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맥반초(馬麥半初)
* 馬麥(마맥)
말이 먹는 보리. 부처님이 어느 여름에 아기달(阿耆達) 바라문 왕의 청을 받고
그 나라에서 안거하였는데, 마침 그해 흉년이 들어 5백 비구와 함께 석 달 동안을, 여느 때 같으면 말이나 먹을 보리를 먹었다. 부처님
10난(難)의 하나.
* 마맥은 고려 성종에게 건의한 최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2번째 항에 나오는 문구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최승로가 광종에게 맺힌게 많은거 같다...ㅋㅋ
또한 불교에 대해 폐단을 누누히 지적하고 있다.
고려 성종때는 유학을 받아들여 정책에 활용하던 시기임을 감안해보면 능히 건의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불교를 왕에게서 그리고 왕궁에서 떼어내야만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고려 시대의 불교가 왕실과 결탁하여 정치에 심히 관여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로인해 관료사회로의 체계가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정치나 나라를 운용하려면 관료의 체계가 잡혀야 일단은 왕권이 강화되기 때문이기도 하나, 또한 신하의 권한이 강화되기도 한다.
이건 책임지고 일을 해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관료의 책임과 권한이 약하고 관료가 아닌 이들의 권한이 강해진다면 그 누구도 책임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서와 귀족과 노비의 차별을 강화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지금을 사는 사람으로서 조금 화가 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때에 이런 어떤 차별적 의식이 계속 강화되어 흘러온거 같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당연히 노비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풍토일수도 있으나, 유교를 받아 들이면서 신분제를 강화하는 것은 조금 모순이기도 하는 거 같다. 장단점이 있을 수 있으나, 유교가 관료체계를 확대하고 안정화 시켰다면, 또한 신분제를 강화하여 사회를 양분한 것도 사실인거 같다.
그러나 고려 사회는 완전한 유교적 사회라고 볼 수는 없다.
고려의 풍토와 불교적 문화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기 때문일듯 하다.
마맥에서 살펴보자면, 왕이 멧돌을 직접 돌려 차를 갈고, 보리를 간다는 것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 즉, 현대용어(정신분석)로 얘기하자면 자기 케어를 하는 것과 같다. 직접 뭔가를 한다는 것은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게 된다. 의식을 모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그 맑은 생각을 통해서 정사를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행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의 어두운 부분, 즉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차를 갈거나 보리를 갈거나 혹은 어떠한 노동으로 그런 부분들을 케어 했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드러난 부분이 크면 클수록 그 반대의 그림자도 커지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는 것도 일종의 이런 효과를 보는 것과 같다. 해서, 왕들이 직접 자기 손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정사를 보는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형식적이 되어 버리면 그저 보여주기식 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진정으로 자신의 의식을 모으고 마음을 담아 내었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일 것이다.
광종때부터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사단도 많고 정적을 제거하는 형태에서 오는 그 반대 급부가 커서 그림자도 깊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자신을 케어하기 위해서 정사를 제대로 시행하고자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로서 시행한거 같은데, 최승로의 비판과는 상관없이 그 행위 그 자체로는 필요한 것이었다고 여긴다. 그 시대에서 광종의 족적과 행위를 비판할 수 있으나, 이는 통치를 불교라는 페러다임에서 유교라는 페러다임으로 갈아 타려니, 왕실 자체가 걸림돌이기도 하였던 탓도 크다. 그 중심에 고려 전반기에 광종이 있었던 것이고, 그 후에 경종으로 이어져 왕실의 체면 하락이 있었으나 성종과 천추태후가 남매간이라는 것을 감안 했을 때,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 28조는 곧 왕실 개혁을 요구한 것과 같다고 보인다. 이는 성종이 유교 교육을 받았으므로 가능한 건의이기도 했다. 그리고 신하들을 존중하라는 것에서 보자면 신권정치의 신호탄이기도 하였다고 보인다. 이때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조선건국으로 이어진 정도전의 신권정치와 맥이 닿는다고 여겨진다.
바다와 해상무역을 포기하지 않았던 고려가 지향했던 황제국 큰 고려와 어느정도 자유로운 신분체계가 점차로 해상무역보다 육로 무역을 중시하고 영토의 확정안에서의 고려와 조선이라는 방향으로의 이전은 한반도라는 틀 안에서의 영토적 사유로 이어졌다고 보이는데, 하여, 외적 확장성보다는 내면으로의 깊숙히 파고 들어가 우주와 자연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여긴다. 문화 역시 그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불교국 이었을 때는 오히려 외적 확장과 화려함과 정교함과 섬세함이 가능했다면, 유교국으로의 이전은 외적 축소와 내적 깊이에 오히려 더 심취하게 되었고 심플함과 과감한 생략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마도, 유교국으로 전환될 때는 그당시 선불교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고 유교와의 결합이 있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불교는 계속 진화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다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고려의 화려한 불교는 쇠퇴했으나 선불교는 어떤 형태로든지 그 맥을 이어 왔다. 이미 선불교가 일차적으로 유교와의 결합이 한단계 이뤄졌고, 조선에서 다시 그 문화가 유교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서로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흘러 왔다고 여긴다.
<시무 28조중 2항>
1. 사사로이 듣건대, 성상께서 공덕재(功德齋)를 베풀기 위하여 혹은 친히 다(茶)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혹은 친히 보리를 갈기도 한다 하니, 신은 성상의 수고로움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光宗)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그) 죄업(罪業)을 제거하려고,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불사(佛事)를 많이 베풀어, 혹은 비노자나(毗盧遮那) 참회(懺悔) 법회를 열기도 하고, 혹은 구정(毬庭)에서 중[僧]들을 재공(齋供)하기도 하고, 혹은 귀법사(歸法寺)에서 무차 수륙회(無遮水陸會)를 열어 부처에게 재(齋) 올리는 날을 당할 때가 되면 반드시 걸식(乞食)하는 중에게 밥을 먹이기도 하고, 혹은 내도량(內道場)의 떡과 과일을 걸인(乞人)에게 내어 주기도 하며, 혹은 신지(新池)?혈구(穴口)와 마리산(摩利山) 등처(等處)의 어량(魚梁)을 방생소(放生所)로 삼아, 한 해 동안에 네 번이나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지역 사원(寺院)에 나가서 불경(佛經)을 강연하고, 또 살생(殺生)을 금하여 어주(御廚)의 고기 반찬을 저자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으며, 대소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모두 참회(懺悔)케 하고 미두(米豆)?시탄(柴炭)?마료(馬料)를 운반하여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 등 (그 폐단을)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참소를 믿어 사람 보기를 초개(草芥)처럼 여겨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와 같이 쌓인 데다가, 항상 백성의 고혈(膏血)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데 이바지하였으니, 부처가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供養)에 응하겠습니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자식이) 아비를 배반하고 (종이) 주인을 배반한 자들은 모양을 바꾸어 중이 되었고, 심지어 떠돌며 구걸하는 무리들이 와서 여러 중과 더불어 서로 섞여서 재(齎)에 참석하였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상께서는 군왕의 체통을 바로 잡아 유익함이 없는 일을 하지 마소서.
*반초
*수류화개라는 말은 소동파의 제자인 북송의 시인 황정견의 '황산곡'에 등장한다.
*그리고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다시 이기도 하다.
靜座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
이 문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니...
나는 나대로의 해석을 해본다.
" 고요하게 앉아서 한 모금의 차를 마시니 차의 첫 향이 감돈다.... ---> 몰입의 시간
첫 향으로 오묘한 시간의 문을 여니 그곳에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난다.... ---> 환희의 시간 "
.....------> = 적념의 시간(절대적인 자기만의 시간 --> 한 공간에 있으나 또 하나의 공간이 겹쳐지는 순간, 이것은 찰나의 시간에 시공이 겹쳐지는 것, 즉, 차로서 명상의 시간을 가졌던 것. 이원의 세계가 본래 한 공간에 있다라는 것.)
.....> 이렇듯 혼자 마시면 명상의 자리가 되는 찻자리..여럿이 마시면 그 자체로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찻자리...
차를 마시다 보면 묘한 시간의 문이 열릴 때가 있다. 그때를 한 번 마주치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그 맛을 보았는데, 어찌 되돌아 서겠는가... 쭉 갈 수 밖에 없는 차생활.... 그리 맑고도 명료하고 향기롭게 몰입의 시간을 가진 다는 것.... 그것이 찻자리.(새해에는 이런 찻자리를 지향해야 할텐데...마음은 늘 그런데...ㅎㅎㅎ ㅋㅋ^^;)
정말 어려운 얘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