻어서 대통령 보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조순시장이 이를 백지화하면서 표류하게 되었다. 전시행정이라는 이유다. 도심의 보행광장이 갖는 시민문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조시장이었고, 광장안은 4년간이나 창고속에 박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건시장이 들어서면서 보행광장안이 부활하게 되었다.
필자는 먼지가 낀 과거 계획안을 다시 가다듬어 당시 최재범 건설본부장을 통하여 고시장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는 여기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IMF 직후라는 시대상황 아래 시청건물 일부철거를 바탕으로 하는 방안에 대해 부담을 느낀 그는 좌고우면하다가 세월을 보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원구단에 이르는 길을 공원부지로 만들고 시청내 부지를 개방하여 휴식처로 조성하는 등 장차 시청앞 보행광장이 본격 조성될 때를 대비하여 연계된 공간의 정비에 힘을 기울인 공로는 있다.
그러다가 이명박시장이 들어서기 직전 2002년 6월 그 유명한 월드컵 열기가 시청앞 교통광장을 가득 메우면서 보행광장의 필요성이 한마디로 웅변되었다. 이 시장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오랫동안 논의되어왔던 보행광장안이 실행에 옮겨졌다. 광장내부의 구성에 대해서는 현상공모에 부쳐졌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당선작과는 다른 잔디광장안이 채택되었다.
약 4,800평 면적의 보행광장의 당시가치는 줄잡아 5천억원. 이후 교통신호체계가 원계획안에서 약간 변형되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2003년부터 현재의 보행광장이 된 것이다. 이후 또 한차례의 월드컵과 2008년의 촛불집회로 명성을 떨친 이 광장은 한동안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가 오늘 시의회에서 광장개방조례를 통과시키면서 역사적인 날을 맞게 된다.
돌이켜보면 서울광장은 원래부터 민중봉기의 역사적 공간이었다. 100여년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관에 잠시 피신했던 고종황제께서 덕수궁으로 귀환한 1897년, 왕조의 위엄과 국사쇄신의 차원에서 서울의 ‘도시개조사업’이 추진되면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핵심으로 하는 방사선도로와 환상도로 및 그 외접도로가 개설되었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형도로가 펼쳐지면서 대안문 앞에 시민이 접할 수 있는 광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울러 광장건너 동쪽의 남별궁터에 제국의 상징이자 천제를 지내는 곳인 원구단도 세워졌다.
그 시절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강압기에, 서울광장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대안문(현재 대한문) 앞에서 민중들이 황제를 보호하고자 하는 항거시위를 벌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죽음에 대한 독살설이 무성한 가운데 국장이 치루어지면서 광장은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후 이곳은 8.15해방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이 자발적으로 모인 장소가 되었고, 4.19를 거쳐 1987년 6월혁명을 이끈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번 조례통과로 서울광장이 다시 시민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마침 경술국치 100년이다. 그동안 보행광장으로 만드는데 진력해왔던 필자로서는 잔잔하고도 뜨거운 기쁨이 인다. 그리고 이 광장을 만드는데 실질적 주역인 이명박시장과 필자가, 이제부터 이 광장에서 시민들이 다룰 4대강 문제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 있어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운명같은 걸 느낀다.
2010년 이원영 (수원대 교수, 국토미래연구소장, 운하반대교수모임 집행위원)
광장조성된 후(1897년) 작성된 경성시가지 지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