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호되어야 할 ‘약한 고리’는 한 마디로 민감한 지점이다.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아니 건드리려면 아는 사람이 제대로 건드려줘야 하는, 모르는 사람이 건드리면 망치게 되지만, 임자 만나면 제대로 폭발해주는 그런 곳이다. 누구에게나 그것은 있다. 그것이 소통의 무기다. 거기서 포지션이 나온다. 그것으로 팀플레이는 가능하다. 관계를 맺고 관계를 바꾸며 더욱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클린턴은 고교 때 우수학생으로 선발되어 케네디를 만났다. 수평적은 만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관계는 성립되었다.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서 있는 위치는 달랐으나 그들의 이상주의가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같은 만큼 소리가 난다. 대등한 만큼 이루어진다.
상부구조가 보일 때도 있다. 엔진이 바퀴를 굴린다면 엔진은 상부구조이고 바퀴는 하부구조다. 엔진도 보이고 바퀴도 보인다. 엔진은 관계다. 엔진은 휘발유와 만나고 불꽃과 운전자와 만난다. 상부구조가 보이는 이유는 반복작업을 하도록 세팅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 당하는 일이다. 첫 만남, 첫 인사, 첫 출근, 첫 데이트 때는 그것이 세팅되어 있지 않다. 그때는 순수한 관계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위태롭다.
엔진 안에 있어야 할 실린더가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그 민감하고 위태로운 실린더를 보호할 때 자동차는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자동차를 운전하므로 그 위태로운 지점을 망각한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에서 운명처럼 위태로움 안에 선다. 왜?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등장, 스마트폰의 등장, 새 대통령의 등장처럼 새로운 일이 일어나면 처음부터 다시 세팅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 날에 새 사람을 새로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엔진은 단단한 실린더 벽과 넉넉한 냉각수로 보호되고 있지만 인생의 만남은 위태롭기 그지 없다.

스타일은 자기다움이다
만약 여기서 밀리면 내 인생 전체가 통째로 다 밀린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있다. 절대로 굽힐 수 없는 어떤 운명의 지점이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 내가 변질되어,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어, 내가 나를 잃어버릴 거 같은 지점이 있다.
숨을 쉴 수도 없을 것 같은 지점이 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을 고수할 때 스타일은 얻어진다. 그렇게 자기다움은 발견된다.
그 지점을 고수하면 필연적으로 세상과 마찰한다. 세상과 마찰할 때 약한 고리가 드러난다. 약한 고리를 보호하기 위해 남들이 달려온다. 그들과 함께 하면 자연히 팀플레이가 된다. 조개가 키틴질의 막을 씌워 진주를 보호하듯이 팀플레이가 이루어질 때 그 지점은 점점 발달한다. 건드리면 소리가 난다. 악기의 현이 만들어진다. 그 지점은 선과 악, 강과 약, 성과 속, 빛과 어둠이 만나는 접점이 된다. 그 둘의 공존은 위태롭다. 그 위태로운 이중성이 부각될때 캐릭터는 살아난다. 드라마는 호흡한다. 모든 것은 거기서 비롯된다. 관계의 질서가 탄생한다.
그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자기만의 북소리를 가져야 한다. 자기만의 울림통을 가져야 한다. 그 강약과 그 완급과 그 장단과 그 음양과 그 선악과 그 성속을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악사가 활로 현을 켜듯이 밀고 당기고, 조이고 풀며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냥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고집피울 것이 아니라, 김기덕 감독이 숨을 때 숨고 나설때 나서며 세상을 통째로 낚아보이듯이. 싸이가 튈때 튀고 점잔뺄 때 점잔빼듯이 그것을 희롱해 보여야 한다. 그것이 아트다. 그것이 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