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지난번 글에 대해서.. 이문열, 신경숙, 은희경은 그렇다치고 조정래, 황석영, 박경리 역시 찌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냐 하는 독자분의 물음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분들의 성취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으나. 다만 그것은 7, 80년대의 한국문학의 성취일 뿐.. 21세기 우리시대의 도전과 응전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쉽게 말하면.. 그 수준으로 노벨상 못받는다. 물론 노벨상이라는 것이 그다지 신통한 것이 아니므로 운이 따르면 받을 수도 있겠지만.. 세계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 이건 수준 문제다.  

확실히 수준 차가 있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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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잉의 80년대.. 그 시대 문단의 중심에 최인호라는 글쟁이가 있다. 자동기술법으로 쓰는 듯한 이 글쓰기 천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신춘문예에 입선했을 정도의 재주꾼이다.

그의 글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대부분 영화화 되었다. 별들의 고향부터 고래사냥, 적도의 꽃, 겨울나그네 등등.. 최인호.. 한국문학의 찌질함을 미학적으로 완성시킨 초딩문학의 대가.

이 양반 요즘은 역사소설로 잉크값이나 벌고 있다. 이문열이 삼국지로 도망갔다면 이 양반은 상도로 도망간 것이다. 웃기셔들.

문인이 조로하는 이유..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야의 좁음 때문이다. 철학의 한계, 수준의 한계다. 글쓰기라는 것이 천부적인 소질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우일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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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함의 정수를 보여준 최인호의 겨울나그네를 예로 들 수 있다. 겨울나그네에서 모든 사건은 주인공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다.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은 딱 하나 뿐이다.

그것은 다혜의 수첩을 돌려주면서 사진을 꼬불쳐둔 일이다. 뭐시라? 사진을 꼬불쳐 두다니.. 세상에 @.@; 우와 대단한 용기다. 놀랬다. 다시봤다 한민우. 장하다 우리아들. 이쁘다 우리 손주. 한민우 만세다! 푸헐헐. 놀구있네.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사망, 집안의 몰락 등.. 일련의 사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개된다. 심지어는 여자친구를 사귀는 일 조차도.. 고래사냥의 왕초 느낌을 주는 안성기(현태)의 도움을 얻는다.  

등 떠밀려 기지촌으로 간다. 등 떠밀려 밀수꾼 하수인이 된다. 등 떠밀려 감옥에 간다. 교도관에게 등 떠밀려 감옥을 나오니 아기가 생겨있다. 어쩌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여자와 산다. 이런 쪼다같으니라구.

민우의 무기력함은 70년대 박정희라는 완고한 가부장 밑에서 억눌려 지냈던 한국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주인공이 조금의 저항도 시도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소설은 왜 썼냐?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 이 소설 왜 썼지?”
“작가가 세상을 향해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짐작하기로 하면.. 작가는 실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날더러 어쩌라구?’ 이렇게 되물을 것만 같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가 그 시대 젊은이들의 공동체험이라는 사실이다. 그랬다. 70년대와 80년대.. 그때 그시절 우리 모두는 병태였고, 경아였고, 왕초였고, 정다혜였고, 한민우였고, 박현태였던 것이다.

정서적인 공감 외에 남는 것이 없다. 그것으로 자기위안을 얻는다. ‘너도그랬니? 나도 그랬어. 맞어맞어. 그때 그시절 우린 그랬지. 우린 거기서 그러고 놀았지.’ 하며 공감하고 자기위안 한다. 문학성 제로의 쪼다문학이다.

부자 내땅찾기 전문의 박경리도, 영웅놀이 전문의 조정래도, 본부놀이 전문의 황석영도 찌질이문학이라는 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갈 뿐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부분이 없다.

영웅이 있되 인간이 없다.

‘네가 먼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맞서서 너를 때린다.’는 식의 반사놀이는 진짜가 아니다. 권력의 압제가 혹독하니 용수철처럼 튕기어 저항한다. 이건 정말이지 유치한 거다. 이유를 대지 말아야 한다.

‘네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한다’는 것이 철학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점을 규명해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다.

물론 필자의 이런 말로.. 그분들의 문학이 깎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경리, 조정래, 황석영들의 활약은 일본의 경우 30년대 전후에 붐이 있었으며 일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니, 우리도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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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을 끄는 것은 둘 뿐이다. 하나는 힘이고 둘은 미(美)다. 힘은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미는 공동체에 가치를 부여한다. 질서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는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문학의 역할은 힘과 미(美) 중에서 미의 빛으로 힘의 압박에 맞서는 것이며, 질서와 가치 중에서 가치로 질서에 맞서는 것이며, 문제해결과 동기부여 중에서 문제해결의 물리력 앞에서 인간사랑의 동기부여로 맞서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허용된 자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러한 탐구가 없다면 문학이 아니다. 학(學)자를 붙일 자격이 없다. 상업적 목적의 책장사일 뿐.

황석영이나 조정래 역시 가치가 아니라 질서에 의존한다. 중앙에서의 주류 질서에 맞서는 변방에서의 비주류 질서를 논하거나 혹은 폭력의 질서에 맞서는 지식의 질서를 논하거나다. 어느 쪽이든 힘에 힘으로 맞서기다.

황석영이나 조정래의 소설은 퍼즐맞추기 놀이를 연상시킨다. 그 안에서 머리도 있고 가슴도 있고 팔다리도 있고 손발도 있다. 머리 역할을 맡은 주인공, 가슴 역할을 맡은 주인공, 손발 역할을 맡은 주인공들이 고루 등장한다.

이 역할게임을 극대화 시키면? 스머프 마을이 된다. 조정래나 황석영의 소설에 있는 주인공들은 스머프 마을에도 동일한 캐릭터가 하나씩 있다. 시계부품을 분해하듯 사회를 조각조각 분해해 놓고 적재적소에 인물을 하나씩 배치시킨다.

퍼즐이란 무엇인가? 그 중에서 하나의 포지션이 정해지면 나머지들의 포지션은 거기에 연동되어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그 포지션들 중에서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사유를 하는 포지션은 없다.

다들 뇌가 없다. 모두가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환경결정론이다. 아큐가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보니 문득 망나니의 칼 앞에 목이 늘어진 신세요 한민우가 이리저리 등 떠밀려 다니다 보니 문득 무덤 속 관에 뉘여진 신세라.

진실을 말하자. 자본의 물리력을 중심으로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수구꼴통이나, 지식의 힘을 중심으로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좌파들이나 질서에 의존한다는 본질은 같다. 그 질서에 인간이 치인다.

차이가 있다면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구꼴통은 원초적으로 말이 안통하는 집단이고 좌파들은 그나마 지식이 있어 약간 말이 통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총칼의 힘을 내세우는 전두환, 금전의 힘을 내세우는 이건희, 왜곡의 힘을 휘두르는 조중동, 먹물의 파워를 앞세우는 한겨레.. 본질은 같다. 그들의 외침은 한 마디로 ‘내 밑으로 줄 서!’ 이거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다 박정희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적인 유교주의 질서관념 때문이다. 별수없는 유교주의자인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유교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법가 - 박정희, 유가 - 이문열, 묵가 - 황석영 > 그러나 알고보면 다 유가.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인간들은 똑 요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의 모범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

틀렸다. 질서가 아니라 가치다. 인간해방에 기여하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다. 그 해방은 계급해방이 아니라 개인해방이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억압한다면 문학이되 문학의 탈을 썼을 뿐 진짜가 아니다.

진짜는 스탕달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탕달의 적과흑 이전에는 진짜가 없었다. 그 이전은 모두 영웅담이었다. 황석영이나 조정래는 21세기의 빅토르 위고들이다. 황석영은 장발장 속편을 쓰고 조정래는 뒤마의 삼총사 속편을 쓴다.

근대소설이되 현대소설이 아니다. 중세의 영웅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소설이 이상 김해경으로부터 시작된다면 황석영과 조정래들은 그 이전시대로 되돌아가 19세기의 장발장과 삼총사를 뒤늦게 떼고온 것이다.

춘추시대 제자백가 중에 소설가라는 가(家)가 있었다. 소설가들은 길거리에서 꼬맹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에 수호지나 삼국지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원대에 희곡이 유행하면서 수준이 약간 높아졌지만.

조선시대의 고담은 글자를 아는 이가 글 모르는 동네어른들을 머슴방에 모아놓고 새끼 꼬고 짚세기 삼으면서 읽어주는 형태였기 때문에 귀신이야기나 영웅이야기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타일에서 한계가 있다.

황석영, 박경리, 조정래는 글의 형식으로 볼 때 독자와 작가의 일대일의 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사람에게 동시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쌍방향적 소통이 아니라 일방향적 소통인 것이다. 이게 19세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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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잉의 80년대.. 그때 그시절은 그랬다. 그런 시대였다. 시대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다. 황석영, 조정래, 박경리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다르다. 달라야 한다. 질서에서 가치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완고한 가부장 아버지 밑에서 울고있는 우유부단한 우리 병태 도련님, 가엾은 우리 민우도련님.. 이런 유치발랄한 이야기를 21세기에도 들어야 하다는 말인가? 끔찍하다. 신물난다.

사유의 깊이가 없으면 절대로 문체의 파격이 불가능하다. 문체의 파격이 없으면 소재의 폭이 제한된다. 그러면? 결국 쓸만한 시나리오가 없어서 영화 못 찍는 사태가 일어난다.

최근의 한국영화 붐은.. 소설에서는 죽을 쑤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7, 80년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허우적 거린다.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재는 일본에서 빌려오게 된다.

1년에 100여 편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영화라고 할만한 것은 40여편에 불과하다. 나머지 60여편은 극장에 걸어놓기가 민망한 습작이다. 중천만 해도 국산CG 연습한 점에 의의를 두는 격이다.  

문학이 안되는데 영화와 드라마가 쭉쭉 뻗어나가 줄 리는 없다. 문학은 우리들 마음속에 그어놓은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금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용기있게 그 금을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되어야 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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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 ‘미녀는 괴로워’의 흥행을 보고 생각하는 것.. 첫째 결국 일본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는 점. 언제까지 일본만화에 의존할 것인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게 안 되나? 결론.. 안 된다. 한국문학 수준이 그래서.

둘째 외모지상주의와 관련된 선과 악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해 버렸다는 점. 이건 확실히 평가할 만 하다.(그러나 여전히 약간의 찌질거림은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 흥행이 되었는지도 모르나.)

어쨌든 한국의 찌질한 감독들은 여기서 배운 바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마카로니 웨스턴은 정통 서부극과 달리 주인공이 보안관이 아니라 악당이다. 혹은 선과 악의 기준을 초월한 인물이다. 그런데 실력이 있으니 용서가 된다. 미녀는 괴로워도 이와 유사한 구조가 있다.)

셋째 그 무대의 배경과 소품이 철저하게 뉴요커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 이 점이 20, 30대 된장녀(?)들에게 특히 어필하지 않았나 싶다. 된장녀라고 말하면 기분나쁠지 모르나.. 확실히 그런게 있다.

무언인가 하면.. 영화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관객들과 그것을 제작하고 공급하는 작가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하며.. 미녀는 괴로워가 그러한 틈새를 잘 파고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가치관이 정립된.. 그러나 뇌가 굳어버린 20세기의 작가와..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그러나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21세기 관객들 사이의 어떤 불협화음.. 그것이 한국영화가 때로는 크게 흥행하고 한편으로 크게 망하는 즉.. 고르지 못한 흥행성적의 원인이 아닌가 한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둘 사이의 절묘한 타협점이 찾아진 것이며.. 그것은 순전히 감독의 재능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구조가 계속 존재하는 한 한국영화의 흥행성적은 계속 들쭉날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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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한상준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남자이지만.. 강한나가 제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뉴요커 스타일의)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음악의 진정성이라는 탈출구를 이용하여.

성형이니 외모지상주의니 하지만.. ‘넌 된장녀야’ 하는 폭로에 ‘된장녀면 어때. 실력만 있으면 되지.’ 하고 되받아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어쨌든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와해시키고 음악의 진정성이라는 미학적 기준을 제시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선과 악은 공동체의 질서를 논함이요 음악의 진정성은 인간의 가치를 논함이다. 이 차이를 두고 수준차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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