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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555 vote 0 2014.09.03 (13:48:43)

 

    자유의지와 집단의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철학의 역사는 이 하나의 물음에 다양하게 답해온 역사다. 그런데 질문이 잘못되었다. 인간에게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이 있는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자유의지는 막연한 표현이다.


    철학의 답변은 영혼≫이성≫권력의지≫실존설≫무아로 다양하다. 최종적으로는 무아다. 자유의지가 되었던 의사결정권이 되었던 그것이 개인에게 있는게 아니라 팀에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아니라 집단의지다.


    영혼≫이성≫권력의지≫실존설≫무아로 발전할수록 사고의 범위가 확장된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나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렇다. 인간 행동의 최종적인 근거는 내 안에 들어있는 어떤 알맹이나 엑기스나 신묘한 기운이 아니라, 내 바깥에서 주어진 미션이다.


    집단과의 반응성이다. 그것이 존엄이다. 인간의 근거는 사회로부터 주어진다. 양파를 까서 뭐가 나오는게 아니라 씨앗을 심어 꽃이 핀다. 한 인간이 인류를 대표하여 의사결정할 때 존엄의 꽃은 피어난다.


    ◎ 종교의 영혼설.. 신체를 까면 영혼이 나온다.
    ◎ 칸트의 이성설.. 마음을 까면 이성이 나온다.
    ◎ 니체의 권력의지.. 사회를 향한 권력의지가 나온다.
    ◎ 샤르트르의 실존.. 미묘한 사회관계 안에 뭔가 있다.
    ◎ 노자의 무아설.. 인류의 대표성이 나온다.


    영혼설은 종교가 지어낸 거짓이지만 어쨌든 인간 행위의 최종근거를 모색한 것이다. 뭐가 됐든 거기에 뭔가 있어야 한다며 답이 들어갈 포지션을 지정했다. 수학으로 치면 빈 칸이라도 답칸을 만들어 놓은데 의미가 있다.


    칸트의 이성은 종교의 영혼 개념을 고상한 용어로 대체한 것 뿐이다. 이성 개념은 두 가지 전제를 가진다. 첫째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다. 둘째 개인은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단위다. 그런데 두 전제가 모두 의심되어야 한다는게 함정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고 개인은 의사결정의 단위가 아니다.


    ◎ 이성의 실패 –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개인은 의사결정 단위가 아니다.


    니체의 권력의지설은 집단의 의사결정권을 모색한 점에서 핵심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개인에 집착하고 있다. 집단을 대상화, 타자화 하는 점에서 소승적 태도이다. 니체는 자본의 이윤동기나 심리의 칭찬동기와 마찬가지로 집단의 권력동기를 포착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개인의 동기가 아니다.


    권력은 근대문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며 부족민의 자연상태가 아니다. 개인이 집단 안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우쭐대고 싶어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소아병적인 태도이다. 니체 개인의 콤플렉스를 반영한 것이라면 주관적 1인칭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샤르트르의 실존설은 반대로 개인의 권력적 동기를 배제하고 사회관계에서 답을 찾는다는 점에서 보다 진일보한 사유다. 자본의 이윤동기나 심리의 칭찬동기나 니체의 권력동기나 다 집단무의식의 작용에 따른 어설픈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샤르트르는 포착한 것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도 알고보면 권력욕의 화신이 아니라 집단의 광기에 휩쓸려 어쩔줄 모르는 불쌍한 삐에로에 지나지 않음은 까뮈는 알아챈 것이다. 그것이 실존개념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안개 속에서의 희미한 모색일 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인간 행위의 진정한 동기를 그들은 찾아내지 못했다.


    집단의 소집


    영혼은 없다. 이성은 약하다. 듣기좋은 말에 불과하다. 막연히 그런게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심리적 당위에 불과하다. 권력의지도 없다. 자연상태의 부족민들은 권력획득에 무관심하다. 이성이든 권력의지든 사회관계 안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받은 미션이다.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호출되었을때 그 부름의 목소리에 내가 반응한 것이다.


    자연의 답은 에너지고, 사회의 답은 권한이고, 개인의 답은 존엄이다. 자연의 에너지에서 사회의 권한을 도출하고, 다시 거기서 개인의 존엄을 유도한다. 그것이 집단의지다. 집단의지는 한 개인이 인류의 대표자가 되는 것이다. 개인이 환경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하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는다.


    아기가 엄마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기는 사실 엄마에게 바라는게 없다. 단지 엄마가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 아기는 엄마를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엄마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차라리 엄마를 잊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엄마가 곁에 있어야 엄마를 잊을 수 있다. 지갑에 돈이 있는 사람은 돈걱정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은 돈을 잊는 것이다.


    ◎ 자연의 동기(에너지) - 돈을 바라는 이윤동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 사회의 동기(권리) - 평판을 바라는 칭찬동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 개인의 동기(존엄) - 대표성을 바라는 집단의지는 획득하려 한다.


    인간은 돈을 원하고 칭찬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지만 사실은 거기서 벗어나 자유롭기를 원한다. 인간은 좋은 사회적 포지셔닝을 원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선배, 좋은 이웃이 되어 높은 평판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이 아니다. 진정으로 말하면 그런 눈치보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원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밀도높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대표성이다. 인간은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악기는 오케스트라 안에서 합주 하기를 원하며 그 연주를 멋지게 성공시키기 원한다.


    아기는 엄마가 옆에 있기를 원한다. 노인은 손주들이 방문해오기를 원한다. 성인은 뉴스에서 소외되지 않기를 원한다.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인간은 사회의 유행, 트렌드, 소문 따위의 흐름들에서 소외되지 않기를 원한다. 계절의 변화를 충분히 느끼기 원한다.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려는 것이다.


    많은 돈을 가지거나, 친구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받거나, 권력을 틀어지면 조금이라도 의사결정의 중심에 다가설 수 있다. 또 섹스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해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짜는 아니다.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도리어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게 인간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신과의 일대일이다. 좋은 북은 살짝 건드려도 소리가 난다. 인간은 살짝 건드려도 모두가 아는체 해주기를 원한다. 돈이나 칭찬이나 권력이나 쾌락은 불안한 사람이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돈이나 평판이나 권력이나 쾌락에 집착한다면 그는 불안한 것이다. 불쌍할 뿐이다.


    인간은 영혼이나 이성이나 권력이나 소유나 쾌락에 근거하는 동물은 아니다. 인간 행위의 최종근거는 연속성이다. 세상은 모두 다 연결되어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존재한다. 돈이든 평판이든 권력이든 쾌락이든 전부 하나로 연결된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은 곧 세상을 연주할 수 있다.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존엄으로 만나라


    의지는 허상이다. 마음 안에서 답을 찾는다면 가짜다. 내 안에서 사랑의지가 갑툭튀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게 아니다. 미녀를 보았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반응한 것이다. 북 안에서 소리라는 권력의지를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북을 해부해도 소리를 찾을 수 없다. 북 안에는 영혼도, 이성도, 권력의지도 없다. 큰 소리는 큰 만남에서 나온다. 존엄은 큰 만남이다.


    흔히 의사결정의 최종근거로 자유의지를 말한다. 자유의지는 개인을 집단에 앞세우는 소승적 표현이다. 양파를 까서 그 안에서 뭘 찾아내겠다는 발상이다. 그꾸로 그 양파를 심어야 꽃을 얻는다. 개인을 인류에 심어야 집단의 대표성을 얻는다. 개인이 멋대로 꼴값을 떤다면 자유의지가 아니라 겁먹은 것이다. 무대에 오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존엄은 자유에 앞선다. 존엄은 집단을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사신이 전권대사의 직함을 가지고 외국에 가서 마음대로 외교를 하더라도 먼저 국가의 대표성을 얻은 다음에 외국에 가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전쟁에 출정하는 장수는 먼저 왕으로부터 보검을 하사받아 지휘권을 획득한 다음에 전장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전투를 하는 것이다. 대표성이 없고 지휘권이 없으면서 막연하게 자유의지를 외친다면 북채를 잃은 북, 당목을 잃은 종, 리드를 잃은 기타와 같아서 소리를 내지 못한다.


    존엄은 환경과 만나 긴밀해지는 것이며, 자유는 존엄을 얻은 다음에 말할 수 있다. 존엄이라는 총에 자유라는 총알이 장전되는 것이다. 총이 없는 판에 총알로 어찌 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이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은 동시에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로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이 논쟁이 끝나지 않는다. 천년전부터 철학자들이 자유의지를 두고 논쟁해 왔는데 아직도 답을 내지 못했다면 애초에 언어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방향이 다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다. 틀렸다. 개인에서 출발하여 이웃, 사회, 국가, 세계로 범위를 확대하면 양파껍질을 까는 것과 같아서 나오는 것이 없다. 그 끝은 허무다. 반대로 세계에서 출발하여 사회, 이웃, 나로 좁혀오면 맥락이 발견된다. 꽃이 열매를 호출한다. 라디오를 까면 뭐가 나올까? 없다. 라디오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거꾸로 방송국이 라디오를 호출하는 것이다. 방송국을 심으면 라디오가 나온다.


    개인에서 천하로 발전하는게 아니라 천하가 개인을 호출하는 것이다. 범종은 당목을 호출하고, 북은 북채를 호출하고, 고수는 소리꾼을 호출하고, 감독은 배우를 호출하고, 기수는 말을 호출한다. 내 안에서 사랑이 갑툭튀 하는 일은 없다. 천하의 사랑에 내가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사랑하기 앞서 한 천하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를 발견하지 못한 고승덕의 딸사랑은 가짜다. 천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거짓말이다. 개인의 권력의지는 노자의 무아설을 받아들여 내 안에 없고 우주의 권력의지가 내게로 송출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과의 일대일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천하로부터 내게로 송출되므로 그것은 집단의지다. 그것이 존엄이다.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최종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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