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앞의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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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637 vote 0 2008.12.29 (12: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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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장은 네거리에서


하일지의 소설은 아노미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멀쩡한 신사가 어느 날 장님이 쓰는 검은 안경을 쓰고 장님의 지팡이를 들고 장님처럼 살아보기다.


상궤에서 이탈하여 보면 상궤를 움직여 가는 논리가 보인다.


습관과 고정관념과 타성으로 굳어진, 어쩐지 그리 해야만 할 것 같은 당위. 그래야 마땅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어리광이다. 나는 그 안에 갇혀 있다.


아기에게 그것은 엄마의 품이다. 아기는 자신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여긴다. 무언가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타인의 시선을 내 세계 안으로 개입시킨다. 아기의 어리광이다.


점차 감정이 격앙된다. 엄마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내 안으로의 감정의 충전과정이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기어이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울지 말라. 왜 우는가? 부지불식간에 지켜보는 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 왜 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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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의 침몰


북극해의 차가운 밤바다에서 성채같이 거대한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해 가고 있었다. 여자와 어린이들은 보트로 구출되었고 남자들은 마지막까지 갑판 위에 남았다.


마지막 보트가 한 척이다. 빈 자리는 하나뿐인데 갑판에 남은 사람은 다섯이다. 그때 누군가가 말하였다.


“당신은 신사가 아니오?”


영국인이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당신은 영웅이 될 것이오!”


미국인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건 규칙입니다.”


독일인도 물 속으로 뛰어내렸다.


“남들은 이미 다 뛰어들었소.”


일본인도 물 속으로 뛰어내렸다.



민족성을 비교하는 유머를 말함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간의 사고를 더 윗선에서 규율하는 어떤 시선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 시선 안에서 그리도 어리광이었던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은데 그대는 도무지 누구의 시선을 그리도 두려워하며 혹은 자랑스러워하며 혹은 떳떳해 하며 또 부끄러워하였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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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의상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다. 어느 깊은 산 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에 목이 말라서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마셨다.


“해골이면 어떠랴. 일체유심조라 했거늘.”


그 한 순간에 깨달았다. 아니 깨달았다고 믿었다.


다음날 날이 밝았다. 과연 간밤에 물을 마신 바가지가 해골바가지였음이 확인이 된다. 구역질이 난다. 해골바가지에 비위가 상하여 구역질이 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골에 마음이 붙잡혀 있는 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환멸의 구역질이다.


갈증으로 죽음 앞에 서면 ‘해골이면 어떠랴. 만사 마음먹기에 달려있거늘’ 하고 의기양양할 수 있다. 기운을 차려 좀 살만하게 되니 구역질이 난다.


언제 깨닫는가? 어떤 사실을 알아채었을 때 깨닫는 것이 아니다. 배고플 때는 누구라도 강해질 수 있다. 궁지에 몰리면 누구라도 용기를 낸다.


진리에 굶주렸을 때는 누구라도 깨닫는다. 허나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 모든 깨달음이 안개가 바람에 부산하듯이 사라져버렸을 때 지켜보는 신의 시선 앞에서 그 모든 지적 허영심의 어리광을 깨고 진정으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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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순수하다


유치원의 꼬마 30명을 데려다 놓고 카메라테스트를 한다. 예닐곱 명이 합격한다. 꼬마들은 누구나 타고난 연기자이다.


초등학교 어린이 30명을 데려다 놓고 카메라테스트를 한다. 겨우 한두 명 정도가 연기자의 소질을 보인다. 


중, 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연기지도를 한다. 300명 전교생 중에서 단 한 명의 소질 있는 배우를 찾아내기 어렵다. 연기는 본래 매우 어렵다. 


어린이는 ‘나’를 연기한다. 왜나햐면 ‘나’는 배우이니까. 중고등학생은 ‘그’를 연기한다. 왜냐하면 ‘그’가 주인공이니까.



너는 나가 아니고 나는 너가 아니라는 어른들의 그릇된 확신을 깨부수기는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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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니체다. 


일찍이 임제선사는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천년 뒤에 온 니체가 신과 인사하고 임제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어찌 인연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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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화


목수 출신의 예수가 말했다.


“그가 우리를 불렀어.”


왕족 출신의 석가가 말했다.


“누구나 갈 수 있어. 우리는 반드시 가야만 해.”


남의 집 제삿상 봐주는 직업을 가졌던 공자가 말했다.


“일단 내가 먼저 저만치 가보고 돌아와서 길을 알려 줄게.”


시골 사람이었던 노자가 말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이는 선택과 선택권의 확인과 선택지의 배제와 선택권의 행사에 관한 것이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할 것이며 가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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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선사는 그렇다고 말한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도 말한다. 이때 제자는 ‘네 그렇군요’ 하고 맞장구를 치든가 아니면 ‘아니 어째서죠?’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선택지를 제공한 사람은 스승이다. 제자는 스승의 견해에 맞서 응수하는 형태로 스승이 제공한 선택지를 받아들여 역할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체험한 것을 그대가 이미 체험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경우에도 소통은 없다. 지식은 전달되는 것이지만 깨달음은 공명하는 것이다. 체험의 공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스승과 제자로 역할이 구분되고 또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대본이 주어지는 한 그런 식으로 분별되고 쪼개지는 한 그것은 참되지 않다.



바로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공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울림과 떨림으로 전파되어 널리 소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땅히 응수되는 것이 아니고 배달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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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의 잣나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로다.”



그대는 신이 될 수 없다. 신은 늘 그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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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의 방, 임제의 할


“야. 날씨 한번 좋구나!”


인사치레로 한마디 던지면 그 친구는 꼭 이런 식의 안티를 걸어오곤 한다. 


“오늘 날씨가 뭐 좋다는 말인가? 저길 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


내가 시큰둥하고 있으면 그 친구는 장장 30분간 열변을 토하며 오늘의 날씨가 좋지는 않은 날씨라는 것을 기어이 증명하려고 든다. 안티맨이다. 주위에 이런 친구 한 명 씩은 꼭 있다.


깨달음은 역할극을 깨부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역할 혹은 아내의 역할 혹은 제자의 역할 혹은 스승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무대에 선 배우처럼 익숙한 대본을 외우고 있는 것이다.


‘아차!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 하고 퍼뜩 깨달을 터이다. 말대꾸 전문의 그 친구는 스스로 안티맨의 배역을 자청하여 맡은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그 역할극의 재미에 빠져든 것이다.


그렇게 역할하고 있는 한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바로 그 역할극을 깨부셔야 한다.



덕산의 방(棒)과 임제의 할(喝)도 이와 같다. 덕산은 몽둥이로 대갈통을 때렸고 임제는 귀에다 대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정신차렷, 이 친구야. 난 단지 인사를 했을 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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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천 칠백 공안이 있다지만 실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이 하나의 화두가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를 변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조개가 진주를 품은 뜻은 그 내 안의 상처인 진주를 배척하기 위함이듯이 그대가 조사를 찾는 뜻은 조사를 버리기 위함이다.


조개가 진주를 버리려 하므로 버리지 못하듯이 그대는 조사를 버리려 하므로 버리지 못한다.



인간은 역할 하려 든다. 지켜보는 신의 시선 앞에서 어리광이다. 신은 인간에게 그 역할을 버리라고 한다. 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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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이창호


옛 사람이 이르기를 효성(曉星)에는 계단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초단은 수졸(守拙)이니 근근히 지켜낸다.

2단은 약우(若愚)이니 어리석으나 패기가 있다.


3단은 투력(鬪力)이니 힘이 강하다.

4단은 소교(小巧)이니 작은 꾀를 낸다.


5단은 용지(用智)이니 지혜를 사용한다.

6단은 통유(通幽)이니 깊이가 그윽하다.


7단은 구체(具體)이니 판의 전모를 본다.

8단은 좌조(坐照)이니 앉아서도 훤히 본다.


9단은 입신(入神)이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대는 바둑을 처음 발명한 사람에게 몇 단을 수여할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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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시대


석가의 제자 500비구 중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다. 육조 혜능의 제자들도 모두 깨달았다.


깨달은 제자들은 스승의 품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명산을 찾아 절을 짓고 주지가 되었다.



모든 산, 모든 계곡에 절이 그득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새 절을 지을 산이 바닥났다. 그 후 불문에 깨닫는 사람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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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혹은 업보


아기가 물웅덩이에 빠졌다. 누가 먼저 달려가겠는가? 엄마가 가장 먼저 달려가고 동네 사람들과 구조대원들과 신문기자가 그 뒤를 쫓는다.


인생은 연극이며 각자는 배우다. 그들은 남편이나 아내의 배역을 연기한다. 그들은 어른이나 아이의 역할도 소화해내곤 한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자신이 어떤 배역을 맡았는가가 결정한다.


인간은 옳거나 그름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배역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그 성공의 여부는 세상의 중심과 관계맺기에 성공할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한다. 그러므로 바른 판단과 바른 결정 이전에 세상과의 바른 관계맺기가 더욱 중요하다.



인연이라고 하고 업보라고도 한다. 그 세상의 중심에서 신과의 관계맺기에 성공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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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할머니


당나라 때 일이다. 스님을 뒷바라지하던 보살 할머니가 있었다. 이십 년 동안 한결같이 정성으로 스님을 모셨다.


하루는 할머니가 딸을 시켜 수행 중인 스님의 암자로 들여보냈다. 노파의 딸은 시킨 대로 스님을 껴안으며 물었다.


“스님, 지금의 심경이 어떠합니까?”

“고목이 찬 바위에 의지하니 한겨울에 온기가 없다.”


노파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이십 년 동안 공양해 온 것이 이런 속물이었단 말인가.”


노파는 곧 스님을 내쫓고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고 한다.



신이 문득 그대를 껴안으면 그대는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종로 2가에서 혹은 가리봉동 오거리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 깨달음의 의미는 소통에 있다. 네가 내고 내가 네이므로 불립문자하고 직지인심할 수밖에 없다. 스님의 대꾸는 이미 문자이고 기호이다. 그 안에 분별이 있고 역할이 나눠졌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시선 앞에서의 어리광이다. 이심전심의 이치를 그르친 즉 소통은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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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수


명사수는 3초 이내에 조준하여 사격한다. 이미 3초가 지났는데도 쏘지 못했다면 방아쇠에서 손을 떼고 처음부터 다시 조준하여야 한다.


개머리판 견착, 호흡정지, 조준선 정렬, 정조준, 방아쇠 격발로 이어지는 1사이클의 전개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깨달음도 이와 같다. 3초 안에 이 1사이클의 전개과정을 완성시키지 못하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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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당신이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봉착하였다면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대개 과학이 만들어낸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로 위에서 자동차의 시동이 꺼졌다거나 혹은 실내에서 전구가 수명이 다했다거나 하는 문제들은 대개 과학이 만들어낸 문제들이다. 



과학으로 과학이 만들어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이 제출한 문제들은 누가 해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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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울음


대웅전의 부처님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다. 


그대 죽어본 일이 있는가?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적이 있는가?


그 한순간에 웃음이 터져나오던가 아니면 눈물이 터져나오던가?

웃음이어야 진짜이겠는가 울음이어야 진짜이겠는가?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을 가진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신이 전지전능하듯이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면 그 한 순간에 당신은 웃을 것인가 아니면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소설가는 웃지 않는다.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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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예수


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사라마구는 한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비난 받았다. 작품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예수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라마구가 묘사한 예수는 전혀 고상하지도 않고 기품있지도 않다. 뒷골목의 건달과도 다르지 않다. 마리아에게 애걸하여 동정을 바쳤는가 하면 죽음을 앞두고는 흔들리기도 했다.


생각하라! 신이 문득 그대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그때 신이 어떤 옷을 입고 와야 그대의 마음에 흡족하겠는가?


신이 찬란한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면 그대는 정장차림으로 예의를 다하여 신을 마중하여야 할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 상황에 걸맞는 격조있는 정장을 누구로부터 빌어 입으려는가?



그대는 신이 될 수 없지만 신은 종종 그대가 된다. 문득 신이 그대가 될 때 그대는 지금 그대의 모습 그대로 신의 모습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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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


예수는 기도하였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석가는 열반 유훈에서 말하였다.


“나의 뜻이 아니라 그대 스스로의 뜻대로 그리고 진리의 뜻대로 하라.”(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노자는 그의 도덕경 첫머리에서 말하였다.


“나의 입으로 말하여지는 도가 아니라 도 그대로의 도이어야 한다.”(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셋은 다르게 말하였으나 그 의미는 같다.



진리도 이와 같다. 인간의 뜻에 따른 진리가 아닌 진리 그 자체의 뜻에 따른 진리를 보아야 한다. 신도 이와 같다. 인간이 생각해낸 신이 아닌 신 자신의 뜻에 따른 신을 증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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