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는 신비주의로 나가는 것이 좋다. 코엘료 마냥 ‘우림과 툼밈’ 어쩌구 하면 다들 좋아한다. ‘어머! 멋져. 멋져! 우림좋아 툼밈좋아.너무 좋아!’ 왜? 우림과 툼밈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사람들은 모르는걸 좋아하고 아는걸 싫어한다. 다 아는 언어로 하면 실망한다. 이성이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하면 ‘뭐야! 신통한거 없잖아!’하고 벌써 채널 돌린다. 등반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암벽에 리벳이 박혀 있다. 리벳 A와 리벳 B. 둘 사이의 거리 수 미터를 지름으로 해서 동그라미 하나 그려진다. 어떻게든 그 동그라미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동그라미는 선등자가 리벳을 박고 올라간 자취다. 초심자는 그 동그라미 밖에서 어떻게 해보려 한다. 작은 틈새를 찾아보기도 하며 손쉽게 조금 전진한다. 그러나 막혀버린다. 리벳 B로 옮겨가지 못한다. 정해진 루트가 있다. 절대적으로 그 공식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쉬운 코스라면 융통성을 발휘해도 되겠지만 난코스에서는 절대로 그러하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 역시 그러하다.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 신비주의로 가면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근본 막힘을 넘어가지 못한다. 용기있게 그 난관을 돌파하려면 어렵더라도 정도를 따라야 한다. 형이상학과 맞서기. ###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발달된 사회가 그 자체로서 개인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성을 가진다. 개인이 인격을 가지듯이 그 개인의 집합이라 할 사회에도 역시 ‘격’이 있다. 격은 소통의 레벨이다. 어느 수준에서 소통할 것인가? 인간 수준에서 소통하면 곧 인간. 짐승 수준에서 소통하면 짐승. 님이 거론한 인간의 근본속성, 곧 본성이란 그 인간의 소통 수준이어야 한다. 곰이 인간이 아닌 이유는 사람처럼 말을 못하기 때문. 말하는 곰이 있어서 인간사회의 진보에 영향을 끼친다면 웅인이라 할만하다. 말한다는 것이 곧 소통한다는 거. 소통하여 개인의 집합인 사회의 격을 만들어가는 거. 그 격은 역사와 전통과 관습과 문화들의 진보로 만들어진다. 진보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며 격이 없는 사회다. 동물사회는 진보가 없으므로 격을 논하지 않는다. 개체나 군집이 있을 뿐 사회가 없다. 인간의 사회성은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니까. 우물에 빠진 아기를 건져주려는 이유는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본래 선하다 악하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악은 상대적이므로 동전의 양면. 본성이 선하다는 말이 악하다는 말. 그게 그거. 물론 우물에 빠진 아기가 불쌍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재밌어 하는 꼬마도 있다. 어느 면에서 인간은 난폭하고 야만하다. 이 사나운 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속이기 없기. 불편한 진실 앞에서 눈감기 없기. 인간이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교양되어 왔기 때문. 원시부족사회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끔찍하다. 평화를 사랑하는 부족도 물론 있지만, 이웃부족사람 목 하나를 따오지 못하면 장가를 가지 못하는 풍조가 대부분이다. 우물에 빠진 아기를 건져주는 이유는 한번 외면하면 계속 외면하게 되고,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그 끝을 생각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 나는 아기 때 첫 걸음을 떼면서 많이 고민했다. 형들의 부추김에 의해 바닥을 기는 놀이를 즐겼는데. 마당을 기어서 빠르게 대문까지 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을 전부 취소하고 걸으라고? 기어가기는 자신있는데. 걷기는 자신없는데. 걸어야 하나 기어야 하나? 처음 시작하면서 끝을 고려하기. 첫 등교하는 날 마지막 날 책거리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그 안에 논리가 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네가 이렇게 한다’는 것이 논리. 그 논리가 계속 연결되어 거대한 체계를 가지는 것이 자연의 완전성. 사단칠정론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의 완전성이 리(理)면, 리가 인간에게 반영된 것이 인간의 사회성. 그리고 인격성, 이성, 본성. 근본속성. 선하다 악하다거나 혹은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거나 혹은 남자답고 여자답다거나 혹은 희노애락애오욕을 추구한다거나 이런 것은 안쳐주는 마이너리그 헛소리. 근본은 논리. 그 논리의 연결이 자신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나아가 공동체나 국가와 같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인류의 역사까지 관통하여 가는는 정도가 그 인간의 인격이다. 그 인격이 본성이다. 한 인간의 인격이 높은가 낮은가는 그 일관성의 연결이 과연 인류의 역사까지냐, 혹은 국가나 이웃, 종교집단, 동아리, 패거리, 가족 수준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개인의 욕망 수준에 머무르느냐다.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건 저급. 이웃과 공동체와 동아리와 종교공동체와 국가의 완성을 추구하는건 중급, 이상주의를 품고 인류의 역사의 문명의 진보를 의식하는 것은 고급. 처음 눈을 떴을 때 최후의 경지를 바라보기. 등산을 한다면 첫 걸음을 뗄때 눈은 이미 산 정상에 가 있어야 한다. 그 정상에서 신의 완전성과 만나야 한다. 마주쳐야 한다. 울림과 떨림이 전해져야 한다. 그본성은 내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의 완전성에서 유도된 것. 삶은 공간과 시간의 로직. 공간은 자기를 위한 것이고 시간은 친구를 위한 것이다. 몸은 자기를 위한 것이고 마음은 친구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사회적이다. 그 사회의 완성을 추구하기다. 나의 배고픔을 느껴 그 결핍을 충족시키려고 밥을 먹듯이, 그 사회의 배고픔을, 그 사회의 결핍을 충족시키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첫 걸음을 뗄 때 마지막 걸음을 의식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왜 내 배고픔은 알면서 그 본성은 잘도 자각하여 느끼면서 왜 사회의 고픔은 모르고, 인류의 고픔은 모르고, 진리의 고픔은 모르고, 역사의 고픔은 모르고, 진보의 고픔은 모르고, 신의 고픔은 모르는가? 정녕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내 안 깊숙한 곳에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기때 첫 한 걸음을 떼었을 때 그때 시선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잊어먹었다는 말인가? 삶의 일관성과 완결성을 고파하는 이성의 꼬르륵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완전한 인간, 완전한 인격, 완전한 삶으로 신의 완전성과 대면하려는 본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본성의 목소리가 씨줄날줄을 이루어 운명의 베를 짜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자연과 감응하고 진리와 감응하고 더불어 소통하며 전율할 때의 그 느낌 잊었다는 말인가? 그 예민한 촉각. ∑ |
나 한 몸의 배고픔을 지나 멀리멀리 저 지구끝, 인류, 문명, 신의 배고픔으로 나아가기.
거대한 위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느낄 수 없는 포만감이오.
하나의 희망이라면 타고난 위장도 후천적으로 늘어난다는거요.
방구석에 앉아서 머리속으로 노력한다고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소.
나는 관계의 확장, 세상과 부단히 맞서기로써 키워지는거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고 자기 몸 하나 챙기는건 울동네 강아지도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강아지보다 좀 낫기 때문에 이웃을 챙기고 사회를 챙기고 국가를 챙기고, 드물게 좀 아는 사람이 진리를 챙기고 신을 챙기는 거지요.
그 사람이 어느 선까지 챙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과 소통의 레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 하나 챙기는 짓은 강아지도 하니까 강아지 취급을 해주고, 이웃 정도 챙기는 사람은 이웃정도 취급해주고, 역사와 진리와 신을 챙기는 사람이어야 진짜 이야기를 할만한거지요.
우리는 짐승을 짐승취급할 뿐 인간취급 안합니다. 인간과 짐승 사이에 분명히 차별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할 사람과 말하지 않을 사람과는 말하지 않습니다. 소통에 있어서는 명백히 주파수가 다르고 채널이 다릅니다.
어쩌면 이렇게 투명할까.
'코엘료'.. 하는 순간에 이미 '모르니까' 가 읽혀졌답니다.
어깨 넘어 눈팅 수삼년에 거의 풍월하는 수준에 달했다는 생각에 한 번 웃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