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이유는 인간의 의사결정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인 때가 많기 때문이다. 밑바닥 에너지가 결정한다. 에너지는 토대를 장악하는 데서 얻어진다. 개인은 토대를 장악하지 못하므로 집단을 이룬다. 인간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합리적 결정이 아니라, 소속집단을 위한 자기희생적 결정인 경우가 많다. 개인을 위한 합리적 결정은 대개 불가능하다. 밑바닥 에너지가 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도 땅도 태양도 비도 내것이 아니다. 개인은 애초에 결정권이 없다. 개인은 결정권이 없으므로 결정권을 획득하는데 주의를 기울인다. 결정권은 집단에서 얻어진다. 그 집단이 결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많은 경우 집단의 실체가 모호하므로 의사결정은 집단의 존재를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한 주도권 경쟁이 된다. 그것이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되도록 기 포지션에 서려는 포지셔닝 경쟁으로 나타난다. 그 과정은 소모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인간의 비합리적 포지셔닝 경쟁은 허세부리기, 우쭐대기, 허례허식, 과시행동, 체면세우기, 마녀사냥, 군중심리, 집단히스테리로 나타난다. 전쟁이야말로 그 비합리성의 극치라 하겠다. 이는 개체의 생존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실체가 모호한 집단의 존재 자체를 구체화하려는 행동이다. 친구든 동료든 가족이든 부족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 모호한 집단의 실체를 명백히 하려고 하며 그 방법은 집단에 긴장을 불어넣는 것이다. 집단을 긴장시키는 방법은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말을 하고, 심술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고 훼방을 놓는 청개구리 행동인 경우가 많다. 그 결과로 개인이 다치게 되지만 집단에 약간의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래서 어김없이 양치기소년은 나타난다. 인간은 집단 안에서 의사결정권자가 되려고 한다. 타자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집단이 결성되어 있어야 한다. 결성하고자 하는 집단의 실체가 모호할 때 파시즘적 일탈이 일어난다. 파시즘은 민족이라는 모호한 의사결정단위 위에 더 큰 의사결정단위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이다. 말하자면 권위적인 세계정부다. 평화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다들 잊어버렸지만 양차 세계대전의 광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한 마을에서 여러 명의 소년이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자살했는가 하면(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의 증언) 호주에서는 소년이 나이를 속여 1차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영화 갈리폴리) 전쟁을 하고 싶어서 다들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원래 집단을 결성하는데 열성적이다. 독일의 나치나 소련의 혁명이나 마찬가지로 정복을 계속해서 세계규모 의사결정단위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다. 만약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면 교육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교육자인 지식인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디를 보더라도 그럴 기미는 없다. 우리의 현대사는 지식이 패배를 거듭해온 기록이다. 지식 위에 넘사벽이 있고 그 너머에 깨달음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이다. 개인이 언제라도 인류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시작한 근대과학은 처음부터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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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학은 비합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