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의 원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그림의 답은 강간범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만족스런 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묻는 것은 사회적 관점이 아니라 구조론적 관점입니다.
인간이 사회화된 동물이고,
사회화란 그 사회가 만든 룰의 지배를 받는 다고 보면
강간범은 사회화가 덜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룰보다 강간범의 본능적인 힘이 또는
강간범이 쌓아 온 명예가 룰의 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고
약자에게 본능의 힘을 휘두르는 것이
강간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폭행범이 강한 사람을 폭행하는 경우는 없다.
약자에게만 그렇게 한다.
인류의 이상을 만나지 못하고, 현실속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니
욕망이 조절이 안되어 순간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쉬운 상대를 골라 성범죄를 저지른다.
자신이 인류의 대표임을 자각해야 한다.
상대방을 강간하는 순간 자신을 강간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주체이지 대상일 수 없다. 대상으로 취급하는 순간 인격체로서의 존엄을 잃는다.
사회학적인 관점이나
계몽주의적인 관점을 버리고
구조론적인 관점으로 보아 주십시오.
경찰의 커피믹스 절도사건의 경우는
경찰도 피해자라며 경찰을 두둔하는 의견이 많더군요.
그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성범죄자도 피해자겠네요?
전두환, 이명박도 피해자고, 고문경찰도 피해자고.
사람들이 굉장히 빠르게 기준을 바꿉니다.
아마 절도사건은 작은 사건이라서 경찰을 봐주고?
제가 보기에 경찰의 절도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범죄입니다.
당연히 경찰청장이 옷을 벗어야겠죠.
성폭력을 표면적으로 보면 개인이라는 사회적 의사결정의
최소단위가 오히려 사회의 방향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때문에 이를 지켜보는 사회구성원들은 대부분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성폭력범이 성폭력에 관한 의사결정을 내렸다고
전제를 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더 들여다보면 이는 성폭력범 개인이 사회에
역행하는 의사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사결정을
포기했다고 보아야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달리는 기차안에서 멈춘 기차를 보면 마치 멈춘 기차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의사결정을 포기해버린 개인은 외부적 자극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방향이 본인의
의사결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자극에 의해 움직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엔진이 멈춰버린 차는 밖에서 미는 사람들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폭행범은 외부 자극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폭행을 하겠다는 의사결정을 자신이 내린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삶이 의사결정을 포기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행범은 억울합니다.
의사결정을 한 게 죄지 포기한 게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항변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므로 성폭행범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맨위의 하루님의 말씀처럼
사회안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성폭행범 자신은 그러한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포기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킵니다.
따라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회에 그 책임을 전가하게
됩니다.
헌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생각의 구조이자 반응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복잡한 거 싫어하며, 그놈이 어차피 다 그놈이야
하며 판단을 유보해버린 이 땅에서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구조와 닮아 있지 않나요?
때문에 성폭행이란 사회의 보수화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생각일 뿐이죠.
지가 그래놓고 어디다 떠넘기냐고 반응하거나
저게 인간이가? 하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성폭행범에게 성폭행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자면 성폭행범이 성폭행을 저지르게
하지 않으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이라는 의사결정
단위를 회복시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려면 극형이라는 단절보다는 그 자신이 사회의
의사결정단위라는 얽힘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의사결정 스트레스 < 의사결정의 즐거움
결국 그가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받는 스트레스 보다
그의 의사결정이 무언가를 창출하고 그 창출을 통해
커뮤니티 안에서 그의 포지션을 확신받는 즐거움을
그에게 훈련시키는 것이죠.
때문에 성폭행이 증가한다는 것은 개인이 사회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의사결정을 포기한다는 것이므로
사회 보수화의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 얽힘보다는 단절을 강압하고
의사결정의 즐거움보단 의사결정의 스트레스를 개인에게
부가하고 있단 사실입니다.
때문에 사회의 보수화가 개인의 보수화로 전이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죠. 이른바 자신들의 누나나 여동생의
벌거벗은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일베의 확산같은...
하지만 이럴수록 의사결정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개인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랍이라면 여성에게 차도르나 부르카를 쓰게 하고
차도르나 부르카를 쓰지 않으면 성폭행을 허용하는 표시라고 간주합니다.
창녀의 표시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러므로 그 지역을 여행하는 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집트도 상당히 위험하고.
그쪽 사람들의 논리는 여성이 성폭행을 허용하는 표지를 내걸었기 때문에
성폭행이 증가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거기서 설문조사를 하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탈레반이 없었을 때는 여성들이 외출을 못했는데
탈레반 덕분에 여성들이 외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르카는 써야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원인은 상부구조의 직접원인가 하부구조의 간접원인이 있는데
직접원인은 성폭행범에게 있지만 간접원인은 하필 그 시간, 그 장소, 그 사람인가에 있습니다.
여성 두 사람이 밤길을 간다면 범죄자는 노출이 심한 사람을 선택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것을 사건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원인이든, 직접이든 간접이든, 진짜든 가짜든 뭔가 말만 되면 된다고 여기므로
문장의 형식만 갖춰주면 되니깐.. 그걸 원인으로 쳐버립니다.
성폭행범은 부족민입니다. 가족민이나 개인민이 아니라는 거죠.
즉 부족주의가 성폭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범죄자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관계가 나쁘거나, 그 사람 개인의 예의나 교양도 나쁘다는 거죠.
그 사람들은 가족에서 심리적으로 축출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가족이 있든 없든
심리적으로는 가족을 찾아 헤매는 젊은 숫사자와 같습니다. 젊은 숫사자는
무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자기 가족을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못하면 굶어죽습니다.
문제는 한국특유의 지나친 가족주의가 가족형성을 막는다는데 있습니다.
구조론적 의미의 가족은 혈연집단이 아닙니다. 노무현은 운전기사도 같이 식사하고
심지어 공부해서 주사를 하게 했는데, 가족 이상으로 대우한 거죠.
당시는 운전기사는 변호사가 새벽 3시까지 술 마시면 밖에서 대기해야 하며
그동안 다른 운전기사와 짤짤이를 합니다. 노무현은 같은 술집에서 운전기사와
술마시는 정도를 넘어 심지뽑기로 자리를 정하는데 변호사들 가운데 끼웁니다.
운전기사는 매우 불편해지죠. 좌우에 다 변호사와 사무장이 앉아있으니.
결국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혈연가족이 아닌 유사가족이 증가하는 것이며
그 이상으로 개인화 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입니다.
성범죄가 일어나는 진짜 이유는 그 사회가 야만한 부족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범죄자의 무의식에 넌 무리에서 쫓겨난 숫사자야 너의 가족을 만들어 하고 지령이 떨어집니다.
착한 사람은 취직을 하거나 연애를 해서 가족을 만들겠지만 범죄자는 그렇지 않죠.
***
부족주의가 범죄의 원인이다. 부족주의는 범죄의 원인을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돌리며
사회에 긴장을 줄 의도로(잠재적인 전쟁상태의 유지) 어떻게든 범죄를 생산한다.
인간의 유전자에게는 부족본능이 있다. 일종의 어리광이다. '니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응수논리, 대칭논리를 가지며 그 논리에 맞는 표적을 찾는다.
개인주의는 범죄자의 부족논리에서 '네가 이렇게 하면'을 지운다. 상대가 어떻게
하든 자신의 행동은 자신에게 원인과 의도가 있어야 한다. 이는 교양되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대응, 사형을 확대하는 엄벌주의는 부족주의 잔재이며
부족주의는 사회를 잠재적 전쟁상태로 만들어 의사결정의 편의를 도모하고
은밀히 범죄를 양성한다.
범죄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범죄자의 진짜 의도는 사회를 긴장시키는 것이다.
어떻든 범죄자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은 범죄의욕을 고취시킨다. 미국에서는 범죄자의
이름을 보도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신문에 이름이 나는게 그들의 목적 중의 하나다.
좀도둑이나 발바리로 불리는 상습 성범죄자도 신문에 보도되는 것과 상관없이 스릴을
즐기는 것이며 거기에는 중독성이 있다. 그 중독성은 어떻게든 사회를 자극시켰다는
무의식의 판단 때문이다. 자신이 긴장해놓고 사회가 긴장되었다고 여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제가 말하는 부족은 아프리카의 혈연부족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형성된 패거리를 말합니다.
일종의 군중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질러서 사회를 자극시키는데서 쾌감을 얻습니다.
꼴통들이 선생님을 괴롭혀서 반응을 끌어내려는 퇴행행동인데
돌봐주는 사람이 잃으면 방에서 오줌을 싸는 애가 있지요.
이는 무의식의 명령이기 때문에 말로는 잘 해결이 안 됩니다.
관심을 끌려는 일베충들의 꼴통짓이 그렇습니다.
범죄자의 목적은 돈을 버는데 있는게 아니라
런던의 유명백화점에서 경찰이 보는 3미터 앞에서
유유히 귀부인의 명품백을 따는데 있습니다..
이건 옛날에 여러번 했던 이야기.
어떤 기자가 런던의 소매치기들을 인터뷰하여 얻은 결론.
꼴통들은 교실을 하나의 원시 생태계로 보고
교실 안에서 적과 아군을 만들어서 피아구분을 하는 방법으로
의사결정을 쉽게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너희의 적은 교실 안에 있는게 아니고
외부에 있다고 교양해야 합니다.
(어릴 때 우리학교는 도시 변두리라서 얼굴이 하얀애파와 꺼먼애파로 나누어졌음.
동네도 절에 다니는 윗깍단과 교회 다니는 아랫깍단으로 나누어져 대립함)
적은 북한에 있다고 하면 보수꼴통이고
적은 부자와 재벌이라고 하면 좌파꼴통이고
적은 야만이라고 하면 지성인이죠.
그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회에 대한 대칭행동으로 볼 수 있을까요?
저는 대칭행동을 외부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 보았는데 잘못 알았다면 관점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개인주의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행동합니다.
가족주의는 가족과의 협력을 위해
역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부족주의는 협력도 하고 반항도 하는데
협력반 반항반이면 대실패지요. 백퍼센트 협력이 정답.
부족주의는 장기적인 계획이 불가능하며
그때그때 현장에서 긴장을 조성하여 답을 찾아냅니다.
부족주의는 사회를 의사결정이 가능한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로 만들려고 하며
그 방법은 당근과 채찍을 교대로 쓰는 것입니다.
지금 박근혜가 국민을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철도노조와 전교조를 때려잡으면서 채찍을 쓰고 설날에 대사면을 한다고 당근을 내놓고.
가족과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면? 차라리 이혼하는게 맞지요.
한번은 싸우고 한번은 화해한다? 이건 아닙니다. 가족과는 단 한 번도 싸우면 안 됩니다.
박근혜 행동은 본능적 대칭행동인데,
국민을 상대로 어르기도 하고 뺨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을 길들이거나 소를 길들일 때는 어르고 뺨치는게 맞습니다.
외부의 적을 다스릴 때는 어르기와 뺨치기를 구사하는게 정답.
그런데 자기 자식을 어르고 뺨치면 안 됩니다.
자식 뺨을 왜 칩니까?
대칭행동은 의도가 있는 행동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 본능입니다.
자기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무조건 긴장을 유지하려고 하며, 좋은 짓과 나쁜 짓을 둘 다 하는데
좋은 짓만 해야지 나쁜 짓은 하면 안 됩니다.
대칭행동은 사건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단지 의사결정하기 편한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경우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무조건 5 대 5로 만듭니다.
반은 옳고 반은 그르면 곤란. 언제나 옳아야 합니다.
큰 단위까지 개인화 시키는게 사회화의 목적이죠.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긴밀하게 조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주의 대표자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경계하는 것은 명목상 집단이 결정한다고 속이는 겁니다.
공유라고 써놓고 실제로는 사유화 하는 거죠.
집단을 위하여는 거짓말이고 의하여가 맞으며 의할 수 있는 구조가 조직되어야 합니다.
집단에서 개인까지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막연히 집단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는 선언은 사기죠.
전체주의나 독재는 집단이 개인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공유라 써놓고 실은 사유화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가 봅니다.
저는 이번 대선에 충청도 사람이 망쳤다고 보는데(그 뿐만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자신에게 결정권을 주기 위해, 집단에 긴장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판을 50 대 50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항상 악당이 이깁니다. 그 심리를 악용하기 때문이지요.
50 대 50이 되면 부정선거 하는 사람이 항상 이깁니다.
적극적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50 대 50 상황은 은 여야 뿐 아니라 국민까지도 함께 일구어낸 실패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산만해진듯 해서
정리하자면 제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가족은 의사결정구조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교육받은 정도에 따라서 역시 그렇구요.
가족 역시 교육받지 못한 가족은 말이 가족일 뿐 의사결정구조가 없습니다.
부족사회에도 가족 비슷한건 있는데 확실한 의사결정구조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제가 말하는 가족주의, 개인주의는 교육받은 정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유교가 교육했고, 유태인의 가족주의는 탈무드가 교육한 거고
제가 말하는 부족은 의사결정구조가 없는, 일시적으로 모여있는 패거리입니다.
근데 정글의 부족민은 사실 의사결정구조가 없어요. 추장이나 족장은 백인의 환상이고
시팅불처럼 가만이 앉아있는 황소가 아무 말도 안해서 족장의 지위에 오릅니다.
의사결정 하는 용자는 제일 먼저 제거됩니다. 아니라면 벌써 국가로 발전했지요.
우리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교육받지 않은 부족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릅니다.
이는 역으로 현대문명 사회에도 무수히 많은 부족본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판단이, 사실상 유전자의 명령이며 무의식의 지배이며
부족의 관습이며, 무의식적으로 집단에 긴장을 거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거에요.
범죄자는 자신이 왜 범죄를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부족에 긴장을 주는 본능이
있습니다. 아무도 범죄를 안 저지르면 자기가 범정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아무런 의사결정구조가 없는 부족보다, 범죄자와 비범죄자, 선과 악, 강자와 약자
귀족과 천민, 남자와 여자로 이분화된 사회가 더 우월합니다.
틀린 결정이라도 일단 결정을 잘하는 사회가 낫습니다.
잘못된 결정은 전투 중에 바로잡히게 되어 있으니까요.
사회가 대칭행동을 통해 이분법적 차별구조로 가는 이유는, 그 사회가 더 경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시사회에서는 차별이 평등보다 더 우월한 사회를 만듭니다.
차별은 원시부족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지지만 현대문명사회에서는
망하는 거죠. 제로상태의 부족보다 잠재적 전쟁상태의 긴장된 부족이 더 낫고
잠재적 전쟁상태의 부족보다, 이성적인 문명사회가 더 낫습니다. 사회는 처음
아무것도 아닌 제로상태에서, 이분법적 차별상태로 가고 다시
그 차별을 시정하는 합리적인 사회로 가는 것이며, 그러한 차별은
상당부분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러한 본능을
이성적인 판단으로 착각해서, 계몽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게
본능이기 때문에 계몽이 안 됩니다. 그 경우는 제압을 해야 합니다.
이성의 사회가 본능의 사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실력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은 가족화, 개인화로 가능하며, 가족화는 사회관계를 긴밀하게 조직하는 것입니다.
요즘 협동조합 많이 하는 것도 일종의 그런 거죠. 회사의 창업, 동아리 활동
친구간의 친목.. 이런 것도 부족을 가족화 하는 행동으로 보아야 합니다.
원시사회는 부부가 있어도 부부가 서로 친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말도 안합니다.
부부간에 친하면 친구들이 비웃습니다. 팔불출이니 아내바보니 딸바보니 하지요.
우리나라도 부부간에 대화가 없는데 이건 사실 부족사회입니다.
대화없는 형식적 부부로 살기 보다는 이혼하고 대화하는 부부로 가는게 정답입니다.
더 많은 대화, 더 많은 친목, 더 긴밀한 관계를 위해
이혼도 불사해야 한다는게 제 주장입니다.
사회관계의 밀도를 높이는게 정답입니다.
우리사회,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그리고 그 사회의 스트레스 잘못해석한 강간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