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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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017 vote 0 2008.12.29 (12:5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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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개인


문명세계 바깥의 야만한 세계가 있다. 한 젊은이가 원시의 마을을 떠나 문명세계와 접촉하였다. 젊은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원주민의 말로 문명세계에 존재하는 자동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모두가 쉽게 이해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문명인의 말로 자동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모두가 그 말을 믿었다. 다만 아무도 자동차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정신차렷! 이런 식이다.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면 도리어 믿지 않는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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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논술문제


‘당신은 어느 대기업의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어느 중소기업에서 개발한 것을 훔친 기술임을 알게되었다면 당신은 회사를 위해 음모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해고를 감수하고 양심선언을 할 것인가?’


이런 논술문제가 모 신문에 입시생들을 위한 연습문제로 제출되었다. 그대라면 어쩔 것인가?



운명의 한 순간에 인간은 이런 식으로 신과 만난다. 당신은 잘 훈련된 병사처럼 신과 포옹하기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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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에 갇힌 어린이


그대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화재가 난 승용차를 발견하였다. 두 명의 어린이가 차에 갇혀 있었는데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다. 당신이 달려가서 그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당신이 그 문을 열어주려는 찰나 누군가가 외쳤다.


“안 돼! 그 자동차는 지금 폭발하려고 해! 당신도 죽어”


그 한순간에 당신은 그 자동차의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설 것인가?



인간의 시간은 24시! 25시는 인간의 시간이 다하고 난 다음에 오는 신의 시간. 그 한 순간이 곧 신을 만나는 순간이다.


결정권은 신이 가지고 있다. 당신은 잘 훈련된 병사처럼 태연하게 그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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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우주비행사


우주정거장에서 사고가 났다. 그 우주선에는 한 명의 우주비행사가 승선하고 있었다. 그 비행사가 살기 위해서는 우주선을 지구로 추락시켜야 한다. 우주선이 지구로 추락하면 핵연료가 폭발하게 되고 지구는 파괴된다.


지구를 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지구에서 비상 스위치를 작동하여 그 우주비행사를 죽이는 방법 뿐이다.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비상 스위치를 눌러 그 우주인을 죽이겠는가 아니면 그러한 위험을 알려주고 우주 비행사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겠는가?



인류는 이런 식으로 신과 대면한다. 대통령이 비상 스위치를 작동시켜 우주비행사를 살해하고 지구를 구한다면 신은 또 한번 실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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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소년이 소녀를 만난다. 소년이 소녀에게 아끼는 장난감을 준다. 소녀는 소년이 준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소년은 주었던 장난감을 도로 빼앗는다. 소녀가 울음을 터뜨린다.


아빠가 소년을 꾸짖는다.


"너는 왜 순이에게 주었던 장난감을 도로 빼앗니?"


소년이 말한다.


"순이는 장난감만 가지고 놀아. 나랑 놀아주지 않아"



정신차렷! 이것이 바로 지금 그대의 모습이다. 순이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일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네가 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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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 예수 


예수도 그의 고향 마을에서는 환대 받지 못하였다. 이웃들은 다투어 말하였다.


"저 젊은이는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형제인 예수가 아닌가? 어제까지는 우리와 같은 이웃이었는데 없던 지혜와 능력이 그 사이에 어디서 생겼단 말인가?”


그들은 그 갑자기 바뀌어버린 역할에 당황하였다.



정신차렷! 바로 그것을 보라! 역할을 하려들므로 변경된 역할 앞에서 그들은 당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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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렷 


사격 연습을 해본 사람이라면 '정신차리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있다. 표적을 똑바로 응시한다 해서 총알이 똑바로 날아가 주는 것은 아니다.


가늠자와 표적 사이에 가상의 일직선이 있다. 그것을 차렷으로 정렬시켜 일여(一如)가 될 때 정신이 차렷된다.



능한 사수는 1초만에 정신을 차린다. 2초가 걸린다면 이미 호흡이 흐트러진다. 1초만에 가능하지만 1초만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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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배의 양심


불량배가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간다. 누가 먼저 어깨를 쳤는지 시시비비를 논하자고 한다.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다.


불량배의 목적은 행패를 부리는 것이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릴 일이지 복잡한 절차를 지켜가며 시비를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심을 속이기 위해서다. 남을 속이기 앞서 자신의 양심을 기만하는 작업부터 착수하고 보는 것이다. 불량배에게도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정신차렷. 바로 그것을 보라. 타인에 대한 부당한 간섭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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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기


명상의 목적은 신과의 소통에 있다. 신이 느끼는 것을 그대가 느껴야 한다. 신이 슬퍼하는 것을 그대가 슬퍼해야 한다. 신이 기뻐하는 것을 그대가 기뻐해야 한다. 신의 고독을 그대가 고독해 하여야 한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창조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신과 가깝다 할 것이다.


그들은 시인이거나 소설가이거나 발명가이거나 모험가이거나 예술가들이다.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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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걸기


당신이 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을 때.



생각하라! 신이 그대에게 말을 걸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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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에서


일천오백 년 전 문자를 배우지 못한 신라의 한 장인은 서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으로 자기 자신의 얼굴을 황룡사 용마루 치미기와에 새겨 넣었다.


그 유명한 신라의 미소다.


“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키가 다섯 자나 되는 이 큰 기와는 내가 만들었다오.”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일천오백 년 전의 그와 대화할 수 있다. 명상은 신과의 대화다. 신과 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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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파산


최초에 신전에서 무당의 신탁이 있었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종교의 제의가 대중 앞으로 이끌어져 나와 올림푸스 신전 앞에서는 스포츠가 되었고 원형극장에서는 연극이 되었다.


어느 해 극단이 파산하자 배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희곡작가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었고 코러스는 가수가 되었고 소품담당은 화가가 되었고 막간배우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모든 장르의 예술은 태고적 무당의 신탁이 변형된 것이다. 모든 예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신과의 교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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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를 끼우는 문제


자동차에 비유하면 시동을 거는 문제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키는 가지고 왔는가?”


키가 없다면 시동을 걸 수 없다. 키를 찾았다면 이제 구멍을 찾아서 키를 끼우고 돌려볼 수 있다.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린다.


구멍을 찾아 끼우는 문제인데 거기에 어찌 엑스터시와 오르가즘이 없겠는가? 무릇 아름다운 것, 감동적인 것들은 한결같이 구멍을 찾아 끼우는 문제와 연결되곤 한다.


신사가 양복에 단추를 끼우든 혹은 한 떨기 장미꽃이 꽃가루받이를 하든 혹은 축구시합에서 첫 골을 넣든 그 아가리를 제대로 찾고서야 울림과 떨림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천지창조`에는 아담과 하느님의 손가락이 맞닿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접속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명상도 이와 같다. 첫 출발, 첫 시작, 첫 키스. 무릇 창조는 그 어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접속으로부터 시작된다. 거기에 울림과 떨림이 있다. 부르릉 하고 시동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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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혼자 울지 않는다


냇가에서 혼자 놀던 아이가 유리조각을 밟아 발가락을 베인다. 시뻘건 피가 두 발가락 사이에서 펑펑 쏟아진다. 아이는 겁에 질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마구 울어댄다.


그 순간이다. 사위는 적막한데 자신의 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처음 듣는 소리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아이는 울 수 없다. 그만 울음을 그쳤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집까지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다친 발을 끌며 힘겹게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눈물이 폭발한다. 장수가 전장에 나아가 큰 공이라도 세운 양 의기양양해서 엄마 앞에 자랑스레 상처를 내보이면서 목청이 터지도록 울어제낀다.


나의 일곱 살은 그러하였다.



아이는 혼자일 때 울지 않는다. 울다가도 혼자임을 알고는 그만 울음을 멈춘다. 엄마 품에 안기고서야 서럽게 서럽게 울어제낀다.


어리광이다. 자신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설정하기다. 진정 혼자임을 알았을 때, 아무도 지켜보지 않고 있음을 알아챌 때 그대는 결코 울 수 없다.


그대는 지금 불평하고 있다. 도무지 누가 지켜보고 있길래 그대는 그리도 서럽게 울어대는가? 저도 모르게 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신 앞에서 그대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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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예술가


“예술가는 남들보다 키가 20센티는 더 커야 한다.”


어느 화가가 한 말이다.


맞는 말이다. 군중 속에서 20센티만 더 커도 이 무리가 어디로 움직여가고 있는지 흐름이 보이고 길이 보인다.



예술가라면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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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면의 그대에게


교양인의 에티켓 중의 하나가 초면인 사람과 종교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격렬한 논쟁이나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신당동에 산다. 떡볶이 골목 동화극장 앞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흑석동 어딘가에서 석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자를 만나기 위해 광화문 가는 버스를 탈 수도 있지만 구파발행 지하철을 타고 노자를 만나러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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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연습


어느 시골 조용한 전통찻집에 걸려있는 목판에 새긴 글귀가 이렇다.


“씨부리지 마라.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면 무슨 대화를 해야 할까?


대화는 종종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로부터 시작되어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끝을 맺곤 한다.



문득 대화를 멈추고 정적을 음미할 수 있다. 부러 그러한 상황을 연출해놓고 지켜보는 감독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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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구합니다


길거리의 담벼락에 나붙은 구인 포스터를 본다.


“사람을 구합니다.”



신의 구인 포스터를 본다. 신은 언제라도 사람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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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소인


소인은 자신이 그 자리에서 빠지면 일의 진행이 안되도록 상황을 설계해 놓는다. 모든 사람이 그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길 때 그는 만족한다.



군자는 자기가 그 자리에 없어도 일이 잘 돌아가도록 상황을 조정해 둔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필요 없는 사람으로 여길 때 그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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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포도주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서는 입으로 가져갈 수 없다. 반드시 몇 방울의 포도주를 흘리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약간 모자라는 것이야말로 맞춤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 신이 우리의 삶에 개입할 여지를 위해 5밀리의 여유는 남겨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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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의 지저귐


아침을 깨우는 참새 떼의 지저귐이나 공원에서 만나는 비둘기의 구구거리는 소리나 혹은 비 그친 후의 청명하니 맑아진 날씨나 하다 못해 산책길에서 어쩌다 마주치게 되는 개미떼의 행렬이라도 그대의 관찰범위를 벗어나 있다면 신은 슬퍼질 것이다.



신이 창조한 것은 대개 그런 하잘것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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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현자


언덕 위에 서 있는 현자가 있었다.


“저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람 좀 보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나 봐.”

“그는 아마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닐까?”


궁금해진 사람들이 몰려왔다.


“실례지만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냥 이 언덕에 서 있다오.”


하고 예수는 말하였다.



인간이 메시아를 기다리기 전에 메시아가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이 미륵을 기다리기 전에 미륵이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이 신을 갈구하기 앞서 신이 오래도록 인간을 갈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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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깨달음은 인연을 깨닫는 것이다. 인연 안에서 내가 네고 네가 내라는 사실을 깨닫기다.


깨달음은 그대의 삶을 지켜보는 신의 시선을 자기도 모르게 의식하고 그 시선 앞에서 나도 모르게 역할하는 방법으로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한 익숙한 역할극을 통하여 지켜보는 신의 시선 앞에서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다.



선(禪)문답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발언에 대꾸하여 응수하는 방식으로 주어진 배역에 따라 역할하고 있음을 노출시키기다.


선(禪)은 진리는 응수하는 것이 아니라 배달하는 데 있음을 깨닫기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의 발언에 맞서 응수하려 들어서 안 되는 것은 역할하려 하는 즉 그것은 지켜보는 신 앞에서의 어리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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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가기


초등학교 1학년 첫 봄소풍을 기억하나요? 손수건 왼쪽 가슴에 달고 설레는 마음으로 등교하였던 초등학교 1학년 첫 수업의 그날을 기억하나요?


첫 가을 운동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요? 첫 직장에 첫 출근하던 그날을 지금도 기억하나요? 


사랑하는 연인과의 첫 키스를 기억하고 있나요? 새집으로 처음 이사온 날의 흥분되었던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나요? 


그 첫 번째의 날은 당신도 잘 해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첫 키스를 추억함


첫날은 잘 해내었습니다. 두 번째 날부터 꼬이기 시작했던 거죠. 컴퓨터의 에러라면 리셋을 눌러 재부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 끼운 두 번째 단추를 풀지 못하고 번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언제든지 그 첫 번째의 날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상이란 언제든지 확 비워버리고 그 처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기입니다.


“정신차렷!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잘못을 발견했을 때 그 순간에 딱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정지시키고 마음의 리셋을 눌러 의식의 재부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정신차리기 연습입니다.


첫 소풍의 그날을 그대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당신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출근 날을 그대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인과의 첫 키스를 그대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정신을 차립니다. 그 처음으로 돌아가는 훈련이 필요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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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불가에 천 칠백공안이 있다고 하지만 조주선사의 문답한 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뜰 앞의 잣나무로다.’ 이 하나로 압축된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나머지는 이 하나의 문답을 다양하게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근본은 곧 석가와 가섭의 주고받은 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이심전심(以心傳心)에 있다.


이를 달마조사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열여섯 자로 풀어보인 것이다.


열여섯 자도 많다. 더 압축하면 직지인심(直指人心) 하나이다. 더 줄이면 심(心)자 하나로 요약된다. 나머지는 이 하나의 글자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심(心)이란 무엇인가? 곧 성(性)에 대해서 심(心)이다. 성(性)은 무엇인가? 요소를 말한다. 요소란 무엇인가? 사물을 이루는 바탕이 되는 원자 알갱이다.


무엇인가? 세상을 이루는 근본이 원자냐 아니면 관계망이냐다.


석가는 사성계급으로 대표되는 즉 성(性)의 차별을 주장하던 바라문교를 반대하며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관계망의 세계관을 창안하였으니 곧 인연(因緣) 혹은 연기(緣起)다. 이를 구체화 한 것이 곧 심(心)이다.


오해해서 안 된다. 여기서의 심(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이나 욕망 혹은 정서를 말함이 아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풀이하면 틀렸다. 전혀 그렇지 않다. 심(心)은 핵심(核心) 혹은 중심(中心)을 의미한다. 곧 센터(center)와도 같다. 두 날개를 거느린 하나의 코어(core)이다.


축(軸)으로 표현할 수 있다. 굴대(axis)와도 같다. 심(心)은 그 관계망의 그물 속에서 종횡으로 엮어진 하나의 매듭을 의미한다.


도(道)로 표현할 수 있다. 도(道)는 사방 팔방으로 이어져 있다. 심(心)은 그 도로 위에 서 있는 하나의 정거장이다. 또는 길과 길이 만나는 네거리이기도 하다.


세상은 도(道)라는 이름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통한다는 견해가 곧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그 네트워크의 작용을 석가는 인연(因緣)으로 설명한 것이며 그 인연과 인연이 만나는 심심상인(心心相印)의 정거장이 곧 심(心)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은 곧 인간 개인이 그 네트워크 안에서 하나의 강한 중심축이 된다는 뜻이다. 개개인이 모두 도(道)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하나의 정거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착각해서 안 된다. 심(心)이 인간의 욕망이나 분노 혹은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마음 곧 감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천하(天下)라는 이름의 관계망 안에서 그 겉이 아닌 속,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의미한다.


심(心)은 연필의 심이나 볼펜의 심과도 같다. 재목(tree)이라면 변재(邊材)가 아닌 심재(心材)가 된다. 그것은 타오르는 촛불의 심지와도 같다.


그 깊숙한 속을 의미한다. 물리로는 무게중심 혹은 운동의 중심이며 또 힘의 중심이 되기도 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심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업무에서는 본부(本部)이기도 하며 군대라면 상황실이고, 사령탑이며 자동차라면 엔진이고, 선박이면 브리지이며, 인간의 몸이라면 명령을 내리고 의사를 결정하는 두뇌가 곧 심이다.


이를 구태여 심(心)으로 표현하는 뜻은 곧 울림과 떨림이 전달되어 소통하고 공명하는 성질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척결되어야 할 것은 분별과 그 분별에 기초한 차별이다. 모든 분별은 성(性)의 구분으로 하여 일어난다.


사람을 성별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또 인종에 따라 구분하고 계급이나 지위나 학력으로 구분하는 것이 곧 성(性)에 따른 구분이다.


그 모든 차별과 분별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곧 심(心)이다. 또 논리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성(性)은 분별 위주의 귀납법이요 심(心)은 통합 위주의 연역법이라 할 수 있다.


성과 심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두 가지 태도, 곧 두 가지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구분하면 성은 더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가깝고 심은 더 유기체적인 세계관에 가깝다.


심(心)의 참된 의미는 전체와 더불어 공명(共鳴)한다는 데 있다. 하나가 움직이면 곧 모두가 움직인다. 한 사람이 분노하면 곧 모든 사람이 분노하고 한 사람이 웃으면 곧 모두가 즐거워한다.


아기가 웃으면 엄마도 웃고 아빠도 웃는다. 온 가족이 다 같이 웃는다. 오호라. 그것은 무엇인가? 곧 소통이다. 그렇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말한 바 ‘뜰 앞의 잣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언어와 문자라는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은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인 소통을 의미한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붙잡혀 있는 것은 그 울림과 떨림이 전달되지 않는다.


아기가 웃어도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웃지 않는 사람이 있다. 형제가 울어도 냉철한 표정을 지으며 울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왜?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붙잡혀 있는 것은 심(心)이 아니라 변(邊)이다. 변은 더 큰 어떤 것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더불어 공명하지도 못하는 것이며 이에 소통하지 못한다.


변의 주변됨을 극복하고 심의 중핵에 이르러야 한다. 붙잡히지 말고 독립함으로써 가능하다. 직지인심의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고립을 피하여 공동체라는 이름의 관계망, 천하(天下)라는 이름의 관계망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천하와 더불어 공명할 것이다. 천하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되고 나의 기쁨이 곧 천하의 기쁨으로 된다. 그렇다면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다. 뜰 앞의 잣나무를 가리킬 수 있다. 궁극의 일자(一者)가 가리키는 최종결론은 소통이다. 네가 내고 내가 네다. 그렇다면 우리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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