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했다. 군자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세 가지 본능이 있다. 종교본능, 정치본능, 역할본능이다. 극기克己라고 하면 성욕이나 식욕 따위를 떠올리겠지만 이런건 초딩들이나 하는 소리다. 수준 올리자. 언제나 그렇듯이 진짜는 따로 있다.
1. 종교본능
인간은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집단과 굳게 결속하려는 본능이 종교본능이다. 부족주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부족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이념이다. 곧 공자의 인仁이다. 인은 소통능력이자 공감능력이다. 인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집단과 분리되어 있다는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귀신을 만들어낸다.
2. 정치본능
집단의 서열을 정하는 본능이 정치본능이다. 자신의 서열을 올리기 위해 위세행동을 한다. 결혼식에 외제차 50대를 동원하는 중국인 짓 말이다. 소집단의 영웅이 되려고 사회를 적으로 규정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다. 공공의 이익을 빼돌려 가족들에게 베풀고 그것을 내세워 가족 위에 군림한다.
3. 역할본능
집단 안에서 포지션을 고정시키는 것이 역할본능이다. 보통은 남자는 남자답게, 아빠는 아빠답게 하며 대칭적인 역할을 얻으려고 한다. 대칭적이어야 돋보이기 때문이다. 돋보이는 역할을 얻으려고 허세부리다가 망한다. 집단 안에서 돋보이는 포지션을 얻으면 편하기는 하다. 의사결정이 쉽다. 집단의 구성원이 ‘저 사람은 뭣하는 사람이다’ 하고 알고 있으므로 의사소통이 쉬운 것이다. ### 세 가지 원초적 본능은 모두 인간의 사회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기보다 남들을 편하게 한다. 결국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붙인다. 생선회를 간장에 찍어먹든 초장에 찍어먹든 음식 자체의 결을 따라야 한다. 만약 선배나 후배나 사회의 동료의 눈치를 보고 사회관계의 결을 따르면 먹다가 체한다. 죽는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회관계 안에서의 종교본능, 정치본능, 역할본능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때문이다. 잘하려고 하므로 더욱 망한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공자의 인仁은 종교본능을 극복하는데 쓰인다. 막연히 착하게 사는게 인은 아니다. 소통능력, 공감능력을 키워야 한다. 공자의 지智와 의義는 정치본능을 극복하는데 쓰인다. 신信과 예禮는 역할본능을 극복하는데 쓰인다. 실제로는 걸쳐져 있다. 인仁과 지智와 의義와 신信과 예禮가 칸이 딱 나누어진 것은 아니다. 예禮도 개인적인 교양의 예냐, 사회적인 처신의 예냐에 따라 다르다. 마찬가지로 의義도 종교적 의와, 정치적 의와, 역할의 의가 있을 수 있다. 깨달음 역시 이에 맞추어 세 가지가 있다. 종교본능을 극복하는데 중점을 두면 소승이다. 개인은 집단과 결속해야 안심이 되지만 깨달음을 얻어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건 소승불교다. 대승불교는 사회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정치를 한다. 집단 안에서 서열을 올리지 않아도 마음이 편한 경지가 대승이다. 공자가 말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溫’이면 대승의 경지다. 구조론이 주문하는 돈오의 경지는 미학적 깨달음의 세계다. 집단에서 독립하는 소승과 집단을 이끄는 대승이, 집단과의 관계를 해결한다면 돈오는 운명적인 만남을 거쳐 별도로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 만남의 형태가 거의 결정하므로 돈오다. 연주자라면 자신이 치는 피아노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좋은 악기와 만나야 가능하다. 가정이라면 가족과 잘 지내야 하고, 회사라면 직원들과 잘 지내야 한다. 잘 만나야 잘 지낸다. 잘 만나서 자기 삶을 잘 연주해야 한다. 인생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집단 안에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소년이다. 종교본능을 극복하게 하는 소승은 여전히 집단 안에서 나를 찾는다. 정치본능을 극복하는 대승 역시 집단을 끼고 들어간다. 소승은 가족이라는 소집단을 나와 독립하고 대승은 다시 사회라는 큰 집단으로 들어간다. 소승은 학교를 졸업하는데 쓰이고, 대승은 결혼하고 직장을 잡는데 쓰인다. 귀신과 마녀와 빨갱이와 무섭지 않으면 졸업할 수 있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편안하면 결혼하고 취직할 수 있다. 더 상승해야 한다. 장년이 되면 별도로 가족을 꾸려야 한다. 자신을 따르는 가족과 부하가 있다. 귀신이 무섭고 자시고 간에, 남이 알아주고 자시고 간에 이런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다. 발등에 불 떨어졌다. 장년기는 역할본능을 극복하여 아내나 남편이나 상사나 부하라는 역할이 없어도 자유로워야 한다. 자기 삶을 매끄럽게 디자인해야 한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가능하다. 일은 ‘복제, 조합, 연출’된다. 복제는 종교, 조합은 정치, 연출은 역할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종교적 부족주의와 정치적 가족주의, 그리고 역할에서의 개인주의다. 종교적 부족주의는 제대로 된 철학가 한 명에게 맡겨야 한다. 곧 이념이다. 정치적 가족주의는 집단의 수장에게 맡겨야 한다. 곧 민주주의다. 역할에서의 개인주의는 각자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 해결된다. 대중은 교양과 예술을 익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2500년 전에는 예악禮樂이다. 종교적 인은 공자가 맡고, 정치적 의는 리더가 맡고, 역할의 예악은 만인이 각자 맡는 것이다. 문제는 교육되지 않은 인간의 비뚤어진 본능이다. 돈을 벌면 정치하려고 하고 더 나아가 교주 행세를 하려고 든다. 사이비를 추구하니 괴력난신이다. 음모론 전파행동도 일종의 괴력난신 행동이다. 김어준도 교주가 되고 싶은 심리에 빠져있는게 아닌지 반성해봐야 한다. 뭐가 몸에 좋다거나 혹은 뭐가 몸에 해롭다거나 하는데 집착하는 사람 있다. 그런데 열 올리는 것도 교주가 되고 싶은 심리다. 설탕이 해롭다는둥, 소금이 해롭다는둥, 흰 밀가루가 해롭다는둥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 어디가나 꼭 있다. 역시 괴력난신의 추구다. 그런 비뚤어진 본능이 마녀사냥을 시도하고 매카시즘을 전파하고 두려움과 증오를 조장한다. 부족민의 식인, 살인, 문신, 변발, 전족이 모두 인간의 종교본능에 따른 것이다. 인仁으로 해결해야 한다. 어린 소녀의 발을 비틀어 버리는게 어찌 인仁이라 하겠는가? 공감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 짓이다. 중국인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일본인의 변발이나 유태인의 할례도 마찬가지다. 보기 흉한 변발이 흉하지 않다면 공감능력이 결여된 것이다.
인생은 '소승≫ 대승≫ 돈오'로 갑니다. 소년은 귀신을 극복해야 하고, 청년은 서열을 극복하고, 성년은 자기 뜻을 펼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성장이 인식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인식론적 전개 안에도 인, 지, 의, 신, 예의 존재론이 작동합니다. 돈오가 진짜이고 그 이전은 모두 세팅과정이라는 거죠. 돈오는 자신을 위한 무대에 올라서 리사이틀을 하는 것이고. 대승은 그 독주회를 할 자격을 얻는 것이고, 소승은 처음 악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
생각나는 일이 많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