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관점이 다르면 다른 쪽에서 외치는 절규가 들리지 않는 것일까?
문득 그것이 궁금하다.
사람이 늘 절규만을 듣고 느낀다면 아마도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울듯.
그러나 느끼지 못하고 듣지 않고 있는 동안에도 절규는 늘 있다.
가끔씩 쇼핑하듯 절규를 듣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회피하는 이유는 다 받아 들이면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음보살은 그 모든 것을 다 듣고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 위해 원을 세웠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속에 실존 인물이든 가공의 인물이든...
사람들의 염원이 만들어 낸 그 간절한 바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요즘의 세상에는 무엇이 관음보살일까?
무엇이 이 절규에 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지성이 만들어 낸 사회의 시스템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본다.
사회적 시스템이 잘 작동된다면 녹쓸지 않는다면 계속 환경에 맞게 변화해 간다면
관음보살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과 같다.
너의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서로의 옆에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어쩌면 너가 될 수도 있고 내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이런 시스템의 보호자이자 감시자이자 사용자이자 목격자인 사람! 말이다.
관계를 계속 확장시켜 나가면 그것은 거대한 시스템이 된다.
관계와 시스템
관계는 그 사이를 보아야 관계를 볼 수 있고,
시스템은 작동원리를 보아야 시스템을 알게 된다.
관계 그 사이에 어떤 기류가 흐르는가?가 서로의 관계의 밀도이다.
밀도가 높은지 낮은지를 통해서 관계의 질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의 자동 시스템과 인간이 개입하여 만들어낸 인위적 시스템.
절규는?
이 인위적인 시스템의 운영을
자연의 운행 방식에 맞추어야 한다고
내버려 두고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버려 두면 다 잘 될거라는 방임주의와
지나친 개입이 오히려 획일화 되어 훼방을 놓는 결과를 가져오는 계획경제.
어쨌든 이 둘은 모두 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로울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냥 내버려둘 것인가?
우리는 이 "사이" 를 보호하므로 서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사이" 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그것은 관계를 복원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동안은 이 관계도 자연이 운용되는 원리처럼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계는 그 사이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보아야 보호할 수 있다.
약한고리가 보호될 때 관계는 원활해진다.
시스템도 그와 같다.
시스템의 약한고리가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보호되어져야 한다.
그럴때 시스템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이것은 보호라는 개입을 통해서 가능하다.
탄갱과 광부들 사이의 카나리아가 생각나오.
카나리아가 울면, 약한고리를 보호하면 생명이, 시스템이 살아난다!
뭉크의 절규도 바로 이 카나리아의 울음 같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