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삶이라는 이름의 나무 한 그루 키우기’다. 그냥 일하고, 돈벌고, 사랑하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삶은 심지어 쥐도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인간다운 삶이 따로 있다. 타인에게 말붙일 자격이 있느냐다. 님이 글을 읽거나 내가 글을 쓰거나 간에 그것은 ‘타인에게 말걸기..!‘. 그 안에 일정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말 거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먼저 그 논리를 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았거던 그걸로 끝. 누가 물어봤냐고?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것이 어째서 ‘우리의 문제’로 되었느냐다. 삶이라는 이름의 나무를 거목으로 키웠을 때 우리의 문제가 된다. 삶의 나무를 키워야 한다. 그 방법으로 타인에게 다가서야 한다. 삶의 성장을 거부하고 머물러 있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소통할 수 없다. 글을 쓸 필요도 없고 글을 읽을 이유도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나무는 ‘사회-공동체’라는 이름의 대지 위에서 ‘진리’라는 이름의 햇볕을 먹고 자란다. 사회라는 이름의 대지 위에서 진리라는 이름의 햇볕을 공유함으로써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그렇게 우리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너는 듣는다. 너와 나는 서로의 내부로 침투한다. 그렇게 삶의 나무가 자라서 숲이 되고, 산이 되고, 우주가 되어야 한다. 위로는 키가 높아져서 진리의 태양에 닿아야 한다. 아래로는 뿌리는 내려서 공동체라는 대지 속으로 침투해야 한다. 마침내 신의 완전성에 닿아 우주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 내 안의 완전성을 낱낱이 토해내야 한다. 그렇게 낳음에 성공해야 한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의 나무는 자라서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그 지성인의 앎으로 가장 낮은 서민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최고에서 하늘의 지식과 최저에서 민중의 삶 사이에 사다리 하나 놓았다. 우리나라가 통째로 한 그루의 나무라는 사실 인식시켰다.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는 지식인의 물음이다. 그 삶의 나무가 자라서 진리라는 이름의 태양에 닿을 때 그 물음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것인가?’는 민중의 응답이다. 삶이다. 물음표와 느낌표다. 하늘은 묻고 대지는 답한다. 진리는 묻고 삶은 답한다. 지식인은 묻고 민중은 답한다. 그 사이에 구조가 있다. ?와 ! 사이에 구조의 저울 ┳가 있다. 둘 사이를 잇는 고리다. 무엇인가? 하늘의 진리를 인간의 삶 안으로 가져오기다. 노무현이 그 사다리로 해냈다. 위의 것을 아래로 가져왔다. 지식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삶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느냐만 탐구할 뿐이다. 그러니 답답해진 대중들은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기독교의 교회나 불교의 절에서, 유교의 제사에서 답을 찾는다. 실패다. ### 그 하늘과 땅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이다. 잇는 것은 고리다. ?는 고리모양을 하고 있다. 쇠사슬과 같은 연쇄고리다. 사슬 ∽∽∽∽를 토막내면 물음표가 된다. 물음과 대답, ?와 !의 대칭구조가 잇는다. 그것이 구조의 ┳다. 물음과 대답 사이에 밸런스가 있다. 자연의 작용과 반작용이다. 존재와 인식≫근거와 주장≫전제와 진술≫주어와 술어≫명사와 동사다. 물음표와 느낌표라는 고리다. ●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밸런스 ● 물음표와 느낌표 그리고 양자의 연결고리 ● 하늘의 진리와 인간의 삶 그리고 둘을 통일하는 삶의 나무 우리는 물음표와 느낌표라는 고리로 질문하고 대답하며 삶의 나무를 키워나가는 것이며 그 나무의 키가 자라서 하늘에 닿으면 진리가 얻어지고 그 나무의 뿌리가 내려서 공동체를 완성하면 삶을 완성한다. 그 하늘과 그 땅 사이에 낙차가 있다. 에너지가 있다. 그러므로 진보가 있다. 발전이 있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가 짝지어져 구조의 저울 ┳를 이룬다. 저울이 움직여서 포지션을 낳는다. 포지션에 의해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팀이 된다. 공동체가 된다. 사회가 된다. 우리는 서로 상관있게 된다. 타인에게 말걸기 자격을 얻는다. 물음표와 느낌표로 대칭된 그 하나의 사슬고리가 하나의 자동차와 같다. 고리는 물건을 걸어둔다. 고리는 저울이다. 저울은 물건을 달아올린다. 천칭저울의 접시에 올려서 태운다. 자동차가 승객을 태우듯이 태운다. 삶을 태우고 역사를 태우고 문명을 태우고 진보를 태운다. 태양은 빛으로 그림자를 태운다. 자연은 에너지로 생명을 걸어올린다. 역사는, 진보는, 진리는, 문명은 역시 그러한 묻고 답하기의 고리, 묻고 답하기의 밸런스, 묻고 답하기의 자동차다. E.H 카아 교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라고 말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묻고 답하기 사슬고리다. 산업의 혁신이 묻고 시대정신이 답한다. 문명은 ‘물질 ?’와 ‘문화 !’의 고리다. 그렇게 고리와 고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가장 높은 곳의 진리를 가장 낮은 삶으로 끌어와서 커다란 하나를 이루었다. 그 물음표에 그 느낌표로 대칭시킨 것이다. 밸런스가 맞아졌다. 가장 큰 에너지의 낙차를 얻었다. 우리말 ..‘까?’..는 물음표 ?와 마찬가지로 고리를 의미한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면 ‘까’ 소리가 난다. 그래서 무언가 걸리는 것을 ‘까’로 나타낸다. 물음표는 고리인 것이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할 때의 quo-가 우리말 ‘까’에 해당한다. quest, query, question, inquire. cause, 등에서 ‘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how, what, when, where, who 들에서 반복되는 wh-는 까의 변형이다. 석가는 이 물음표와 느낌표의 대칭구조 ┳를 수레바퀴로 표현한다. 법륜이다. 바퀴는 중심의 굴대와 바퀴살이 심 1과 날 2를 이룬다. 바퀴살 모양은 뿌리를 닮았다. 그래서 루트가 된다. 바퀴살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빛과 같다. 혹은 비와 같다. 그래서 빛-광선을 뜻하는 레이(엑스레이) 레이다, 빔, 라디오, 비를 뜻하는 레인의 어원이 되었다. 사방으로 뻗어가는 공통점이 있다. 진리는 마차의 바퀴살처럼 사방으로 뻗어가는 것이다. 사방을 망라하여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커다란 존재의 나무를 완성한다. 하나의 단위를 완성한다. 한 개인에서 한 인류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물음표와 느낌표가 짝을 지어 하나의 단위가 되는 것, 하나의 존재, 하나의 개체, 한 개. 그 하나를 완성할 때 이를 복제하여 우주도 건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의 완성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다. 그 하나 안에 물음표와 느낌표의 대칭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한 편의 소설, 한 곡의 음악, 한 상의 요리가 완성되려면 그러한 대칭이 있어야 한다. 밥만 주고 반찬은 주지 않는다면 하나가 미완성이다.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 존재와 인식, 근거와 주장,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가 물음표와 느낌표의 대칭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보통 소설가들은 그러한 대칭의 완성에 실패한다. 그들은 난감해지면 주인공을 죽인다. 주인공이 죽었으므로 이야기가 끝났다는 식이다. 불완전하다. 이름난 걸작들은 다르다. 대개 곤경에 빠진 주인공을 군중들이 몰려와 돕는 식으로 끝이 난다. 노무현이 그 절벽 위에 섰을 때 한국인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삵이 만주인 지주와 혼자 싸우러 갔을 때 역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몽룡이 마패를 꺼냈을 때 역졸들 달려오듯이 달려가야 한다. 물음표에 느낌표로 화답하여 소통을 성공시켜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99와 100의 차이를 아는가다. 전기회로가 99퍼센트 연결되어도 1퍼센트 단절되면 전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자동차만 있으면 완성이 아니라 승객도 운전자도 목적지도 운행도 있어야 완성된다. 계의 완성에서 빠져있는 하나를 찾아 완성해내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소속과 영역과 파트너와 포지션과 임무가 조를 맞춰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