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주진모에 A급 시나리오가 안들어온 이유’ 라는 제목의 기사가 네이버 대문에 걸렸더라. 이게 왜 기사거리가 되는지는 기사를 읽어봐도 모르겠지만.. 주진모 이 양반 작년에는 하도 안풀려서 점쟁이한테까지 찾아갔었다고 한다.

주진모가 못뜬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 둘째 나이가 어려보여서 그렇다. 서른네살이면 어린 나이는 아니다. 그러니 이제 뜰 때가 되었다. 그래서 ‘미녀는 괴로워’로 뜬 것이다.

본인은 알고 있을까? 어려 보여서 뜨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어린 척 하고 있다는 사실을. 왕자 이미지 털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2프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끼왕자’라는 별명이 있었다는데 ‘왕자’는 어린 거다. 이게 칭찬이 아니다. 주진모 뿐 아니라 어려보이는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의 미남배우들 대략 성적이 안좋다. 마마보이 이미지 생기면 끝이다.

‘박진태’라는 좋은 이름 두고 왜 주진모라는 얄궂은 이름 쓰는지도 의문이다. 주진모는 아명(兒名) 같다. 박중훈 봐라. 이름부터 중후해 보이잖는가. 안성기는 성숙해 보이고 장동건은 건장해 보이는데.. 진모라니.. 쪼만한 느낌.


하여간 안성기는 고래사냥의 왕초시절부터 노안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변함없는 그 얼굴이다. 지난 20년 동안 조금도 늙지 않았다.  

확실히 최민식은 노안으로 떴다. 송강호도 중후한 편, 한석규도 노숙한 이미지 때문에 뜬 거다. 한석규의 얼굴에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본 베테랑의 표정, 한 분야의 경지에 오른 고수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있다.

그런데 한석규가 최근에 맛이 간 이유는.. 안성기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맛이 간 거다.

‘서울의 달’ 시절만 해도 얼빵한 시골촌넘 최민식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노회한 도시의 능구렁이 표정이 있었는데..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로 퇴행하더니 얼빵하고 순진해져서 연기가 죽어버렸다.

그는 드디어 원하던 바보가 된 것이다. 서울의 달은 역전되었다. 최민식은 한석규의 자리를 차지했고 한석규는 최민식의 자리로 밀려났다. 어리석긴.. 하여간 인간이 맛이 가는건 한 순간이다.

한석규 본인은 아마 지금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왜 바보가 되었는지. 안성기는 아마 지금도 모를 것이다. 그래사냥의 왕초시절 그 너털웃음 잃어버리고 교장선생님의 근엄한 표정을 얻은 것이 뒷방늙은이로 밀려나게 된 원인이라는 사실을.

최민식 이 양반도 스크린쿼터 반대운동 하면서 생뚱맞게도.. 근엄한 가부장 얼굴 하고 다니는가 본데 그러다가 밀려난다. 언제부터 네가 관객을 가르치고 다녔더냐? 유림질, 훈장질로 가면 바로 망가진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주진모의 캐릭터 -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타락한, 그러나 한 가닥 밑바닥의 순수는 남아있는, 그래서 순진남 병태(혹은 춘섭 또는 강한나)를 돕는, 그래서 언제라도 변신할 수 있는 -

이건 10여년 전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의 캐릭터였고 20여년 전 고래사냥에서 안성기의 캐릭터였다. 배우가 떠서 ‘국민배우’ 소리나 듣고 남 시선 의식하고 범생이 흉내내면 망한다. 안성기처럼 밀리고 한석규처럼 처진다.


국민배우 몰락의 법칙

각설하고.. 미남스타에게 동안은 불리하다. 노안이 차라리 낫다. 주름살이 있어야 한다. 그 주름살 속에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본 베테랑의 표정, 고수의 표정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 안성기, 한석규 - 중후해 보이는 얼굴로 떴는데 지금은 되려 동안으로 퇴보하고 있다. 이 양반들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으니.

● 최민식, 송강호 - 모건 프리먼이나 잭 니콜슨을 연상시키는 노안 혹은 중년스타. 헐리우드 유명배우 치고 얼굴에 주름살 없는 배우는 없다.  

● 주진모, 정우성 - 동안 이미지 극복 못하면 못 뜬다. 장동건은 ‘인정사정 볼것없다’ 시절만 해도 동안이었는데 ‘친구’부터 동안을 극복하고 있다.  

● 백윤식 - 이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하면 동안이라서.. 지금 딱 보기좋은 중년으로 보인다. 느끼한 맛이 남아있지만 하여간 회춘했다.

미남 배우의 경쟁력은 얼굴의 주름살에 있다. 노안스타 최불암이 휘젓던 시절부터 그랬다. 왜 동안은 뜨지 못할까? 찌질해 보여서 그렇다. 마마보이처럼 의존적이고 퇴행적인 느낌을 준다.

약간 노안이 되어야 왕초 이미지, 형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여배우도 마찬가지. 김혜수가 왕언니 이미지를 얻은 것이 타짜에서의 성공비결이다.

비천무의 김희선처럼 앉아서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으면 망가진다.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처럼 스스로 살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독해져야 한다.

어쨌든 ‘무사’에서 주진모와 정우성은 ‘왕자’와 ‘꼬마’로 나와서 찌질이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극의 무게감이 안성기와 람불화(위롱광) 쪽으로 이동해 버렸다. 주인공 제쳐놓고 조연이 떠버린 것이다.  

무사에서는 둘 다 찌질했지만 주진모가 정우성보다 더 찌질해 보였기 때문에 주진모가 더 손해를 봤다. 그는 무사 이후 수년간 본의아니게 활동을 쉬어야 했다.

관객이 원하는건 무엇인가? 멋진 것이다. 무엇이 멋진 것인가? 친구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다. 백윤식이 그 역할을 잘한다. 괴물에서 변희봉도 그랬고. 왕년의 고래사냥에서 안성기의 왕초 역할.

찌질하면 죽는다. 찌질한 것은? 남의 탓 하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한다고 조건을 걸고 흥정을 시도하는 것.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 수단을 쓰고 이용하려는 것. 상대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어쨌든 주진모씨 그 얼굴에 여전히 남아있는 찌질함 확 털어내 버렸으면 좋겠다. 이마에 주름살 두어개 얻어야 가능하다.

장동건도 '친구'에서 노력하니 이마에 주름살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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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이야기지만.. 한국영화의 근본문제는 소재부족이다. 시나리오가 없다. 소재가 없는 이유는 스타일의 실패 때문이다. 스타일이 실패하는 이유는 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게 다 수준이 낮아서 그런 것이다.

이 문제가 극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찌질한 주인공이 강력한 악당을 만나 조낸 두들겨 맞고 빌빌거리다가.. 왕초 혹은 도사를 찾아가 뭔가 비급을 전수받고.. 무인도에서 한 3년 고생하다가 돌아와서 악당을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무척 찌질하게 묘사된다.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첫째 선과 악의 대결을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바꿀 것, 둘째 사회일반의 통념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미학적 기준을 제시할 것.

여기서 미학적 기준이란? 예컨대 장인이 사회에서 알아주든 혹은 안 알아주든.. 내가 만드는 도자기는 백프로 완벽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멀쩡한 도자기를 깨부숴 버리는 것이다. 그 고집을 그대로 밀고나가기다.

● 자기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을 밀어붙이는 사람 - 노무현


원칙과 상식이 되든, 뭐가 되든.. 자기 자신이 정한 기준을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남들이 뭐라하든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그리고 극한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자세로 극한 까지 밀어붙이는 것.. 그것이 진정성이다.

극한이 100이라면 지금 노무현은 70정도 밖에 안왔다. 그러므로 국민여러분은 기대하시라. 노무현이 어떻게 100까지 밀어붙이는지를. 어차피 100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면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노무현에게는 퇴로가 없다.

내가 기준을 정하고 내 마음에 들면 그만이다. 사회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물고 물리는 싸움판 바깥에서 독립적인 내 영역을 만들고 그 영역 안에서 내가 정한 나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다.

근래 히트한 영화에는 확실히 그런 요소가 있다. 예컨대 왕의 남자에서 감우성과 이준기가 ‘다시 태어나도 나는 광대가 좋아’ 하고 외치는 것이다. 남들이야 뭐라하든 나는 광대가 좋고 곧 죽어도 광대를 하겠다는데.

임금보다 광대가 더 낫다는데 어쩌겠는가. ‘이게 나의 기준이다’ 하고 기세좋게 들이댈 수 있어야 한다. ‘넌 그게 낫냐? 난 곧 죽어도 이게 낫다!’ 하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있으면 예술이고 없으면 뭣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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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의 실패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라디오스타는 확실히 잘 만든 영화다. 많은 사람이 인정했다. 나도 그 점은 인정한다. 모든 평론가가 박수를 쳤다. 그런데 왜 관객들은 이 영화를 외면했지?

관객들에게로 마이크를 돌려보자.


“라디오 스타 좋지요. 시간나면 볼겁니다. 근데 저는 일단 다른 영화를 먼저 봐야하기 때문에. 타짜도 보고 우행시도 보고 가문의 부활도 보고.”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왜 밀렸을까? 2프로 부족했다. 폭발력이 없었다. 영화는 예쁘게 잘 만들었는데 ‘쾅’ 하고 가슴 속에서 터지는 뭔가가 없다. 그게 미학이다. 영화 잘 만들어도 미학 없으면 죽는다.

라디오스타에서 찌질이 박중훈은 끝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세상에 찌질이들이 많지만 최곤만한 찌질이가 없다. 그래도 왕초 안성기는 불평한마디 없이 묵묵히 대처한다.

이 구도는 고래사냥의 듬직한 왕초형과 찌질이 병태를 연상시킨다. 수백번, 수천번이나 우려먹은 구도 아닌가. 그걸 재탕삼탕하는데 거기에 무슨 얼어죽을 미학이 있겠는가?

결론.. 라디오스타에는 미학이 없다. 독립적인 미학적 기준의 제시가 없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고 세상과 맞서는게 없다.

라디오스타의 결론은.. 과감히 사회의 규범을 깨부수고 독자적인 미학적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찌질이 박중훈이 왕초형 안성기의 훈계에 감화를 받아 다시 착한 어린이로 돌아가서 범생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쪼다같은 결론에 대해서 한마디 해준다면

“나가죽어라.”

영화 ‘싸움의 기술’도 한계가 있다. 한국문학의 고질병인 지리멸렬주의, 신변잡기주의,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 지엽말단주의 매너리즘을 깨부수지 못했다.

물론 장점도 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선과 악의 대결에서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가치판단 기준을 전환한 것이다. 막판에 경찰에 잡혀간 백윤식이 도망친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타고난 찌질이 재희가 우리들의 왕초형 백윤식에게 사사받아 멋쟁이로 거듭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지 않지?

왜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지 않는가?

‘미녀는 괴로워’는 의도적인 도발이다.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건다. 정면대결을 선언한다. 과감하게 성형수술을 해버렸다는건.. 그야말로 우끼고 자빠진 세태를 비웃으며.. 진부하고 타성에 젖은 세상을 향해 ‘조까’ 한 방을 먹인 것이다.

딴지일보식으로 말하면 사회일반의 통념이나 가치관에 맞서 강력한 똥침 한 방을 먹여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옳다고 여기는 가지기준에 대해 ‘과연 그럴까?’ 하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넌 그렇게 보나? 난 이렇게 본다’ 하고 독립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적어도 그런게 있다. 어설프나마 있기는 있다.

‘싸움의 기술’의 결론은? ‘세상은 잔인하고 나는 나약하다. 왕초형에게 한 수를 배워서 약간 강해졌다. 왕초형은 영리하게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갔다. 나도 무서운 세상에 영리하게 적응해야지.’

이런 찌질한 결론이다. 이건 고수의 자세가 아니다. 고수라면 그런 궁상맞은 소리는 안한다.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야지. 세상을 향해 선제공격을 해야지. 쪽팔리지도 않나.

결론...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찌질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관객 눈물 짜내는 데는 찌질거림 만큼 손쉬운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가치기준이 문제다. 미학의 문제다. 선악의 관점에서 논하기로 하면 탈출구가 없다. 왜? 주인공은 보안관이고 나쁜 넘은 무법자로 역할이 딱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소재가 제한된다.

그러므로 마카로니 웨스턴처럼 주인공이 악당이어도 좋다는 식으로 기준을 바꿔야 한다. 주인공이 명백한 악당인데도 죄를 용서받으려면? 성형수술을 하고도 비난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첫째 고수가 되어 하수를 이겨보여야 한다. 둘째 독립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실패하고 있다.

라디오스타는 미학이 없다. 기존의 가치기준을 극복하는 새로운 판단기준의 제시가 없다. 미녀는 괴로워가 미래에 희망을 걸고 한 걸음 전진하고 있다면 라디오스타는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옛날기준에 현재를 맞춘다.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를 긍정한다. ‘나 과거로 돌아갈래’ 웃기고 있네. 초딩이냐? 엄마 젖 더 먹고 와라!

라디오스타는 기성의 가치관에 순응한다. 체념한다. 도피한 것이다. 잘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폭발력이 없다. 새롭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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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직후에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낡은 미학적 기준으로도 많은 영화를 만들수 있었다. 왜? 3가지 나쁜 넘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인민군이라는 악당, 둘째 일본놈이라는 악당, 셋째 조선시대 양반계급이라는 악당이다.

이것이 먹힌 것이 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다. 그런데 70년대 이후 우려먹을 악당이 없어졌기 때문에 더는 이 수법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625 끝난지 언제인데 철지난 반공영화나 계속 만들고 있겠는가.

없는 악당을 찾아내려면 사극을 할 수 밖에 없다. 과거에는 악당이 있었으니까. 전쟁이 없는 지금 전쟁영화 찍으면 사극이다. 그러니 이재수의 란이니 태백산맥이니 하며 과거로 가다가 시대의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해 망했다.

시대의 트렌드는 변한다. 인터넷 시대에는 인터넷 시대의 판단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새롭게 제시한 것이 ‘엽기적인 그녀’다. 이전 시대의 여성상과 다른 새로운 여성상을 끊임없이 제시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학이다. 미학을 제시해야 살아남는다. 미녀는 괴로워는 비록 어설프나마 나름대로 그것을 고안해서 제시하고 있고, 라디오 스타는 잘 만들었으나 그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미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헐리우드는? 그들은 악당을 잘도 찾아낸다. 인디언과 무법자라는 악당(서부극), 소련이라는 악당, 테러범이라는 악당(다이 하드), 외계인이라는 악당, 야만인이라는 악당(인디아나 존스), 심지어는 죠스나 쥬라기공원에서 보듯이 동물악당까지도 동원한다. 가상 세계의 악당(매트릭스)도 있다. 천재지변이라는 악당도 있다.(재난영화)

지구는 넓고 악당은 많다. 헐리우드는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낡은 기준으로 잘도 버틴다. 한국은 다르다. 나라가 작아서 지구 어느 귀퉁이에 붙어 있는 악당을 한국으로 데려올 재간이 없다. 외계인이 하필 우리나라로 먼저 쳐들어왔다는 설정이 어색한 거다.

그러나 헐리우드의 그들도 이제는 악당이 바닥났다. 선과 악의 대결논리로는 더 이상 우려먹을 소재가 없다. 헐리우드의 몰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새로운 미학적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면 침체를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미학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적인 선과 악의 대결≫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 이후 공식이 만들어진 고수와 하수의 대결≫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해방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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