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과 노자 김용옥이 노자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지만, 김용옥을 까는 사람들의 글이 구글검색 첫 페이지에 다수 노출된다. 대개 노자 텍스트에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며 김용옥의 무미건조한 해석을 비판하는 양상이다. ‘몸이라고 써놨지만 그게 사실은 진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지 설마 사람의 육체 몸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노자가 바보냐?’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런데 노자 바보 맞다. 몸이라고 써놨으면 몸으로 해석하는게 맞고, 뼈라고 써놨으면 뼈로 해석하는게 맞다. 심오한 의미가 있으면 그것대로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더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억지 의미부여는 노자를 두 번 죽이는 짓이다. 게다가 노자가 하지 말라는 작위다. 문제는 김용옥이 ‘바보 노자’보다 더 바보라는 거. 이 ‘잉간’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게 노자 말대로 몸을 챙긴다며 한의학을 배우고, 노자 말대로 뼈를 단련한다며 보건체조 할 양반이다. 상태가 안 좋다. 도덕경의 노자는 높은 수준의 직관적 깨달음과 저급하기 짝이 없는 논리적 사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한 모순과 부자연스러움에 오히려 순수한 맛이 있다. 3천년 전 중국이면 미개했던 시대다. 고대인의 사유에 그 이상의 정교한 논리를 기대한다면 역사공부 하지 않은 사람의 무식을 들키는 짓이다. 은나라는 집을 짓는데 기둥이 넘어질까봐 생사람을 죽여서 기둥 밑에 파묻었을 정도로 야만했다. 집도 제대로 못 짓는 수준이었다. 고대 중국문명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황하는 메마른 하천이다. 태행산맥을 빠져나와 하류에 오면 수량이 적어져서 건천이 되기도 한다. 유역이 산동반도 남북으로 크게 옮겨다니므로 세계 3대문명과 같이 정기적으로 범람이 일어나는 삼각주가 없다. 석기와 목기를 사용한 고대의 농사기술로는 농경이 발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지역, 인더스강유역과 다르다. 황하하류는 게르만족이 살던 삼림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대문명이 생겨날 수 없다. 서역에서 북방유목민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가 전해지자 황하하류의 숲이 벌채되어 갑자기 발전한 것이다. 은나라가 짧은 기간에 18번이나 수도를 옮긴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수도를 자주 옮긴다는 것은 잉카나 마야와 같이 노예사냥을 통해 유지되는 약탈집단이었음을 의미한다. 바이킹이나 왜구의 활동과 같다. 국가 비슷하지만 국가로 보기 어렵다. 18번 옮겨다니다가 상나라의 마지막 도읍지인 은에서 처음 토성을 쌓고 오늘날의 국가로 된 것이며 그 직후에 망했다. 은나라는 망할때가 되어서 처음으로 인신공양을 금지하고 문명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6천년 이상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 3대문명과 다르다. 중국문명은 3천년 전에 수십 개의 소규모 문화가 할거하다가 주나라 이후 북방 유목민족을 통해 철기가 보급되면서 쇠도끼에 의해 삼림이 벌채되자 갑자기 발전했다. 급격한 발전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노자와 같이 은거하는 선비의 전통은 요순시대의 허유로부터 시작하여 오래된 것이다. 논어에도 은자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여럿 기록되어 있다. 백이, 숙제도 은자로 볼 수 있다. 참여파와 은거파로 나뉘어 논쟁하는 모습은 그 시대의 혼란상을 방증한다. 노자의 텍스트에서 빛나는 직관을 취하되 저급한 논리는 버려야 한다. 도덕경은 직관적이되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각 단락마다 앞부분은 자연법칙에 따른 직관으로, 뒷부분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작위적인 논리로 되어 있다. 앞부분이 무위라면 뒷부분은 작위다. 노자 스스로가 비판하는 부자연스러운 작위를 구사한 것이다. 단락마다 앞부분의 직관은 아름다우나 뒷부분의 논리는 억지라서 뒷사람이 가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킨다. 왕필의 덧글을 비롯한 일부 가필은 분명히 있었으나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디어는 하나다. 언어는 대칭과 호응을 이루어야 한다. 노자의 글이 졸렬한 이유는 호응시키려 하였으나 억지 논리구사일 뿐 제대로 호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필이 의심되는 뒷부분을 떼면 대칭만 있어서 문장이 되지를 않는다. 이건 더 이상하다. 노자 텍스트의 모순을 억지로 합리화하려 한다면 참으로 역겨운 것이다. 빛나는 직관까지 죽이는 결과로 된다. 전혀 교육받지 못한 인디언 추장도 멋진 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면 어색해져 버린다. 시골 인격자를 정치판에 데려다 놓으면 최악이 되는 것과 같다. 안철수도 벤처나 하고 있었다면 괜찮은 사람이다. 야심을 품고 주제넘은 짓을 하니까 이상해진다. 고흐는 그림의 본질을 정확히 알았지만 그림솜씨는 옛날의 루벤스에 미치지 못한다. 고흐의 그림이 루벤스보다 연대가 늦고, 비싸다고 해서 그림 그리는 기교가 뛰어나다고 주장하면 얼빠진 소리다. 우리는 고흐의 순수를 취할 뿐 기교를 취하지 않는다. 못그린듯이 보여서 모작이 많은 그림이 더 비싸다. 이중섭의 그림도 쉽게 모작할 수 있다. 추사의 세한도를 모작하기는 쉽다. 투박한 진짜가 더 가치있다. 노자를 높이기 위해 말을 꾸며서 억지해석을 가하는 것은 어색한 화장과 같아서 보고 있기 힘들다. 얼빠진 환빠들이 고대사를 미화하는 것처럼 우스울 뿐이다. 원문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노자의 잘못된 것은 버리고 맞는 부분만 취하느니만 못하다.
"환빠생각.. 중국 고대사는 위대하다. 그거 우리 동이족이 했다. 구조론 정답.. 중국 고대사 최악이다. 우리는 그 동이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자의 도덕경 중 빛나는 부분은 5천자 중에 300자 정도이며 나머지는 동어반복에 무리한 논리전개입니다. 노자의 무위와 맞지 않는 작위죠. 직관은 아름다우나 언어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몇 개 안 되는 단어로 논리를 전개하려 한다면 아마존의 조에족이 '께또' 한 마디로 진리를 설명하려고 덤비는 만큼이나 무리입니다. 추상개념을 나타내는 단어 숫자가 많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