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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991 vote 0 2009.06.05 (15:46:21)

6월 7일 일요일 동영상

존재는 자신을 연출한다.

구조론은 자연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존재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에 거미줄에 매달린 파리처럼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두커니 붙박혀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연출한다. 자기 자신을 연출하고 시간과 공간을 연출한다. 적극적, 역동적, 능동적 존재이다. 생명성을 가진다. 존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양의 형태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내부적으로 바운더리를 지정하는 계, 계 안에서 센터가 되는 심과 주변으로 전개하는 날, 그들 사이의 밸런스. 밸런스의 이동에 따른 포지션의 변화, 및 외력의 처리로 존재 그 자체를 연출한다.

극장의 영사기가 스크린에 그림을 뿌려내듯이 존재는 자기자신을 연출하여 낸다. 존재는 시공의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가 아니다. 시공에 잡혀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존재가 시공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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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시스템(계)과 플랫폼(심)과 밸런스(심과 날)와 포지션(날과 날)과 데이터(외력의 처리)에 대한 이론이다. 이러한 전개는 존재가 외력의 작용에 대응하여 자기 존재를 연출하는 과정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외력을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는 일하고 있다. 하나의 존재는 외력을 처리하는 일의 1 단위다. 외력을 가하여 대응이 있으면 거기에 무언가 있고 반응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외력의 처리과정에 작용반작용의 밸런스가 있다. 어떤 것을 볼 때는 항상 밸런스의 양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절대냐 상대냐 중에서 택일이 아니다. 대칭되는 둘은 항상 동시에 성립하며 순서적으로 나타난다.

부부는 남녀 두 사람이 결혼에 동의하는 순간 동시에 성립하지만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누군가가 앞서간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형태로 좁은 틈을 통과한다.

계-시스템, 바운더리 컨디션..
에너지를 얻어 외부로 뻗어나가며 발전하고 진보한다. 생명의 특성을 가진다. 존재는 생명이다. 우주는 살아있다.

심(센터)-스트럭쳐(주도권)..
대외적으로 ‘하나’로 행세한다. 오뚝이처럼 밸런스를 지배한다. 어떤 결과를 낳든 자신에게 이익이 가도록 설계한다. 존재는 그렇게 자신을 보존한다.

심 : 날1,2-밸런스(저울)..
좌우방향처럼 수평적으로 동등하게 공존하여 있으면서 외력에 대하여는 힘의 방향을 바꾼다. 공간을 지배한다.

날1-≫날2-포지션..
앞뒤순서처럼 시간적 우선순위로 나타난다. 외력을 처리하여 밖으로 내보낸다. 시간을 지배한다.

시간과 공간-외양..
외력을 처리하며 그 결과를 외부로 나타낸다. 이 부분만 인간에게 직접 관측된다. 나머지 상위단계는 추론될 뿐 관측되지 않는다.

두번째 주도권 개념을 각별히 살펴봄직하다. 권은 권력이다. 밸런스 곧 저울을 지배한다. 오뚝이와 같다. 무게중심이 낮은 쪽이 전적으로 통제한다. 지구에 어떤 운석이 떨어져도 지구에 보태줄 뿐이다.

호재가 터지면 자신의 배를 불리고, 악재가 터지면 책임을 전가하여 상대를 떨궈낸다. 경제가 번영하면 리더의 업적이 되고 전쟁이 터져서 경제가 망하면 또한 위기의식을 조장하여 집단을 장악한다.

모든 경우에 자신이 유리해지는 것이 주도권이며 이는 존재 자체의 본질이다. 생명이나 조직,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은 존재의 이러한 성질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을 모르면 이기고도 지는 셈이 된다.

정치판에서 주도권은 시대정신으로 나타난다. 노무현이 그 점을 잘 포착했다.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으로는 노무현의 이익으로 되게 되어 있다. 역사가 그 방향으로 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라면 기업이 망하지 않는 한 창업자가 이익을 보도록 되어 있다. 정치라면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국가의 편에 선 정치인이 이익을 보도록 되어 있다. 국가 안에서 파당의 이익을 꾀하는 자는 결국 패배한다.

주도권은 밸런스의 양측면을 동시에 통제한다. 충분한 휴식과 넉넉한 보상이 생명을 진보하게 하지만, 동시에 치열한 경쟁과 긴장된 스트레스가 생명을 진보하게 한다.

사회가 진보하게 하려면 메이저리그의 넉넉한 보상, 충분한 휴식, 마이너리그의 치열한 경쟁, 팽팽한 스트레스 양 측면을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비겁한 논객들은 일면만을 강조하지만 노무현은 양쪽을 통제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다. 언어는 개념만 잡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냥 입에서 나오지만 그 내부에 정밀하게 돌아가는 대칭구조가 있다. 핑퐁과 같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쳐내는 것이다.

● 존재와 인식(깨달음)-≫원리

● 근거와 주장(담론) -≫ 개념

● 전제와 진술(명제) -≫ 가치

● 주어와 술어(문장) -≫ 의미

● 명사와 동사(단어) -≫ 사실

깨달음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깨닫는 것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소속, 영역, 파트너, 포지션, 임무’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각각은 밸런스를 가져서 핑퐁게임, 시소게임을 벌인다.

필자는 아홉살, 열살 무렵에 언어의 한계 극복에 의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간단하다. 언어는 사전에 세팅되어 있다. 생각을 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략 말은 그냥 튀어나온다.

그 사전세팅을 합리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어떻게 세팅되어 있는가? 연속적인 대칭구조로 세팅되어 있다. 명사와 동사, 주어와 술어, 전제와 진술, 근거와 주장, 존재와 인식이다.

왜 깨달음인가? 이 연속적인 대칭구조의 좌측을 인간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은 좌측에서 일어난다. 명사에서 동사로, 주어에서 술어로, 전제에서 진술로 생각이 전개한다.

그러나 인간의 논쟁은 대부분 명사를 고정해놓고 동사를 논하거나 주어를 고정하고 술어를 논하거나 전제를 고정하고 진술을 논하는 격이다. 물 한 컵은 명사다. 그 물이 많다거나 적다거나 동사다.

같은 컵의 물을 보고 ‘많다’ 혹은 ‘적다’를 발표함은 무의미. 항상 속임수는 전제에 있다. 인간의 뇌구조 자체가 전제의 오류를 보지 못하도록 세팅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타파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깨달음이 성립하는 것은 복잡한 구조도 간단한 원리에 의해 통제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정치판을 판단할 때는 밑바닥 에너지만 보고 판단한다. 나머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구조론의 연속적인 대칭구조 때문이다. 아기가 언어를 저절로 배우는 것도 연속적 대칭구조를 활용한 깨달음이다. 이쪽에서 화살을 날리면 저쪽에서 되받아치므로 저절로 말이 된다.

아기가 어떤 물체를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엄마’를 찾게 된다. 긴장하면 시선이 엄마에게 간다. 자신의 눈이 날려보내는 시선의 화살이 피사체에 닿을 때 피사체가 핑퐁처럼 받아넘기면 그 화살이 엄마에게 도달한다.

엄마의 시선이 역시 핑퐁을 받아넘겨 아기에게로 다시 날아오면 아기는 다시 그 시선을 눈앞의 ‘저거’에게로 날려보낸다. “엄마, 저거!” 이렇게 하나의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기는 문장을 생각하고 단어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시선을 처리한 것이다. 의식적으로 의미를 담아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작용을 핑퐁으로 처리한 것이 결과적으로 말이 되었다.

이렇듯 말한다는 것은 타자가 투수의 공을 처리하듯이 외력의 작용을 처리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최초의 단서는 외부작용이므로 동사가 된다. 그 동사를 처리하면 명사가 된다.

같은 방법으로 핑퐁을 계속하여 단어 위에 단어를 덧씌워서 문장을 이루고, 문장 위에 문장을 덧씌워서 명제를 만들고, 명제 위에 명제를 덧씌워서 담론을 만든다. 담론 위에 담론을 덧씌우면 깨달음이다.

● 단어는 명사와 동사로 대칭되며 사실을 지시한다.

●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연결되며 의미-맥락을 연결한다.

● 명제는 전제와 진술이 ‘A면 B다’의 논리구조로 가치판단한다.

● 담론은 근거와 주장을 하나의 축에 꿰는 통일성을 얻어 개념정립한다.  

● 원리는 ‘1-≫2’의 결을 드러내어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문장구조의 기본은 대칭성이다. 깨달음은 대칭성을 궁극적인 경지까지 몰아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표면의 사실을 단서로 시작하여 보이지 않는 이면의 의미, 가치, 개념, 원리의 수준까지 높여간다.

● 단어 : “강, 깊다.” 강은 명사, 깊다는 동사(형용사 포함)

● 문장 : “강은 깊다.” 강과 깊은 것은 하나다. 맥락이 연결된다.

● 명제 : “산이 높으면 강은 깊다.” 산과 강의 대칭구조로 비교판단 가능하다.

● 담론 : “산과 강은 하나의 대지 양 극단이다. 그러므로 산이 높으면 강은 깊다.” 대칭 둘을 동시에 통제하는 하나의 주제를 얻어 이야기(담론)의 완성도를 성립시킨다. 하나의 축에 꿰어내는 것이다.

● 깨달음 : “산과 강의 구분은 인간의 시각 기준이며 자연의 본래로 보면 하늘의 비가 태초의 대지를 깎아서 산과 강을 동시에 일군다. 그러므로 강은 산의 말단이고 산은 강의 말단이다. 산과 강은 하나의 근본에서 나왔다.”

깨달음은 보편성을 가진다. 담론은 대칭의 둘을 통일시키는 주제를 던질 뿐, 곧 산과 강을 통일하는 대지를 부각시킬 뿐이지만, 깨달음은 그 주제에 맞서는 외부작용의 존재를 드러낸다. 대지를 조각하는 비를 드러낸다.

비는 대지를 조각할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조각한다. 그러므로 보편원리가 된다. 담론의 주제가 남자와 여자를 통일하는 가족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깨달음은 그 가족을 빚어내는 성의 낳음을 드러낸다.

가족은 사람에게 해당될 뿐 달팽이나 개구리에게는 불명하다. 그러나 성의 낳음은 보편된다. 동물 뿐 아니라 식물에게도. 심지어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발생의 원리는 보편될 수 밖에 없다.

존재를 빚어내는 근원의 손길 말이다. 남녀가 만남과 결합에 의해 가족을 꾸리듯이 자동차나 혹은 건물이라도 부품들의 만남과 결합에 의해 꾸려진다. 인식은 단어, 문장, 명제, 담론을 거쳐 최종 깨달음에 도달한다.

우리가 처음 지각하는 것은 항상 동사(형용사)다. 움직여야만 포착되기 때문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지만 인간이 그 산에 다가서므로 역시 상대적으로 움직인다. 그 물의 흐름을 보고 그 산의 우뚝함을 보는 것이다.

처음 흐름을 보았을때 혹은 우뚝함을 보았을때 동시에 그 흐름을 통일하는 강의 존재. 그 강의 대칭 산의 존재. 그 강산을 통일하는 대지의 존재. 그 대지를 조각하는 비바람의 존재를 포착한다면 깨달음이다.

최종적으로 누구를 만나는가? 조각가를 만난다. 항상 배후에는 그 모든 것을 빚어내는 창조자가 있다. 그 창조자가 1에서 2를 끌어낸다. 낳는다. 그것이 리다. 원리다. 진리다. 파악해야 할 결이다.

왜 깨달음인가? 흐름에서 강, 강에서 산, 산에서 대지, 대지에서 비를 찾아가는 복잡한 절차 생략하고 최종적인 조각가, 창조자에게로 바로 쳐들어가기 때문이다. 좋고 나쁜 모든 상황 노무현이 연출했듯이.

고수들은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는다. 밑바닥이 본질 하나로 승부한다. 중간과정은 생략되어도 좋고 모로 가도 좋다. 최초의 창조자 신과 바로 승부를 본다. 그렇게 단순화시킨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정언명령과 가언명령

구조론의 연산규칙이 칸트의 정언명령 개념과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깨달음≫담론≫명제≫문장≫단어로 내려가는 흐름이 정언명령에 해당한다. 인위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극장의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은 선택권이 없다. 영사기가 필름을 돌리면 제 아무리 007이라도 정해진대로 가야한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인 것이다. 물론 칸트가 구조론을 배웠을 리 없다.

그러나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원리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언명에는 직관적인 깨달음이 있다. 칸트는 물론 도덕규범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편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도덕이 인위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배태된 것임을 갈파하고 있다. 예컨대 살인이 옳은가? 어떤 살인은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살인은 옳지 않다. 모든 살인이 옳지 않으면 어떤 살인도 옳지 않다.

이는 극한의 법칙을 연상케 한다. 개별사건에 드러나지 않는 가치가 일반화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즉 단어에서 문장, 명제, 담론, 깨달음으로 상향시켜 가다보면 인간 개념이 같은 비례로 커진다.

개인의 어떤 살인은 옳을 수도 옳지 않을수도 있지만 인류전체의 모든 살인은 옳지 않다. 반대로 개인의 어떤 사랑이 옳음과 동시에 인류전체의 모든 사랑은 옳다. 이것이 정언명령이다.

칸트는 도덕규범은 이는 좁은 해석이고 근본적으로 진리에 부합하는가이다. 그 여부는 개인≫공동체≫모든 시간 모든 장소≫인류전체로 범위를 확장시켜 봄에 의해 바로 파악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런 접근은 복잡하다. 더 혼선을 빚는다. 구조론에 의해 단순화된다. 명사는 옳고 동사는 그르다. 명사는 정언명령이고 동사는 가언명령이다. 명사는 의하여이고 동사는 위하여이다.

사랑은 옳고 사랑하다는 옳지 않다. 사랑은 그 사랑을 내 안에 품는 것이며 절대성을 가진다. 반면 사랑하다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가 따라붙어 상대성을 가진다. 주어는 옳고 술어는 그르다.

전제는 옳고 진술은 그르다. 근거는 옳고 주장은 그르다. 자연의 존재는 옳고 인간의 인식은 그르다. 그러므로 논객들과 언론사와 정치가, 사기꾼의 속임수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많다.

대부분 동사, 술어, 진술이 그르다고 믿기 때문에 그 부분을 논쟁하여 다툴 뿐 그 반대편의 명사, 주어, 전제, 근거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속는다. 자기 포지션이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배후를 놓친다.

물건은 속일 수 없다. 그 물건을 팔거나, 옮기거나, 바꾸는데서 속임수가 일어난다. 그래서 그 물건을 팔거나, 옮기거나, 바꾸는 것을 감시하지만 알고보니 원초적으로 물건이 가짜였던 것이다.

어쨌든 높은 단계에 대해 낮은 단계를 속일 뿐 최종단계는 속일 수 없다. 밑바닥에 고인 에너지는 속일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국민의 염원 그 자체가 에너지다. 조중동이 그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속이는 것이다.

살인이 옳지 않은 이유는 -칸트식으로 복잡하게 설명하지 말고 단순화하자.- 삶이 전제, 죽음은 진술이기 때문이다. 삶을 전제로 하여 죽음이 연출되는 것이다. 사건은 에너지에서 시작된다.

에너지가 들어오는 쪽이 전제, 에너지가 나가는 쪽이 진술이다. 그러므로 더 큰 범위에서 봤을 때 전제는 항상 옳다. 수익은 항상 옳고 지출은 선택적으로 옳다. 민중은 항상 옳고 정부는 선택적으로 옳다.

물론 민중이 옳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건 다른 사건에 해당한다. 역시 그 민중의 존재는 명사이므로 옳고 그 민중의 행동은 동사이므로 옳지않은 것이다. 행동은 오류시정이 가능하므로 역시 전체로 보면 옳다.


 

한국인 비판  - 아저씨, 아줌마

한국인은 비판되어야 한다. 솔직히 ‘수준이하’이면서도 스스로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아는듯한데 구체적으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이런 말은 조심스러운 것이다. 이 사이트가 대한민국의 좀 안다는 0.01퍼센트를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수준이하들에게는 이런 발언이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말한다.

‘아니다 싶으면 제 발로 나가시오.’

이건 깊은 심중의 이야기다. 아무에게나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 종로에서 발견된 백자항아리가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분은 일단 있어도 좋다. 왜 좋은지 정말 모르겠다는 사람은 솔직히 대화가 안 된다.

백자항아리가 좋긴 뭐가 좋아. 좋은 거 없다. 항아리가 좋은게 아니다. 그래봤자 항아리일 뿐. 중요한 것은 그 인상이 오래 간다는 사실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인상이 오래 간다.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 아저씨들은 일단 나가달라. 그 항아리가 이뻐서 좋은게 아니고, 여인의 엉덩이를 닮아서 좋은 것이 아니고, 그 단순화된 구성에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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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 아줌마에 대한 비난 혹은 비판은 많다. 그러나 대략 떠도는 세간의 이야기들, 인터넷 리플 수준이고, 책에서는 그 반대편에서 3류지식인 나부랭이들의 혹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의 변명이 더 많다.

세간에서는 아줌마를 비판하는데 지식인들은 아줌마를 변명한다. 지식인들이 번짓수를 잘못 짚었다. 아줌마는 비판되어야 한다. 왜? 진도 못 따라오니까.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조중동은 진도를 못 따라온다.

조중동은 비판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줌마도 비판되어야 한다. 물론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세상의 변화는 현장에서 일어나는데 아줌마의 포지션은 현장에서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선두와 후미 간의 거리가 너무 벌어지고 있는 한국의 이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 비판해서라도 진도 따라오게 해야 한다. 송윤아와 설경구의 결혼에 대한 아줌마들의 반응이 전형적인 예다.

지식인들의 변명.. 대략 ‘제 3의 성’ 어쩌구.. 또 자본주의 사회-아줌마 이야기에 자본주의가 왜 나와? 근데 꼭 나온다. 자본주의 나왔다면 대략 알쪼다. 심하면 신자유주의도 나온다.-의 밑바닥에 내몰린 최하층계급 어쩌구.. 일단 족가다.

아줌마들의 특이한 행태.. 안하무인..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아줌마’가 그렇다. 그러므로 비난하는 것은 모든 아줌마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줌마를 비난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오사카 아줌마’가 유명하다더라. 생선가게에서 흥정 끝내고 돈 지불한 다음 생선 한 마리 더 쓸쩍 집어가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아는, 사는 이유가 단지 그 때문인듯한..

일본 아줌마가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오사카 아줌마’가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 역시 아줌마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줌마, 지하철에서 동료를 위해 가방 던져서 자리 만들어주는 일을

인생의 큰 보람으로 아는 ‘막장 아줌마’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머리 속에 든 것이 없다. 인생에 아무런 계획이 없다. 내일이 없다. 그들은 사회의 여러 경쟁-그 경쟁이 자본주의 경쟁만은 아니다.

댄디즘 경쟁이 더 크다-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긴장이 풀려버렸다. 흔히 제 3의 성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갱년기 증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적인 매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건 핑계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스스로가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나이, 갱년기, 피부의 주름이나 탄력 어쩌구.. 하고는 전혀 상관없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몰려다닌다.

몰려다니기 때문에 아줌마인 것이다. 몰려다닌다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그룹의 논리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모든 비판되는 것은 그룹이다. 아줌마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특징을 비판하는 것이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 3의 성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떠나, 성을 떠나 기본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경쟁에서 벗어나.. 댄디즘을 잃어버리고.. 집단화된 즉 개인의 개성을 상실한 점이 문제로 된다.

시대의 흐름에 무관심하고.. 유행의 변화에 무관심하고.. 문화의 진보에도 무관심하다. 정치에도 무관심하다. 책도 읽지 않고 영화도 보지 않는다. 기껏해야 막장드라마 연속극이나 본다.

아줌마들이 아줌마파마를 고집하는 이유, 가꾸지 않고 지저분하게 해 다니는 이유는.. 백수나 인터넷 폐인들이 지저분한 이유와 같다. 사회의 댄디즘 경쟁에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몰려다니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의 행태도 가관이다. 등만 돌리면 화장실이 된다. 관광지에서 눈앞에 공중화장실이 뻔히 보이는데도 줄지어 도로변을 향해 오줌을 갈겨대는 풍경.

식당에서 큰 소리로 말하는 개매너 아저씨의 행태. 마찬가지로 오만에 빠진 아줌마들도 비난되어야 한다. 그 아저씨와 그 아줌마 본질이 같다. 나는 한국의 아저씨, 아줌마가 유독 그 경향이 심하다고 여긴다.

유럽은 일단 덜하다고 본다. 안가봤지만. 분명히 국가에 따른 차이가 있다. 미국 남자와 프랑스 남자의 똥배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문화수준의 차이다. 그러므로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식이 족하면 예절을 안다’는 말이 있는데서 보듯이 한국사회의 발전된 정도가 의식이 족한 정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예절을 모르는 것이다. 이 정도면 예절을 챙길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왜 아저씨, 아줌마가 비판되어야 하는가? 성추행 사건이 한나라당에서만 집중적으로 일어나는데서 보듯이 ‘그룹의 논리’가 인간의 타락을 부추긴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성매매 등 아저씨들의 더러운 행태도 대부분 패거리차원에서 일어난다. 중국에서도 그룹이면 공공질서를 어겨도 괜찮다는 풍조가 있고 일본에서도 열명이 모이면 무단횡단 해도 된다는 식이다.

원래 그룹이 문제를 일으킨다. 무엇인가? 아저씨, 아줌마의 타락은 자본주의 최하층 계급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 반대.. 귀족계 빵꾸났다고 절규하는 부유한 강남 아줌마의 타락이며.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혹은 그 목표를 너무 쉽게 달성해버린, 그 다음의 목표를 얻지 못한 때문이며, 이는 본질에서 문화의 빈곤, 철학의 빈곤, 가치의 빈곤, 안목의 빈곤 때문인 것이다.

부단한 사회재교육이 필요하다. 유럽에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발달되어 있다.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 재교육에 노출되어 있다. 처지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줌마들은 현장에서 멀다.

아줌마들은 재교육되어야 한다. 목표가 없다는게 문제가 된다. 철학하는 사람들이 그 다음의 목표를 정해줘야 한다. 돈 벌고 난 다음의 목표 말이다. 그게 없기 때문에 아줌마들이 타락한 것이다.

얼마나 인생의 목표가 없길래 하루에 무려 2시간이나 텔레비젼을 볼까? 아줌마들은 오만하다. 오만한 이유는 그들의 성공이 자기가 아닌 타인 즉 남편과 자식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들은 오만하지 않다. 부모 잘 만나서 그저먹은 자가 오만하다. 아줌마들은 그들의 성공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오만한 것이다. 남편 잘 만나서 혹은 자식 잘 키워서 오만해진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 최하층 생존전선에 내몰린 아줌마들이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아줌마파마를 한다고 한다.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대학총장이 아줌마 파마를 하고 다닌다면 문제가 있는 거다.

오륀지 아줌마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김성혜총장 사진을 보라. 아무리 미의식이 없어도 그렇지. 아줌마 파마를 했다는게 아니고 이경숙 총장의 그 괴상한 머리모양을 허한 미의식 부재가 문제인 것이다.

쪽팔리지도 않나?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머리에 동그란 오륀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대학총장 수준이 이 정도이니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통째로 수준이하가 된 것이다.

중국 오지의 교실이 지저분한 이유는 가난해서가 아니다. 선생님이 혼자서 톱과 망치 가져와서 수리를 해도 교실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개념이 없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서 학교 건물이 폭싹 무너진 것은 돈을 절약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개념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분명히 말하면 아줌마파마의 유행은 돈 때문이 아니다.

돈과 관련성은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적어도 10년 이내에 한국에서 아줌마파마가 거의 사라지리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아줌마들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게 창피한 일이라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문화는 한번 변하기 시작하면 빠르게 변한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아줌마파마가 사라져가고 있다. 대학총장들은 빼놓고.

필자가 비판하는 것은 시장바닥의 억척아줌마가 아니다. 강남의 배부른 아줌마들의 아줌마 짓거리가 문제다. 그들은 자녀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위해서 교육과소리를 하고 학원쇼핑을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구조론은 무조건 의하여다. 위하여는 가언명령 의하여는 정언명령이다. 칸트 아저씨가 이백오십년 전에 이야기 해준대로 우리 이제라도 바른 길을 가야 한다.

현대사회의 진보하는 흐름을 따라야 한다. 아줌마도 기득권 버리고 경쟁의 장 안으로 나와야 한다. 자본주의 경쟁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성숙 경쟁이다. 아줌마그룹 속에 익명으로 숨지 말고 인간 아무개 개인이 되어야 한다.

누구 남편 누구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일단 막장드라마부터 꺼야 한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진보한다. 문화의 진보가 크다. 일본 아줌마는 아줌마파마 안 한다.

유럽 여성들은 지나친 화장 안 한다. 한국도 곧 그렇게 된다. 한국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의 영향을 덜 받고 따라서 문화의 경쟁이 없다. 자신이 수준이하라는 사실을 모르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동료로부터 성매매를 제안받고도 헤벌쭉 웃는다. 한국인 변해야 한다. 필자가 댄디즘을 숭상하는 사람은 아니다. 화장한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딱 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천박한 티가 나는 것이 있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점이 보이는 것이 있다. 과거 한나라당이 노무현의 자갈치 아지매에 대한 대항으로 딱봐도 복부인 아줌마를 찬조연설자로 선정한 일이 있다.

딱봐도 혐오감 느껴지는 복부인 아줌마가 그들의 안목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였던 것이다. 지능이 떨어지고 판단력이 떨어지고 미의식이 떨어진다. 딱 보면 모르겠는가?

###

중요한건 발전이고 발전을 위한 동기부여이며, 동기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중국의 자부심은 중화주의에 기초한 집단적 자부심이다. 개인의 자부심이 강해야 궁극적으로 나라가 발전한다..

중국은 올림픽 경기를 개최하고, 달에 로켓을 보내고, 대형 항공모함을 건설하고 하면서 일시적으로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가능한 한계선은 스탈린이 보여준 거고.

그 선을 넘어서 계속 진보하려면 개인의 자부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자부심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오늘 어떤 신발을 신고, 오늘 누구를 만나서, 오늘 무슨 영화를 볼까를 고민하는 데서 생겨난다.

구체적인 일상의 고민 말이다. 그러한 고민은 결국 문화의 진보에 의해 담보되며, 문화의 진보는 결국 자유의 진폭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자유가 없는 데서의 문화의 진보는 없다.

따라서 개인의 자부심이 없고, 개인의 역량이 강하지 못하면 선진국 수준의 발전은 없다. 서양이 우리와 다른 점은 시골 농부가 소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더라도 ‘내 치즈는 더 낫다’는 자부심이 있다.

실제로 그만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맹렬히 공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한국의 농부는? ‘치즈는 나도 만들 수 있다’는 수준. ‘내것이 가장 낫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수준.

그나마 이장쯤 되어야 그 정도 생각이라도 가진다. 대부분의 농부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관습적으로 농사를 짓는다. 한국 농부들은 ‘한국치즈와 중국치즈, 일본치즈 중 어느 치즈가 나을까?’ 정도의 생각을 가진다.

우리집치즈와 너희집치즈 중 어느 치즈가 더 나을까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프랑스라면 포도주를 만들더라도 앞집과 뒷집의 맛이 다르고 품질이 다르고 경쟁력이 다르다.

가격이 다르고 브랜드가 다르다. 그것이 우연히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 끝에서 나온 것이다. 그 경쟁은 상품의 경쟁이 아니다. 자부심의 경쟁에서 나온 것이다.

개개인에게 자부심을 주는 것이 문화가 할 일이고 철학자가 해야할 일이고 지식인이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은 그 일을 하지 않고 있다. 대학총장이 아줌마파마를 하고 다니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집단적 자부심 내지 비교우위에 따른 우월감은 공허한 것이다. 개인적 자부심은 실천에 의해 얻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느끼는 막연한 우월감은 불안하고 그 불안은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한국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노스페이스라는 같은 옷을 입고 오는 현상을 질타한다. 그러나 같은 모양의 두발, 같은 모양의 교복을 강요한 결과라는 사실을 모른다.

다 획일화 시켜놓고 하나만 개성있게 가꾸라면 불안해진다. 분명히 말하면 학생들의 그러한 획일화 현상은 교사들에게 책임이 있다. 한국의 학생들은 개인적 자부심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집단적 자부심 아니면 우월감을 가질 뿐이다. 개인적 자부심은 매일의 실천과 완성에 의해 얻어진다. 시골 농부가 하루일을 끝내면 그날의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학생이 공부를 하면 30년 후에 출세해서 보상받는다.

그날 그날의 보상을 받으려면 공부 이외에도 많은 것을 해야한다. 그림도 좋고 음악도 좋고 스포츠도 좋고 탐험도 좋고 견학도 좋다. 매일의 성취가 있어야 개인적 자부심을 얻을 수 있다.

아직도 한국인은 남이 파마머리를 하니까 따라하는 수준이다. 기본적으로 남과 다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실제로 남과 다른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이 없는데 억지로 다르려고 한다면 말이 되나?

농구를 하는 아이와 수영을 하는 아이와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머리모양 옷모양 신발모양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부 같은 영어공부만 파면서 다른 머리, 옷, 신발을 주문한다면 넌센스다.

미적 감각이란 한번 바꾸면 전부 바꾸게 된다. 중국인들이 화장실에 신경 안쓰다가 북경올림픽을 계기로 바꾸기 시작했다. 한국인들도 아줌마파마를 바꾸기 시작했다. 10년 안에 사라지게 되어 있다.

중국의 지저분한 교실이 문제인 것은 단지 지저분하기 때문이 아니다. 교육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세기에도 저렇게 안했다. 아줌마가 수업중인 교실 문 밖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한국의 아줌마가 봉투들고 학교 찾아가는 것 만큼이나 교육이 아니다. 교육의 본질을 위배한다는 것이 문제다. 얼마전만 해도 한국인들은 다 흰 양말을 신고 다녔다. 지금은 흰양말을 신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콧수염을 기르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머리염색은 반드시 해야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역시 수준이하다.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등산을 할 때는 전부 검은 옷을 입는다.

왜? 그래야 ‘아 저 사람은 거지가 아니라 등산하는 사람이군’ 하고 눈치채기 때문이다. 등산복은 그 옷감의 특성상 원래 좀 후줄근하기 때문에 검은색으로 획일화되지 않으면 거지로 착각하는 수 있다.

외국의 코미디언은 한국의 모든 자동차는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라고 비웃는다. 문제가 있다는 거다. 디자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흰양말이나 검은등산복이나 파마머리가 아니다.

그 따위는 상관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당신 개인의 경쟁력은 무엇이오?’ 이거다. 대부분 자기가 숨은 소속그룹의 경쟁력 뒤로 숨으며 그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려고 한다. 공허하다.

나는 강남사니까. 나는 무슨대 나왔으니까. 나는 판검사니까. 나는 돈많으니까. 나는 백인이니까. 나는 남자니까. 나는 특정지역 사람이니까. 이런건 안쳐주는 거다. 소속그룹 말고 너 개인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나도 치즈는 만들수 있다'는 한국농부의 집단적 자부심 말고 '내 치즈가 가장 낫다‘, 혹은 ‘내 치즈는 이런 방법으로 만든다'는 스위스 농부의 개인적 자부심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디테일한, 구체적인, 실천적인, 현장에서의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당신에게 묻는다. ‘내 치즈는 이런 방법으로 만든다’는 고유한 그 무엇이 당신에게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헛된 우월감일지언정 자부심 아니다.

옷이든 양말이든 얼굴표정이든 머리모양이든 자동차든 등산복이든 말투든 무엇이든 그것이 나타나야 한다. 옷이 중요하지 않다. 남루해도 좋고 꾀죄죄해도 좋다. 중요한건 ‘내 치즈는 이런 식으로 만든다’는 증거다.

사람들이 개성을 나타내는 이유는 그 내치즈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획일적인 옷을 입는 이유는 내치즈가 없기 때문이다. 농구파 배구파 축구파 미술파 음악파 수영파로 나누어져 있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나타낸다.

'남이 그 차를 사니까 나도 그 차를 산다'는 수준으로는 해답이 없다. 딱보면 보여야 한다. '아무리 봐도 당신의 자부심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구료'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머리모양 신발 옷 이런 것은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이 황폐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단서에 불과하다. 단서는 단서일 뿐 전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옷 모양 바꾼다고 인간되지 않는다.

본질은 현대성이다. 자기 개인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느냐다. 그것이 현실에 뿌리박고 있느냐다. 실천하고 있느냐다. 뉴스를 따라잡고 트렌드를 따라잡고 있느냐다. 물론 필자는 그런 유행 따위는 싹 무시한다.

그러므로 필자에게 그러는 당신의 옷과 머리와 신발은 왜 그꼴이냐고 시비해서 안 된다. 자기 개인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면 상관없는 거다. 머리가 파마라서가 문제가 아니라 따라해서 문제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서 문제이며 당신의 인격을 규정하는 개인적 자부심이 없고 집단적 우월감에 의존하기 때문에 문제다. 내 치즈는 이렇게 만든다는 그 무엇이 없다. 내치즈가 없다.

그것이 없으면 자부심이 없다. 그러면 불안해진다. 불안해지므로 집단적 자부심이나 집단적 우월감이라는 약물에 중독된다. 그래서 획일화 되고 바보가 된다. 얼굴에 다 나타난다.

아줌마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치즈의 부재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덜 인간이다. 소통도, 공존도, 깨달음도, 공동체도, 진보도, 진리도, 신도 그것이 없이는 불필요에 무의미다. ,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신을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다. 또 당신의 그것이 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다. 신에게 달라지는 것이 없고 당신에게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http://gujoron.com


[레벨:0]스타

2009.06.06 (07:23:27)

우리나라 아줌마, 아저씨들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제 주변에는 아줌마 파마하는 사람 별로 없고요.. 노인분들 경우는 많지만..요즘은 외모에 관심이 많기때문에 지극히 세련되고 우아합니다.  하지만 그것뿐입니다. 몇번 만나고 대화를 해보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각자의 색깔이나 향이 없습니다. 투박하면 투박한대로 세련되면 세련된대로의 멋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비슷합니다. 그건 아줌마들뿐이 아니라 아저씨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남자들의 경우 특히 철학도 없고 권위와 보수에 젖어 있지요. 그래서 아마 밖에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집에서는 아줌마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사는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아줌마들 실제로 꽤 심각합니다. 특히 교육에 관해서...강남 아줌마들은 고액 과외로 아이들 교육하면서 아이들이 공부 잘하면 학교나 모임에서 대접받고 살면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런 강남 아줌마들을 다른 지역 아줌마들이 맹목적으로 따라하지요. 불안하니까 따라하지만 그러면서도 정당화 시킵니다.  요즘 왠만큼 사는 아줌마들은 대부분이 아이들 교육에 올인하며 삽니다.  돈이 많으면 외국어 연수에 고액 과외에 돈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합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돈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지요. 참으로 어이없지만 그것이 집단화되면 정당한 것이 됩니다. 학원을 안 보내거나 외국에 보내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혹은 그렇게 아이들을 돈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것이 부모들의 능력이라고 자부하는 것도 같고...

재미있지만 그런 아줌마들과 그것을 용인하는 아저씨들이 결국은 교육을 망치고 있지요. 선행을 하는 아이들이 학교 수업 잘 들을리도 없고.. 모두 그렇게 학원 다니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책을 읽고 생각을 할까요? 생각없이 시키는대로 하는 수동적인 성인이 될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런 악순환이 언제까지 되풀이 될지 모르지만 이정권 들어서 교육은 망쳤다고 봅니다. 누가 망쳤을까요?

우리나라 아줌마, 아저씨들의 수준이 그러한것은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사회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학벌이나 인맥, 연고가 중요한 나라에서 누가 노력을 하겠습니까? 대학을 나와도 생각이 그것밖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학벌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지요. 전 개인적으로 아줌마, 아저씨들의 의식 수준을 높이려면 평생교육 사회를 만드는 방법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메리트를 주는 사회라면 누구든 배우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배우는 과정에서 깨달음도 있고.. 각자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의 색깔과 향을 가질 수 있지 않겠어요? 노무현 대통령의 학식도 끊임업이 책을 읽고 또 그것을 정리해서 쓰는 과정에서 배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그렇게 했다면 지금 정치가 이렇게 퇴행할리도 없고요..참으로 아쉬운 것은 참여정부에서 평생교육과 학습사회를 중요시했지만 그것이 일반화되지 못했다는 거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9]참삶

2009.06.06 (13:34:00)

'오직 자신' 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그럴만한 내공이 있느냐는 것.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지요.

제대로 배울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못 배워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배운게 문제. 휩쓸려 다니는 패거리 문화가 문제.
돈으로 해결이 되는 정도로만 삶을 살아 본게 문제.  
그 이상의 가치실현에는 관심도 없고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한계.답답함.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부심,자존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교육의 근본문제.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 조차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뭔가를 완결지어 본 적이 없는 교육자의 자질이 문제.

'멍' 하니 문화를 거스르는 드라마나 보며 하루를 마무리 하는 삶.
관광지에 가면 관광버스에서 우루루 내려서
우루루 화장실가고 바지 반쯤 걸치고 나오고 들어 가는 행위가 당연시 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인생을 살고,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자신의 인생은 어디에도 없고.
결국 내가 느그를 위해 어떻게 살았는데 하며 원망이나 하고.누가 그렇게 살라 했냐구.
삶에 대한,인생에 대한,세상에 대한,사회와 자신에 대한,하루하루 생에 대한 무개념에서 오는 행위.

남방  두장으로 사계절을 보낼 수 있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내면의 멋이 담겨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내면의 그 무언가가 꽉 찰수록  단순하게 드러납니다.
백자항아리 처럼.

삶은 문화지요.
낮에는 기름때 노동일을 하고 
퇴근을 해서 기름때 낀 손 깨끗이 씻고 
좋진 않지만 깨끗한 남방 걸치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근처 전시장에라도 들러 작품감상을 하며 하루를 정리 해 보는 그런 삶.
자연스럽게 삶에 생활에 스며들어 한 몸이었던 것 처럼.
하나가 바뀌면 전체가 바뀝니다. 연동되어 있으니.
몸으로 삶의 형태를 보여 준 노무현 대통령의 삶은 그래서 완전한 삶이지요.

배우가 영화에서 연극에서 자신을 연출하듯
자신의 인생으로 살고 자신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하고,
스스로 분장하고,조명도 받고 삶을 연출하는 적극적인 삶의 관점이 필요할 듯 합니다. 
정언명령에 해당하는 삶이겠지요.
[레벨:17]눈내리는 마을

2009.06.06 (21:10:59)

갑작스럽긴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선진국이 아니더군요.

대중문화라고 하나...

그건, ESPN 돈벌게 해주고, 월화수목금 지루한 일상을

때워주는 맥주한캔에, 감자칩 하나 들고 '멍'하니...

뚱뚱한 소파에 누워서는,

세상도 모르고, 침침한 카펫위에 덩그러니...

그러곤, 포드 픽업 트럭 몰고 나간다는게,

스포츠바에서 맥주들고 괴성지르기.

오늘은, 어느 하키팀이 이길까 싸우고.

경제적으로 풍요해졌지만, 하등

인간의 '참삶'에서는 멀어진 모습.

그 삶의 모습이 강변되는, 세계화의 모습.

이부분이 비판되어야하는데,

실질적으로 강단에서는, '경제'이야기만하죠.

실은, 미국의 '대중문화'라는 저급성에

인간의 소외가 깃들어있는걸 모르고...

외국인의 시선인지 몰라도,

그 벽안의 대중문화에서 '외로움'을 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09.06.06 (21:52:15)

이 글은
현재를 비판하는
형식이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예견입니다.
현재의 암담함보다 미래의 변에 방점을 찍어주시길.
분명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문화를 만들테니까.
또 많은 사람들이 문화만들기에 동참할 테니까.
우리가 이 방향으로 문화를 만들어가야한다는 방향의 제시.
이 방법으로만이 강남아줌마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교착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


프로필 이미지 [레벨:23]의명

2009.06.07 (01:03:31)

억지로라도 세상을 들어 올려야 고소공포증들이 지랄하지-아무게가 고소공포증 ㅋㅋㅋㅋ-
그나저나 어지간히 몰지각이니 떠먹여주어 잘 먹긴 한다만 많이 챙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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