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발언으로 일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영국 일간 가디언이 11일(현지시간) 교황과 마르크스주의자 친구의 인연을 소개했다.
저술가 우키 고니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1953년 즈음 화학 실험실 조수로 일하던 10대 후반의 교황과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생화학자인 30대 중반의 여성 에스테르 카레아가는 실험실에서 만났다.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후로 오랫동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차이를 넘어 특별한 친구로 지냈다.
파라과이에서 맹렬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아르헨티나로 정치적 망명을 한 카레아가는 독재 체제였던 아르헨티나에서 1977년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해 바다에 내버려지던 시절이었다.
납치되기 얼마 전에 카레아가는 죽어가는 친척의 마지막 의식을 치러달라며 교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황이 카레아가의 집에 도착하자 카레아가는 '전화로는 진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면서 자신의 책들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카레아가의 딸은 "부모님에게는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에 관련된 정치적인 책이 많았고 엄마는 교황에게 책을 부탁하셨다"고 말했다.
그런 책들을 갖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시절이었지만 교황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카레아가는 악명 높은 해군기술학교에 끌려가 잔인하게 고문당한 뒤 살해당했다. 구금시설로 활용된 해군기술학교는 5천 명이 수용됐지만 생존자가 겨우 20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대표적인 인권탄압 시설이었다.
2005년이 되어서야 카레아가는 함께 납치됐던 활동가들과 함께 바닷가의 이름 없는 묘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한 활동가의 아들이 이들의 시신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홀리 크로스 성당 공원에 묻을 수 있는지 물으러 교황을 찾아왔고, 교황은 카레아가의 시신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를 듣자 감정에 북받쳤다.
교황은 "카레아가는 좋은 친구이자 어머니였고 당신의 어머니도 그랬을 겁니다"라며 요청을 허락했다.
기고자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자 일간지에서 일하던 시절 카레아가와의 인연이 있다. 당시 신문사에는 자식을 납치당한 어머니들이 넋이 나간 채로 찾아와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는데 카레아가 역시 납치되기 몇 달 전인 1977년 7월 신문사를 찾아왔다.
16세인 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는데, 딸을 구출해 스웨덴으로 망명시키고 나서도 카레아가는 계속 신문사를 찾아왔다. 기고자가 이유를 궁금해하자 그녀는 "납치된 모든 아이들을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 마음구조: 복수는 나의 것?전통시대 아비의 원수를 죽여서 복수하는 일은 효자의 당연한 의무였다. 물론 사적인 복수행위는 금지됐고 국가의 공권력에 의하도록 법제화됐지만, 공권력은 그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원수를 갚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복수는 효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제시됐고, 법을 어긴 민간의 사적인 복수 행위가 칭송되기도 했다. 그 한 예가 김성일 형제의 복수사건으로, 이에 대해 송시열(1607~1689)은 '복수전'을 지었다.
전하는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담양에 사는 김성일은 무과에 응시하러 서울에 가 있었다. 그런데 숙부 김세민의 노비 금이가 세민의 아내와 간통했다. 세민의 형이자 성일의 아비인 준민은 금이를 죽이려고 했는데, 이를 알아챈 금이가 제 아비와 동생을 데리고 도리어 밤에 준민을 습격해 참혹하게 살해했다. 이때가 인조 7년(1629년)이다.
이 소식을 듣고 돌아온 성일은 동생과 장사도 미루고 틈을 엿보다 저잣거리에서 노비 금이와 그 부모를 쳐 죽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목을 자르고 간을 도려내어 식구를 시켜 빈전에 매어 달도록 하고는 자신은 그 즉시 관가로 가서 자수해 투옥됐는데, 임금인 인조가 그 효성과 의리를 가상하게 여겨서 특사했다.
송시열은 말한다. '김성일이 무부출신으로 경전을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원수를 갚았으니, 이는 복수설치의 대의를 안 것이다. 더구나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장사조차 지내지 않은 채 원수를 찾아 저잣거리를 헤매었으니 이는 군부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복수설치의 대의를 실천한 것이다. -노컷뉴스 고전의 향기 서정문 고전변역원 수석연구위원
3. 스타일이 답이다: 이발소에서는 머리만 깎자-이발소 그림 무엇이 문제인가?
4. 충격 대예언-올 겨울 일기예보
우리는 항상 선택 앞에 놓인다. 한 가지 길의 선택은 가지 않은 많은 길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약초를 연구하기 위해 찾아온 UCLA 인류학과 학생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멕시코의 야키족 인디언 돈 후앙은 말한다.
"그 어떤 길도 수많은 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너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걷다가 그것을 따를 수 없다고 느끼면 어떤 상황이든 그 길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 자신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다. 너 자신에게 이 한 가지를 물어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다면 그 길은 즐거운 여행길이 되어 너는 그 길과 하나가 될 것이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길을 걷는다면 그 길은 너로 하여금 삶을 저주하게 만들 것이다. 한 길은 너를 강하게 만들고, 다른 한 길은 너를 약하게 만든다."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담겨 있다면 자신이 걷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시사구조론: 올해의 인물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과 마르크스주의자 친구의 우정
친구는 1977년 아르헨서 납치돼 피살(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발언으로 일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영국 일간 가디언이 11일(현지시간) 교황과 마르크스주의자 친구의 인연을 소개했다.
저술가 우키 고니가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1953년 즈음 화학 실험실 조수로 일하던 10대 후반의 교황과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생화학자인 30대 중반의 여성 에스테르 카레아가는 실험실에서 만났다.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후로 오랫동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차이를 넘어 특별한 친구로 지냈다.
파라과이에서 맹렬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아르헨티나로 정치적 망명을 한 카레아가는 독재 체제였던 아르헨티나에서 1977년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해 바다에 내버려지던 시절이었다.
납치되기 얼마 전에 카레아가는 죽어가는 친척의 마지막 의식을 치러달라며 교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황이 카레아가의 집에 도착하자 카레아가는 '전화로는 진짜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다'면서 자신의 책들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카레아가의 딸은 "부모님에게는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에 관련된 정치적인 책이 많았고 엄마는 교황에게 책을 부탁하셨다"고 말했다.
그런 책들을 갖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 곧 '죽음'을 의미했던 시절이었지만 교황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카레아가는 악명 높은 해군기술학교에 끌려가 잔인하게 고문당한 뒤 살해당했다. 구금시설로 활용된 해군기술학교는 5천 명이 수용됐지만 생존자가 겨우 20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대표적인 인권탄압 시설이었다.
2005년이 되어서야 카레아가는 함께 납치됐던 활동가들과 함께 바닷가의 이름 없는 묘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한 활동가의 아들이 이들의 시신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홀리 크로스 성당 공원에 묻을 수 있는지 물으러 교황을 찾아왔고, 교황은 카레아가의 시신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를 듣자 감정에 북받쳤다.
교황은 "카레아가는 좋은 친구이자 어머니였고 당신의 어머니도 그랬을 겁니다"라며 요청을 허락했다.
기고자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자 일간지에서 일하던 시절 카레아가와의 인연이 있다. 당시 신문사에는 자식을 납치당한 어머니들이 넋이 나간 채로 찾아와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는데 카레아가 역시 납치되기 몇 달 전인 1977년 7월 신문사를 찾아왔다.
16세인 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는데, 딸을 구출해 스웨덴으로 망명시키고 나서도 카레아가는 계속 신문사를 찾아왔다. 기고자가 이유를 궁금해하자 그녀는 "납치된 모든 아이들을 위해 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2. 마음구조: 복수는 나의 것?전통시대 아비의 원수를 죽여서 복수하는 일은 효자의 당연한 의무였다. 물론 사적인 복수행위는 금지됐고 국가의 공권력에 의하도록 법제화됐지만, 공권력은 그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원수를 갚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복수는 효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제시됐고, 법을 어긴 민간의 사적인 복수 행위가 칭송되기도 했다. 그 한 예가 김성일 형제의 복수사건으로, 이에 대해 송시열(1607~1689)은 '복수전'을 지었다.
전하는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담양에 사는 김성일은 무과에 응시하러 서울에 가 있었다. 그런데 숙부 김세민의 노비 금이가 세민의 아내와 간통했다. 세민의 형이자 성일의 아비인 준민은 금이를 죽이려고 했는데, 이를 알아챈 금이가 제 아비와 동생을 데리고 도리어 밤에 준민을 습격해 참혹하게 살해했다. 이때가 인조 7년(1629년)이다.
이 소식을 듣고 돌아온 성일은 동생과 장사도 미루고 틈을 엿보다 저잣거리에서 노비 금이와 그 부모를 쳐 죽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목을 자르고 간을 도려내어 식구를 시켜 빈전에 매어 달도록 하고는 자신은 그 즉시 관가로 가서 자수해 투옥됐는데, 임금인 인조가 그 효성과 의리를 가상하게 여겨서 특사했다.
송시열은 말한다. '김성일이 무부출신으로 경전을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원수를 갚았으니, 이는 복수설치의 대의를 안 것이다. 더구나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장사조차 지내지 않은 채 원수를 찾아 저잣거리를 헤매었으니 이는 군부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복수설치의 대의를 실천한 것이다. -노컷뉴스 고전의 향기 서정문 고전변역원 수석연구위원
3. 스타일이 답이다: 이발소에서는 머리만 깎자-이발소 그림 무엇이 문제인가?
4. 충격 대예언-올 겨울 일기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