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치료하려면 수술을 해야 한다. 수술은 직접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다. 의사결정에 대해서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에서 한 마디씩 거들고 있으나 대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간접적 접근이다. 환자를 앞에 두고 주술사를 불러 푸닥거리나 하는 수준이다. 의사가 손을 쓸 의사결정의 몸통은 자연의 의사결정 메커니즘 그 자체다. 의사결정학의 대의는 도덕적 당위나 종교적 목적이나 정치적 신념과 같이 의사결정의 몸통과 거리가 먼 주술적 접근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물物 자체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이다. 먼저 물리적으로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를 조직하고, 다음 판단과 실행이라는 의사결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먼저 고장난 자동차를 수리하고 다음 의사결정이라는 자동차의 운전기술을 늘려가야 한다. 자연에서는 에너지의 동적균형을 따르고, 사회에서는 권리≫권력 메커니즘을 따르고, 개인의 내면에서는 바깥환경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존엄원리를 따를 때 의사결정의 전제가 충족된다. 이로써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술이 완료되고 이제 운전기술만 익히면 되는 셈이다. 이에 반해 에너지가 없이, 권리가 없이, 존엄이 없이 함부로 난입하여 호통을 치는 식이라면 과학이 아닌 주술의 방법이다. 20세기의 철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은 여전히 이 지경이다. 운전할줄 모르는 사람이 자동차를 앞에 세워놓고 준엄하게 꾸짖는 판이다. 과학의 방법론에 근거한 의사결정학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의사결정의 딜레마는 일반의 의사결정 회피다. 개인은 의사결정을 집단의 상부구조에 떠넘기려는 사회적 본능에 조종된다. 치과에 가기 싫어하는 환자처럼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행동경제학이 물질적 보상이나 칭찬요법 따위의 이윤동기나 심리동기를 제안하나 이는 어린이를 사탕으로 꼬셔서 치과에 데려갈 수 있다는 식이라서 여전히 주술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유무형의 보상이 아니라 집단과 긴밀한 유대를 맺어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답은 밑바닥을 관통하는 에너지 흐름에 있다. 집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본능을 역으로 찔러 개인이 주도적으로 팀을 결성하고 에너지를 조달함으로써 의사결정에 성공할 수 있다. 자연의 에너지영역, 사회의 권리영역, 내면의 존엄영역에서 각각 느슨해진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긴밀하게 조직함으로써 집단의지를 도출하는 것이 의사결정의 운전기술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