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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513 vote 0 2016.02.15 (16:58:37)

     

    노자는 무엇을 말하였는가?


    동양사상에는 깨달음이 있고 서양사상에는 깨달음이 없다. 동양사상의 경쟁력은 깨달음에서 나온다. 깨달음Bodhi은 불교용어로 출발하나 중국의 선종불교에 와서 더 세련되어졌다. 중국에는 도道, 혹은 성性이나 리理로 말해지는 고유한 깨달음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일찍이 깨달음을 이루어 ‘일이관지’ 했지만, 정작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역의 밸런스 개념을 슬쩍 언급했을 뿐, 자신이 어떻게 ‘일이관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인간의 언어감각에서 유래하므로 아는 사람은 그냥 안다.


    공자의 표현으로는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生而知之者 上也’라. 나면서 아는 사람이 으뜸이라고 했다. 공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석가는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육조 혜능도 나면서 아는 사람이다. 수행은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획득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돈오는 불필요 돈수도 불필요, 깨달음의 길이 있으니 그 길을 갈 것이냐 말것이냐 결정이 있을 뿐이다. 깨달음은 결단이며, 결단은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다. 갈림길을 만나면 시키지 않아도 결단하게 되어 있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막다른 길 앞에서 어찌할 것인가?


    되돌아가든 아니면 절벽을 기어오르든 거기서 선택하게 된다. 나면서 아는 사람은 절벽을 오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먼저 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오른다. 되돌아가는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깨달음은 사건의 모형을 깨닫는다. 사건은 원인에 서서 결과를 쏜다.


    지식은 결과에 대응하여 귀납하고, 깨달음은 원인에 대응하여 연역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만 바꾼다. 언어는 대칭과 호응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므로 상황과 호응되도록 말을 똑바로 하면 저절로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쓰는 언어를 보면 깨달았는지 3초 안에 판명된다.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며 사실을 진술하고 있으면 보나마나 허당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았다.‘며 ‘이것’ 들어가면 이미 틀렸다. 공자는 자신이 나면서 깨달았듯이 남들도 자신과 같을 것으로 여겼다. 자신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널려있을 것이므로 소문을 내면 만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뒤늦게 안회를 만났으나 일찍 죽었다. 깨달음의 대는 끊어졌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가 유능한 지도자는 되지 못한다. 자신이 쉽게 해내는 것을 남들이 왜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연주자는 스승이 못된다.


    대부분 밸런스의 문제인데 자신은 신체조건부터 밸런스가 딱 맞춰져 있기 때문에 남들이 왜 개고생을 하는지 이해를 못한다. 악보를 한 번만 보면 외우는데 남들은 왜 외우지 못하는지 알지 못한다. 천재들은 악보 안에 진열된 음들의 밸런스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공자가 깨달음을 논하지 않고 실천을 앞세운 것은 나면서부터 깨달았기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때문이다. ‘일이관지’에 써먹은 그 일一이 무엇인지 공자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노자는 나면서부터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노자의 언어에는 대칭이 있으나 호응이 없다.


    시조는 초장과 중장으로 벌여놓고 종장이 수습하는 형식이다. 한시의 기승전결도 같다. 공자의 언어는 벌이기와 수습하기 곧 대칭과 호응의 형식이 있는데 노자의 언어는 지하철 시와 비슷해서 벌여놓고 수습하지 않는다. 문단의 앞뒤가 전혀 호응이 되지 않고 겉돈다.


    내용을 들여다 볼 필요도 없다. 한국말을 똑바로 못하는 사람은 일단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TV토론을 봐도 꼴통들은 자기 말을 수습하지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음을 알게 된다. 트럼프 짓이다. 토론이 아니라 자기 감정의 토로다. 자기소개를 계속하는 거다.


    말이 안 되는데도 꼴통들은 신기하게 알아듣는다. 어차피 그들은 논쟁에 관심없고, 정서의 공유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WWF 프로레슬링과 비슷하다. 이쪽에서는 스포츠 경기를 하는데 저쪽에서는 쇼를 하고 있다. 애초에 개념이 다르므로 토론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노자는 깨닫지 못했지만 깨달음 그 자체에 천착해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노자는 깨달음의 개념을 도道와 덕德으로 구체화 했다. 도는 ‘에너지가 가는 길’이며 덕은 그 길의 앞단계가 뒷단계를 지배하는 즉 ‘권리’ 개념이다. 세상은 권리≫권력 매커니즘으로 조직되어 있다.


    권력자의 통치권, 시민의 인권, 발명가의 특허권, 부자의 소유권, 작가이 저작권, 알박기의 선점권 등의 형태로 일의 앞단계가 다음 단계를 지배하는 즉 머리가 꼬리를 이끄는 구조로 세상은 두로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이 링크로 연결되듯이 세상은 권한으로 연결되어 있다.


    권한은 에너지의 결에서 유도된다. 정확히는 열역학 2법칙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만큼 상부구조에 의존하게 되며, 이때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대해 덕이 있다. 도가 있는 자는 에너지가 있고, 덕이 있는 자는 권리가 있다. 고대사회에는 덕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세종대왕이 저작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덕을 보고 세종대왕의 덕을 칭송한다. 도는 그러한 권한의 발생원리다. 덕은 권한의 전개원리다. 도가 있는 자가 낳고, 낳는 자는 덕이 있다. 덕을 소비하면 평판이 나빠지고, 그 덕을 소비하지 않으면 평판이 올라간다.


    권리가 있으나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모두가 떠받든다. 이것이 노자의 무위無爲다. 그러나 무위는 정밀하게 세팅해야 한다. 무위가 작동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가 같다. 시장원리에 맡겨두면 경제가 망한다. 단 경쟁력이 있으면 무방하다.


    권리가 있는 자는 시장에 맡겨둘수록 이익이고, 권리가 없는 자는 시장에 맡겨두면 죽는다. 무위를 함부로 휘두르면 죽는다. 다윈의 자연선택도 일종의 무위라 할 수 있다. 자연선택이 작동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종은 자연선택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진화한다.


    우리는 처음 목이 긴 기린과 목이 짧은 기린이 공존했다고 배웠다. 천만에. 기린은 심장에서 머리로 너무 많은 피를 보내므로 머리가 고혈압이다. 목이 짧은 기린은 머리에 피가 몰려 죽는다. 심장이 너무 많은 피를 보내므로 머리를 심장에서 멀찍이 떼어놓은 것이 기린이다.


    가볍게 겉핥기로는 노자의 무위가 맞는 듯 하나 깊이 들어가보면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온다. 시장원리가 무위에 의해 작동되려면 금융과 재정으로 정밀하게 제어해야 한다. 경쟁력없는 후진국은 절대로 안 된다. 국가라는 경제단위가 독립적인 계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손에 칼을 쥐어줄 수 없다. 노자의 언설이 많은 영감을 주지만 언어가 당당하지 않으니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로 되어 나쁜 의도를 가진 자에 의하여 왜곡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노자의 주장은 맞는 부분에만 맞는 것이다. 그게 틀린 거다.


    노자는 깨달음을 사유하였을 뿐 깨닫지 못했다. 노자의 주장은 하부구조에 적용된다. 상부구조는 유교에서 나온 오자병법이 적용되고 하부구조는 도교에서 나온 손자병법이 적용된다. 오자병법은 로마교범과 같은 정규전의 압도적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여 전쟁을 영원히 끝낸다.


    핵무기가 전쟁을 막는 것과 같다.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이 오자병법이다. 이순신 장군은 장군전을 쏘아 적함을 깨뜨리고, 자갈 600개를 뭉친 조란탄을 산탄으로 사람 머리 위에 쏴서 무력화 시켰다. 나폴레옹이 포도탄을 파리지앵들의 머리 위에 갈겨서 재미 본 것과 같다.


    여기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전술체계 전반을 뜯어고쳐야 하므로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적군은 10년 안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낼 수 없다. 손자병법은 보다 실전적이다. 바로 써먹을 수 있다. 적이 바로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러나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다는 격으로 손자병법으로는 적이 승복하지 않는다. 항우는 늘 이겼지만 유방이 늘 지면서도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면 적이 절대 승복하지 않는다. 속임수에 넘어간 적군이 자신도 그 속임수를 써먹기 위해 병사를 모은다.


    한니발에게 패배한 로마군이 한니발의 병법을 역으로 써먹은 것과 같다. 로마가 한니발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은 한니발의 전술을 배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손자병법을 좋아하는 것은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쉽게 배울 수 있으면 가짜다.


    공자의 가르침은 상부구조에 적용되며 새로 일을 벌인다. 노자의 가르침은 하부구조에 적용되며 일을 종결시킨다. 오늘날 기업이 요구하는 유능한 직원들은 공자가 아니라 노자를 배운 사람이다. 기업은 직원을 1회용 소모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노자는 단순 소모품이다.


    ◎ 공자는 아프리카에 냉장고를 팔고 알래스카에 난로를 판다.
    ◎ 노자는 아프리카에 난로를 팔고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판다.


    당신이라면 어떤 직원을 채용하겠는가? 당장 아프리카에 난로를 팔 사람이 필요하다. 실적이 올라가므로 부하 덕에 간부인 당신이 승진한다. 대신 기업이 망한다. 김우중이 망한 이유와 같다. 노자는 더 실전적이지만 처세술에 불과하다. 소인배의 잔재주라 해악이 크다.


    ◎ 공자의 진보 – 사람을 가르쳐 세상을 바꾼다.
    ◎ 노자의 보수 – 사람이 환경에 적응한다.


    공자는 세상을 바꾸고, 노자는 환경에 적응한다. 공자는 계몽주의를 만들었고 노자는 처세술을 가르쳤다. 공자는 천하를 이롭게 하고, 노자는 개인의 출세에 보탬이 된다. 대신 세상을 크게 병들게 한다. 중국이 망한 것이 다 이유가 있다. 노자의 가르침대로 했기 때문이다.


    노자의 후손들은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다. 유전자를 조사해 봤더니 중국 화북지방은 이민족 유전자가 압도적이었다. 서양을 망친 것은 기독교다. 문명의 중심은 인도로 옮겨가 버리고 중세의 암흑을 면치 못했다. 기독교는 해방의 종교이나 기독교에서 해방되자 유럽이 강해졌다.


    중국은 도교로 망했다. 진시황은 도교를 숭상하여 유가를 죽였다. 망했다. 한나라는 도교를 숭하여 흉노족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무제 때 유가를 채택하여 잠시 살아났으나 곧 도교로 되돌아갔다. 조조가 유가를 밀어낸 이후 위진남북조는 도교로 인하여 철저하게 망했다.


    흉노족, 선비족, 저족, 갈족, 강족이 도교의 무위로 맞선 중국을 먹어치우니 고구려는 그 틈을 노려 서쪽으로 진출했다. 서쪽의 이민족이 중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수나라, 당나라도 이민족의 가한可汗이 통치했다. 이때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했으니 고구려도 망해버렸다.


    송나라와 명나라 때 유교를 부활시켰으나 약간 흉내를 냈을 뿐 민간의 뼛속까지 침투한 것은 도교다. 도교는 원래 중국의 민간신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명나라는 승려출신인 주원장이 선비를 혐오하여 10만명의 선비를 때려죽이는 사화를 일으켜 유교를 짓밟았다.


    이후 양명학, 고증학은 유교로 보기도 어렵다. 중국에서 유교는 벼슬따는 용도로 쓰였을 뿐이며 민간은 도교를 신앙한 것이다. 서구는 기독교로 망했고, 아랍은 이슬람으로 망했고, 중국은 도교로 망했다. 공자의 깨달음은 당대에 이미 대가 끊겼으니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노자도 번뜩이는 데가 있다. 구조론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자연법칙에서 인간사회로 내리꽂는 연역구조가 중요하다. 그러나 노자의 직관적 사유이므로 단편적이다. 흐름이 연결되지 않는다. 이랬다 저랬다 한다. 가장 차이나는 점은 말 하는 수준이다.


    노자는 일단 언어가 조악하다. 언어는 기본 대칭과 호응이 들어가줘서 기승전결의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데 노자의 언설에는 대칭이 있되 호응이 없다. 단락마다 앞부분에 좋은 아이디어를 던져놓고 뒤에 가서 몸이나 챙기라는둥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기승전몸’의 패턴이다.


    워낙 시대가 흉흉했기 때문이리라. 지식인이 죽어나가던 시대였다. 벼슬하다가 임금에게 맞아죽느니 은거하는게 낫다고 여기는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진짜라면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진짜는 낙관주의다. 바른 길과 굽은 길이 있다. 굽은 길을 먼저 봐야 바른 길이 이해된다.


    사람들에게 A를 가리키면 바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B가 아니라’고 하면 알아듣는다. 사람들은 긍정보다 부정을 통해 이해한다.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다. 그러므로 노자의 무한부정어법이 구조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대칭으로 조직된다.


    노자의 언설은 진술이 있되 전제가 없다. 숨은 전체를 찾아내면 그대로 구조론이다. 노자는 무위를 가르쳤다. 에너지를 얻어야 무위가 가능하다. 무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면 구조론의 정답이다. 목 좋은데 가게를 내면 무위로도 돈을 번다. 단 그 목을 찾는 과정은 인위다.


    공자의 인의를 깨달은 자만이 진리의 길목을 찾아 노자의 무위를 실천할 수 있다. 바늘없는 실은 꿰지 못하고, 실없는 바늘은 가지 못한다. 바늘이 머리고 실은 꼬리다. 공자가 바늘이면 노자는 실이다. 실이 더 쓸모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급실무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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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은 패턴을 읽는 능력입니다. 모형을 추출하면 패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 언어에서 모형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대칭과 호응의 구조를 가지므로, 상대방의 언어가 어디에 대칭을 세우는지 살펴야 합니다. 굉장히 많은 WWF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 레벨에 도달하지 못한 자가 절대 다수입니다. 언어와 언어 아닌 것을 구분하는 훈련부터 쌓아야 합니다. 새누리당의 언어는 일단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반박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레벨:10]다원이

2016.02.15 (19:48:33)

새눌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말이 아니어서 반박 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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