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성이 필요한가? 오해는 사절한다. 베라씨가 뭘 잘못했다는건 아니다. 그 정도는 자연스럽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실수의 자유도 포함) 그것도 팔아먹자고 쓴 책일텐데 그 정도를 문제삼는다면 촌스러운거다. 필자가 방점을 찍어서 강조하는 것은 저쪽동네 ‘무뇌좌파’와 우리동네 ‘선골(仙骨)’ 사이에 강이 있다는 거다. 본질에서의 차이가 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건 인정해야 대화의 질이 높아진다. 그쪽은 최대개입을 추구하고, 우리는 최소개입을 추구한다. 그쪽은 법가의 전통을 계승하는 흐름에 있고, 이쪽은 선가(仙家)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쪽은 쪼잔하고 이쪽은 대범하다. 그쪽은 인위를 주장하고 이쪽은 무위를 주장한다. 그쪽은 제도로 근본을 삼고 이쪽은 미학으로 근본을 삼는다. 그쪽은 계몽을 수단으로 삼고 이쪽은 문화를 방편으로 삼는다. 그쪽은 통제를 앞세우고 이쪽은 소통을 앞세운다. 그쪽은 평균을 끌어올리고 이쪽은 뛰어난 1인에 맞춘다. 그쪽은 선형적, 이항대립적, 흑백논리적 대칭적 사고의 교착에 빠져 있고, 이쪽은 비선형적, 비대칭적, 입체적 사고로 바깥으로의 출구를 획득한다. 근본적으로 가는 길이 다르다. 그 차이를 말하려는 거다. 본질에서 지성과 비지성의 차이다. 지성은 인류의 지적 네트워크다. 인류전체를 단위로 하는 개념이므로 국가간 차이를 넘어선다. 문제삼지 않을건 문제삼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인 니들은 왜 개고기 먹냐.’ ‘일본인 니들은 왜 고래고기 먹냐?’ ‘아랍인 니들은 왜 돼지고기 안먹냐?’ 이런거 따지면 피곤해진다.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안 되는 거다. 그런 개입은 지성이 아닌 거다. 베라씨의 글은 독일인 중에서도 전형적인 독일인의 글이며, 아주 독일냄새가 팍팍나는 글이며, 독일은 유럽 중에서도 공적개입 잘하기로 그 특징이 유난한 고장이다. 뭐냐하면 '이탈리아-≫말 안듣는 애는 팬다.' '프랑스-≫말 안듣는 애는 잔소리로 꾸짖는다.' '독일-≫말 안듣는 애는 붙잡아 앉혀놓고 알아들을때 까지 끈질기게 설득한다.' 이건 유럽에서 만들어진 유머다. 독일은 철학자의 나라다. 유명한 철학자의 책을 한권씩만 꼽아도 책장을 가득 메운다. 그 영향으로 국민이 모두 철학에 달통했는데 그게 전통이 되어 앉혀놓고 끈질기게 설득하는 문화를 만든 거다. 합리주의를 앞세워서 합리적으로 설득하면 당연히 납득해야 한다고 여긴다. 근데 그게 웃기는 짜장이다. 깨달음이 없는 철학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억지 합리를 표방할 뿐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을 설득해서 어느 하나의 기준에 맞추려 하면 안 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을 희생시키는 거다. 그렇게 살도록 놔둬야 한다.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예(禮)다. 일상적으로도 독일인은 인생을 집짓기에 바친듯이 건축에 열심이고, 피서지에 가도 텐트를 성벽처럼 둘러쳐서 외부인의 동선과 시선을 차단하고(그러려면 바닷가에 왜 왔나? 사진 풍경이 딴판.) 도로에서 자동차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무지하게 화를 내고 이런거 유명하다.(내차 앞의 빈 공간도 안방처럼 내 영역이라고.) 타인의 영역에 사적으로는 침범불가, 동시에 공적으로는 지나치게 침범한다. 사소한 것도 메뉴얼이 갖추어져 있고, 시청 같은데서 교육받아야 하며 시시콜콜 검사받아야 한다. 이사라도 가려면 온갖 절차를 챙겨야 하고 등등. 한국도 쓰레기는 분리수거 하고 일회용 나무 젓가락은 못쓰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에서 그런 것도 참견하냐’고 하지만 독일에서는 그게 유난히 심하다. 따지는게 많아서 그 나라에서 살려면 배워야 할게 많다. 독일은 통제교육을 지향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메뉴얼로 해결을 보는데 메뉴얼을 잘못 가지고 와서(일본것을 가져온듯, 아마 일본과 한국의 문화차이를 구분못하는 사람이 메뉴얼을 만든듯) 투덜거리는 거다. 중요한 것은 독일의 이런 특성이 선가의 전통을 앞세우는 한국과 아주 상반되고 일본과는 좀 맞는다는 거다. 사적영역에 함부로 참견하는 한국인의 고질병에 대해선 필자도 무수히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외국인이 비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명을 먼저 만든 사람이 기준을 정하면, 뒤에 가는 사람은 군말없이 따라야 할 때가 많다. 무조건 한국 잘못이다 하고 독일 기준에 맞추어야 하는 상황 많다. 그래서 한국사람이 ‘줄 잘서고 규칙 잘 지킨다’는 독일규칙 열심히 배워서 독일 갔더니, 정작 독일사람은 도로에서 경찰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무단횡단을 일삼는다. 멀거니 서 있는 경찰에게 따졌더니 ‘성인이 자기책임으로 하는 행동에 국가가 왜 개입하나?’ 하고 반문한다. 그 한국인 어리둥절. 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한국은 공사구분이 불투명한 나라다. 그 사이에 금만 잘 그으면 문제해결?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하나의 문제가 새로 불거진다. 공과 사 사이에 금긋기는 독일에서나 통하는 방법일 뿐이다. 개인이 각자 완성되어 있으면 메뉴얼은 필요없다. 정리하자. ● 최대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최소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전자는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에서 유래하고 중국에서도 북방 유목민의 특징이다.(엄격한 규칙은 흉노선우 묵특) 후자는 농경지역 전통에 기반한 것이고, 중국에서도 양자강 남쪽 산악지역 사람들 생각이다. 초원은 넓어서 순식간에 모일 수 있고 또 순식간에 흩어질 수도 있다. 유목민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10만명 단위의 대집단이 형성된다. 그들은 집단주의에 익숙해 있다. 이게 히틀러의 나치로 발전한 거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면 넓은 초원에 흩어져서 철저한 개인주의로 변한다. 사적 영역의 보호는 몽골이 훨씬 더 심하다. 몽골에서는 남의 게르를 방문할 때는 몇십미터 앞에서 말에서 내리며 하는 동작이 정해져 있고, 20미터 앞까지 접근해서 해야하는 딴청이 정해져 있다. 게르 20미터 앞에서 일단 동작그만 자세로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 날씨가 말먹이기에 적당하군’ 이런 말로 딴청피우기를 몇 초간 해야 한다. 그동안 천막 안에서는 상대가 무기를 감추었는지 확인한다. 최대 7.0까지 된다는 몽골인의 뛰어난 시력으로 문틈을 보고 있다가 이방인이 영역 안으로 함부로 들어오면 봐로 쏴버린다. 접근을 허락받고 들어올 때도 문지방을 밟으면 큰 망치로 두개골을 뽀사버리며(동방견문록) 문 안으로 들어와서도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방향 틀리면 죽음이다. 초원에서는 순식간에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몰살시키고 순식간에 양떼를 훔쳐가버려도 대책이 없다. 농경지역은 다르다. 순식간에 접근할 수도 없고, 재산이 토지라서 땅을 떠매고 갈 수 없으니 훔쳐가지도 못한다. 농경민들은 가족 위주의 소집단을 이룬다. 대집단은 형성되지 않는다. 히틀러식 대규모 집단주의는 없다.(한국인은 자갈이라 뭉치지 않는다.) 반면에 개인주의도 약하다. 남의 집을 함부로 기웃거려도 화내지 않는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중국하고도 남쪽 산악지역에서 나왔다. ‘내 몸에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에 이득이 되어도 터럭을 뽑지 않겠다’는 사상이다. 산악에 고립되어 살기 때문에 타인과 협력할 이유가 없다. 초원에서는 전쟁나면 다 죽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 협력하다보니 나치가 된다. 반면 중국 양자강 남쪽 산악지역에서는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므로 전쟁이 났는지도 모른다. 유럽식 개인주의는 사적 영역을 강조하면서 그만큼 공적간섭을 일삼는 이중적인 개인주의다. 깨달음의 토대 위에서 최소개입을 주장하고, 무위에 맡기고, 미학으로 소통하는 진정한 개인주의가 아니다. 유목민 전통의 독일인이 농경민 전통의 한국인을 이해못하는건 당연하다. 공자는 예에 달통했는데 ‘곡례 3천’이라 하여 3천가지 예법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 많은 규칙을 어떻게 다 외웠느냐고 물었더니 공자왈 ‘외우지 않았다 단지 서(恕) 하나로 꿰뚫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서(恕)는 타인에 대한 배려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베라씨가 한국식에 적응못하는 것은 메뉴얼로 해결하려는 버릇 때문이다. 규칙을 외우려 하면 안된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1초만에 적응한다. 그게 지성과 비지성의 차이다. 서(恕) 하나로 해결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보같이 수첩에 뭔가를 계속 적고 있는 거다. 최대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최소개입을 추구할 것인가? 21세기 인류문명의 방향성에 걸맞는 모드는 어떤 것인가?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에 걸맞는 개념은 사적참견의 한국식도 아니고 공적통제의 독일식도 아니다. 창의적인 집단이 성공한다. 법가의 유목민이 창의적일까 유가의 농경민이 창의적일까 선가의 산악민이 창의적일까? 구글본사라면 어떨까? 다양한 인종, 다양한 관습,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독일식도 한국식도 아니다. 인터넷 유목민이라는 말이 있지만 인터넷이 반드시 노마드의 것은 아니다. 인터넷 오타쿠들은 오히려 산악민에 가깝다. 유목민이든 농경민이든 산악민이든 구애됨이 없어야 참된 지성인이다. ∑ |
나도 큰 망치로 명바기 두개골을 뽀사버리고 싶다
" 해결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보같이 수첩에 뭔가를 계속 적고 있는 거다 " - 비지성 몰지성 박그네 -
ㅋ 나로호 실패라네요
명바기 조땟따
과연 좋아할 일인가
김영삼시절에 세계화라고 문 열었지만, 막상 베낭메고 나가보면,
된통.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분간 못해해서
설명해야하던 난감함.
세계화하려면, 외국인과 결혼해야한다고 주장하던 젊은시절 반항아 이제는 주책덩이인 장정일의
글에 갸우뚱.
결혼한다고 해도, 문화는 그대로. 김치에 와인 혹은 삼겹살에 치즈.
우리도 그들도 낭패 (일반론이 그렇다는것).
내가 김대중대통령을 존경하는건, 서양과 동양의 민주주의가 틀리다는 이광요의 언설에
'예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동양이 더 민주주의를 잘할수 있다'고 받아친
우리안의 가치를 세계로 내걸었기 때문.
내 안의 가치가 보편과 공변되지 않는다면 대략 무의미.허무.
일본의 오타쿠들이 선가의 전통을 따른다지만, 그들을 닮고 싶은 욕망이 안생김.
게다가 그들 자신도, 스스로가 무엇을 하면서 인터넷으로 쇼핑하는지 모르고,
누군가 그들처럼 된다고 하면, 당당치 못하고 은밀히 방법을 알려주는. 그 음습함이 싫을뿐.
지금에 와서 현대사회의 삶의 전형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오타쿠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는 자. 삶의 밸런스를 유지하면서도, 넘치지 않아, 어떠한 외부의 파격에도
자유롭게 토론하고 피드백할수 있는 인간형.
현대 삼성같은 대기업 군사형 인간이 아니라, 골수 운동권같은 투사형 인간이 아니라,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멍때리는 인간형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온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그 생산된바가 양식으로 정착되고,
타인에게도 전파되는 각성된 개인. 그렇게 깨어나 빛을 발하는 개인.
일을 대하는 기본 자세.
중요한 일에도 최소로 개입하기.
쓸데없는 일에 관심갖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고 이상도 없군요.
아니, 깨달음과 이상도 없으니 쓸데없는 일에 더 매달리네.
이제서야 님의 틀을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저의 공감은 수사적 공감에 불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물 흐르듯 하루가 흘러갔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서로를 인정하고 예를 갖추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물 흐르듯 행복합니다. 질투에 불타는 여섯살 꼬마를 보며 에고 에고 했다가 한번 더 쳐다보고 또 한번 웃습니다.
속시원한 글 읽으며 한번 더 웃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