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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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587 vote 0 2008.12.29 (12: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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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주변인들의 시대가 있다. 막이 오르기 전에 삐에로가 나서서 한마디 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풍각장이의 시대는 그렇게 길지 않다. 주인공이 등장하면 삐에로는 그만 퇴장해야 한다.

정치적 소수자도 대접받아야 한다. 때로 위대한 변혁은 변방의 작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마이너리티에게는 마이너리티의 문제가 있다.


그들은 판을 벌이기가 무섭게 자기 역할을 찾아버린다. 스스로 게릴라를 자처하고 삐딱이를 주장하며 주변인으로 자족한다. 거기서 시작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고 거기서 멈추어 그것을 자신의 캐릭터로 삼는다.


진짜가 아니어서 안 된다. 역할 하는 것이어서 안 된다. 형제여! 부디 도중에 주저앉아 점방을 열려고 하지 말라. 변방에서 틈새시장을 개척하지 말라. 구색을 맞춰주는 주류의 양념이 되지 말라.


비록 출발은 변방에서 아웃사이더로 작았으나 곧 죽어도 중앙의 무대로 뛰어들고 보아야 한다.


“왜 포기하는가?”



생각하라! 불멸의 세익스피어도 한 때는 비극을 팔기 위해 희극을 쓰지 않았던가? 모든 위대한 것은 변방에서 온다. 작은 풀잎처럼 온다. 그러나 거기에 주저 앉아서는 안된다. 더 크게 싸우고 길을 열어가며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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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은 없다


문명을 접해본 적이라곤 없는 원시의 마을을 방문하여 보기로 하자. 자석을 한번도 보지 못한 그들에게 자석을 이용한 여러 가지 신기한 실험들을 보여주면 어떨까?


그들은 자석을 믿지 않는다. 자석의 마법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자석의 원리를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이다.


“한낱 쇠붙이 따위가 어찌 동서남북을 헤아리겠는가? 저 자석 속에는 요정이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자석을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자석을 실제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여 보여주게 되면 그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그대도 마찬가지다. 이 거리에서 신을 만나게 되면 신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신을 만났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는 것이다. 물론 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언제라도 신을 믿을 것이다.



그들은 자석의 조화(?)를 믿기 때문에 자석의 원리(!)를 믿지 않는다. 나는 신의 실재를 믿기 때문에 귀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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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기관


영구기관의 발명이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허청에는 해마다 약 40여 건의 영구기관 발명특허가 신청된다고 한다. 물론 전부 반려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증명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론이다. 경험은 믿어도 이론은 믿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어떤 확실한 사실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맨 처음 놓은 한 알의 바둑돌이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하지 않아도 명백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에 어떠한 계략도 없다는 것은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명백하다.



신의 존재도 이와 같다. 이론이 필요한가? 이론으로 증명하면 그대는 납득할 것인가? 그대가 맨 처음의 순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스스로 납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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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목수


나무로 집을 짓는다면 인간의 규칙이 아닌 나무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돌로 집을 짓는다면 인간의 규칙이 아닌 돌의 규칙에 복종해야 한다.


나무에 결이 있듯이 돌에도 결이 있다. 참된 목수는 나무의 결을 따라 대패질을 하고 참된 석수장이는 돌의 결을 따라 망치질을 한다.


사람의 마음도 또한 그러하다.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결을 가지고 있다. 참된 사랑이라면 마땅히 마음결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한다.



각자는 각자의 동그라미를 가지고 있다. 돌에는 돌의 동그라미가 있고 나무에는 나무의 동그라미가 있다. 각자는 그 각자의 동그라미를 완성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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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석봉


글씨는 추사보다 석봉이 또박또박 더 잘 쓴다. 그러나 평단이 추사체를 석봉체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석봉체는 글자의 논리를 따른다. 그 획의 굵고 가늠이나 굳셈과 여림은 그 글자가 가리키는 논리를 따라 자연스럽다.


추사체에서는 종이의 논리와 먹의 논리가 대결하고 있다. 종이는 멈추라 하고 먹은 퍼지라 한다. 그 가운데 때로는 팽팽한 긴장이 있고 때로는 멋들어진 어우러짐이 있다.


옛사람은 이를 음양의 조화라 했다. 석봉의 글씨는 양(陽)이 강해서 빡빡한 압박감을 받는다. 추사의 글씨에는 음양의 조화가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석수장이의 돌에는 돌의 결이 있고 목수의 나무에는 나무의 결이 있다. 추사의 글씨에서는 먹의 결과 종이의 결이 대결하고 있다.


신의 내지른 바 진리의 결과 인간의 내지른 바 진보의 결이 대결하고 있다. 때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기세의 부딪힘이 있고 때로는 서로 얼싸안고 춤추는 어우러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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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보전 현판


추사는 금석학을 연구해서 문자가 본래의 바탕이 되는 돌과 나무(죽간)와 종이의 결에 따라 전서와 예서, 해서로 변해왔음을 보고 나무의 성질에 맞는 현판글씨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도중에 화엄사에 들러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는 못마땅하게 여기더니 주지스님을 꾸짖어 떼어버리게 했다. 


10년 후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번에는 떼었던 현판을 도로 걸게 했다. 추사의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추사가 다시 본 원교의 글씨도 그 결기가 만만치는 않았다고 한다.


글자 안에는 글자가 없다. 천 자를 쓰고 만 자를 써도 글자를 쓰고 있어서는 명필이 될지언정 신필이 될 수 없다. 글자를 뛰어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자와 획이 모여 글자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종이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먹의 마음을 알아야 하며 또한 붓의 마음까지도 알아야 한다.


마침내 글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울림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제주도 유배 동안 추사는 마침내 여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나무와 돌에 결이 있듯이 또 종이와 붓과 먹에도 마음이 있듯이 각자는 자기의 영역을 나타내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동그라미다.


그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아내어 궁극적으로 그 동그라미를 완성시켜 가는 것이 곧 철학이다.



☞☞☞ 그런데 왜 추사는 유배되었을까? 그것은 정치의 결이다. 유배시절 동안 추사의 동그라미가 완성되므로써 비로소 붙잡혀 있던 정치의 동그라미에서 놓여난 것이다. 추사가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게 한 뜻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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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릴 지브란의 우화


한 호젓한 뜨락에 장미꽃, 나리꽃, 백합꽃들 만발하여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낮고 어두운 구석자리에 청초한 제비꽃 한 송이도 피어 있었다.


착한 제비꽃이 그 파란 입술을 열었다.


“아 신은 나를 작고 보잘 것 없게 만드셨어. 키 큰 꽃들 사이에 하늘은 가리워졌고 햇님을 바라볼 수도 없어.”


화려한 장미가 제비꽃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는 모르고 있지만 네게도 향기와 아름다움이 있어. 자신을 낮추면 높아지고 스스로 높이면 몸을 망친다는 걸 알라구.”


착한 제비꽃은 슬퍼졌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비참한 사람을 위로한답시고 던지는 충고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오 하느님 저의 간청을 들어주세요. 단 하루만이라도 장미꽃이 될수 있다면.”


하느님이 착한 제비꽃의 기도를 들었다.


“나의 어린 제비꽃아. 너는 본래 겸손하고 온유하였다. 욕심이 생겨 정신이 흐려졌구나. 필시 후회하게 될 것인데도.”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자 제비꽃은 어느새 장미꽃으로 변해 있었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세찬 비바람을 퍼부었다. 꽃들은 줄기가 부러지고 뿌리가 뽑혀나갔다. 남은 것이라곤 구석자리에 몸을 낮춘 제비꽃들 뿐이었다.


수다쟁이 제비꽃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폭풍이 저 오만한 꽃들을 어떻게 했는지 보렴. 우리는 키가 작아서 볼품 없지만 하늘의 벌을 받진 않았어.”


그들은 장미가 되려했던 욕심 많은 제비꽃도 발견했다.


“저 거만한 가짜 장미를 봐. 제비꽃의 분수를 모르고 날뛰던 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기억해두는 게 좋을걸.”


장미가 되었던 착한 제비꽃이 죽어가면서 마지막 힘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우물안 개구리처럼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아남아서 겨울의 죽음을 기다릴 수 있겠지만 그것은 비겁한 안도에 지나지 않아. 단 하루였지만 나는 장미였었고 우주의 진실을 보았어. 나는 하늘과 태양과 친구였었고 너희들이 밑바닥에서 별들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단 하루동안이지만 천년보다도 값있었어.”


그는 죽었지만 얼굴은 신의 미소를 담고 있었다.


이 우화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거기에 전광석화 같은 깨달음이 있음은 물론이다.


봉건시대의 우화들은 계급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대부분의 이솝우화 역시 그러하다. 그 대부분은 방자하게 날뛰는 하인들과 아랫것들의 분수 모르고 상전에게 기어오르기를 꾸짖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스스로 위대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해서 안 된다.



펭귄이 열 마리 모이면 그 중 한 두 마리는 경찰펭귄이 되어 무리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펭귄들이 특별히 경찰펭귄을 선발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펭귄은 역할이 주어지면 곧 경찰펭귄이 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잘난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공동체의 편에 설 수 있다.

뛰어난 펭귄이 되라고 말하지 않겠다. 모든 펭귄이 기회가 오면 경찰펭귄 노릇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듯이 인생에 한번쯤은 일생을 건 모험에 도전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고독하게 신과 대면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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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 세상


부엌에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면 싱크대 뒤쪽에는 몇 마리의 바퀴벌레가 숨어 있는 것일까?


어떤 교사 한 사람이 학부모로부터 촌지를 받았다면 그 학교에는 몇 명의 촌지교사가 있는 것일까?


흔히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킨다고 한다. 대다수 선량한 교사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맑은 물에는 미꾸라지가 살지 못한다. 미꾸라지는 흙탕물에만 산다. 그 한 마리 미꾸라지의 존재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흙탕물의 존재가 문제인 것이다.


알아야 한다. 우연히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면 싱크대 뒤쪽에는 최소한 30마리의 바퀴벌레가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부패는 구조적인 요인으로 하여 발생한다. 귤 상자에 들어있는 100개의 귤들 중 하나가 썩었다면 이틀 내로 나머지 귤 전체가 썩는다.


방송가에 PD와 관련된 스캔들 보도가 요란하다. 정치인들의 부패와 관련된 추문도 끊이지 않는다. 하나의 암세포가 발견되었다면 그 부위 전체를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요지경은 영화가 도입되기 전에 유행한 것으로 돋보기로 속을 들여다 보게 만든 작은 상자이다. 요지경 상자 안에 작은 인형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인형들은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것인데 옛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잘도 속아넘어가곤 했던 것이다. 언제쯤 우리는 신의 요지경을 벗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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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


우리는 빛의 반대가 어둠이라고 생각한다. 천만에. 어둠은 밝음의 반대이다. 그렇다면 빛의 반대는 무엇일까?


빛의 반대는 없다.


우리는 선의 반대가 악이라고 착각한다. 천만에. 악은 선의 실패일 뿐이다. 선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악이 선과 대등한 위치에서 비교될 수는 없다.


빛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빛의 두 아들인 밝음과 어둠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선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선은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반면 악은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절대선은 분명히 있지만 절대악은 없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증오는 사랑의 실패일 뿐이다. 참된 사랑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동전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동전의 양면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결코 거짓은 진리의 반대가 아니다. 거짓은 언제라도 진실의 실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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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족들


왼쪽 가슴의 포켓에는 손수건이 약간 보이도록 나와 있어야 한다. 팔소매는 셔츠 끝자락이 살짝 보여야 한다. 시선이 표적을 향하여 다가가는 데도 단(段)이 필요한 것이다.


넥타이와 손수건과 셔츠 끝자락은 시선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신사라면 하나쯤 명품을 소지해야 한다. 신사의 명품은 사교모임에서 낯선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데 있어서의 접근성을 높이는데 필요한 단이 된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고급차에 명품 양복에 명품 넥타이에, 명품 구두, 명품 시계, 명품 만년필 등 온통 명품으로 도배를 했다면 어떨까?


아무리 부잣집이라 해도 대문은 하나여야 출입할 수 있다. 단은 하나여야 한다. 출입문은 하나여야 한다.


신사라면 멋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멋부리기의 목적을 모른다면 우스울 뿐이다. 신사의 멋은 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올 수 있게 유도하는 하나의 단으로 유의미한 것이다.


마음의 단(段)이 존재해야 한다. 내 마음의 접속코드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한껏 열어제친 하나의 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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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예상보다 빠르다


어렸을 때는 30년 후에 어른이 되면 집집마다 로봇이 보급되어 파출부의 일을 대신해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아직 로봇다운 로봇은 구경하지 못하고 있다. 변화는 예상보다 느린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200년 전 증기기관이 발명되었을 때다. 왜 당장 증기자동차와 증기오토바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고무 타이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어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기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발명도 한두 가지 사소한 장애에 막혀버리는 일이 있다. 타이어가 발명되자 당장 산업의 중심이 기차에서 자동차로 옮겨갔듯이 이 작은 장애가 극복되었을 때 변화는 매우 빠르게 일어난다.



세상이 생각보다 느리게 변하고 있다고 해서 안이하게 대처할 일은 아니다. 신은 언제나 우리를 놀래켜 줄 준비를 하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만 해도 그러하다. 우리를 놀래켜주기 위해 예비해 둔 신의 다음 카드들 중 하나였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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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기


백인이 인디언들에게 술을 가져다주자 인디언사회는 곧 무너져 버렸다. 정작 그들에게 술을 가져다 준 백인사회는 날마다 술을 마시면서도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청나라는 영국인의 아편공세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약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디언은 술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그 사회가 약한 사회였던 것이다.


아랍사회나 북한이 서구문명을 비난하는 것은 서구문명의 타락상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사회가 그만큼 취약하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뭘 하고 있어?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지 않고”


소설가 장정일의 말이다.


‘술 먹지 말라’, ‘이성교제 하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머리 염색 하지 마라’ 등등의 지나친 개입은 그 사회를 약화시킨다. 문학인은 그러한 세상의 금기들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더 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중요한 건 애초에 다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 인간을 복원해낼 수 있는가이다. 상처 입은 인간의 복원이야말로 문학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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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바위 얼굴


“왜 나를 쳐다봅니까? 나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니오. 나는 다만 이렇게 지켜서서 언젠가 나타날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는 사람이란 말이오. 바위는 저쪽에 있소. 저쪽으로 가보시오. 휴우!”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큰 바위얼굴을 기억하는가? 신이 당신 앞에 나타나 말을 걸어오는 찰나 당신은 이렇게 말하곤 했던 것이다.


“왜 나를 쳐다봅니까? 나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니란 말이오.”



예수는 그런 식으로 부인하고 도망가지는 않았다. 예수가 신일 수는 없지만 신은 언제라도 예수일 수 있다. 당신이 큰바위 얼굴일 수는 없지만 큰바위 얼굴은 바로 당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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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기획


문명의 기획가들이 모여 각자 아이디어들을 내놓고 있었다. 혹자는 피라밋의 높음을 말하였고 혹자는 만리장성의 길이를 말하였다.


“인류문명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BC 2000년경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태인들을 데리고 나온 성공사례 이후 구원의 개념은 서구문명사에 있어 가장 큰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4000년 후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모세의 성공사례에 자기의 아이디어를 더하여 혁명이라는 기획안을 제출하고 있다.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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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예수와 석가는 인류의 매력적인 두 스승이다. 예수와 석가가 소크라테스와 공자보다 인격적인 측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가는 다른데 있다.


예수와 석가의 개인적인 행적보다는 그들로 하여 만들어져온 2천년 역사의 무게에 경의를 표할 일이다.


예수와 석가가 이루어놓은 가치들보다 그분들이 이루려다 마저 이루지 못한 가치들에 더 마음을 둔다.



예수와 석가는 위대한 미완성자들이다. 그들 이후 역사는 그들이 기획하였으나 마저 이루지 못한 것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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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부스와 신대륙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콜롬부스 이전에도 신대륙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11세기경 북해의 바이킹들이 그린랜드를 거쳐 먼저 왔다. 신대륙에는 지금도 바이킹들의 유적이 남아있다. 아니 그보다 인디언들이 수만 년 전에 먼저 왔다.


그러나 신대륙 발견의 영광은 콜롬부스에게 돌아간다. 왜냐고? 전모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이킹들과 에스키모들 인디언들은 그저 미지의 어떤 곳에 닿았을 뿐이다.


문명권과 문명권의 만남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콜롬부스가 최초의 발견자인 것은 분명히 평가되어야 할 사실이다.



전모를 보아야 한다. 나무를 보아서 안되고 숲을 보아서도 안 된다. 손가락 끝을 보아도 안되고 달을 보아서도 안 된다. 그 가리키는 사람과 가리켜지는 달 사이에서 배달하고 배달 받는 의미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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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은


그대의 눈 앞에 있는 은을 취하겠는가 아니면 천리밖에 있는 금을 취하겠는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그대는 당연히 천리밖에 있는 금을 택할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시험에 들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은을 취하게 된다. 정치인들이 그러하고 주식투자하는 사람도 그러하다. 결코 조삼모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언제라도 1년 후에 있을 확실한 10배의 이익을 버리고 오늘 1프로의 작은 이익을 취한다.


인간에게는 오류인줄 알면서도 그 오류를 답습하는 방법으로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학습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눈 앞의 은을 취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지만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하여 조금씩 배워 가는 학습본능 때문에 그것이 습관이 되어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된다.



어리석은 자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거듭하며 배우고 또 배워서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나란 인간은 주식투자를 하면 안 되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재산이 날아가고 난 다음이다.


배우고 깨우치려는 그 버릇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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