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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김동렬*
read 9186 vote 0 2012.10.21 (20:51:54)


    삶의 정답은 있다

 

    필자가 ‘인생의 정답은 있다’고 말하면 반사적으로 ‘아냐. 그럴 리 없잖아’ 하고 대드는 사람 꼭 있다. 중요한건 이게 포지셔닝 게임이라는 거다.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본능의 명령이라는 거다.

 

    보통은 어떤 주장이든 기존의 견해에 각을 세우는 식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거 or 저거’ 중에 고르면 된다. 이게 맞으면 저게 틀리는 구조다. 눈 감고 찍어도 일단 50퍼센트는 먹고 들어간다.

 

    안철수 놀이다. 출마선언만 하면 50퍼센트 확보다. 문재인을 통제하려면 51 대 49로 만들어놓고 협상이다. 30퍼센트면 묵살되고 60퍼센트면 역으로 당한다. 거꾸로 안철수가 통제하는 판이 된다.

 

    구조론은 다르다. 새롭기 때문이다. 기존의 견해와 각을 세우지 않는다. 50퍼센트 먹고 들어가는 게임 아니다. 흑백논리에 기초한 2차원 단선구조의 포지셔닝 게임이 아니다. 안철수놀이 아니다.

 

    정신차려야 한다. 기존의 글을 보는 관점으로 구조론을 대하면 곤란하다. 훈련되어야 한다. 2차원적 사고 버리고 입체적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구조론 사이트에서는 구조론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

 

    포지셔닝 게임의 목적은 상호작용에 있다. 무속에 댈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는? 정답 – 무속이다. 무려 50만명이나 되는 무속인이 있다는 설이 있다. 아마 과장된 숫자겠지만.

 

    중요한건 무속이 원하는 정답을 찍어준다는 거다. 필자의 ‘정답이 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아냐. 정답은 없어’ 하는 이면에는 ‘당신이 어떤 답을 말해도 내가 원하는 답은 따로 있어.’ 심리가 있다.

 

    근데 이들은 무속인에게 당한다. 무속인은 그런 포지셔닝 게임의 고수들만 수천, 수만 명을 상대해 왔기 때문이다. 정답을 미리 정해놨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것이며 무속인은 그걸 탐지해 낸다.

 

    무엇인가? 안철수 놀이의 본질도 무속심리다. 정답은? 상호작용이다. 점장이와는 상호작용이 있다. 그래서 좋다. 안철수와는 상호작용 된다. 그래서 좋다. 안철수는 노선도 이념도 없으니까 말이다.

 

    박근혜 뒤에는 유신세력이 있다.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작용이 된다. 문재인 뒤에는 민주세력이 있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작용이다. 그래서 싫다. 안철수는? 좋다. 놀아주기는 일단 좋다.

 

    무속의 반대편에는? 양의사가 있다. 역시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작용이다. 한의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한의사와는 충분한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병이 나면 당연히 양의사를 찾지만.

 

    필자가 정답이 있다 하면 반사적으로 ‘아냐!’ 하는 이면에는 상호작용의 공간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다. 본능적 방어심리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생존본능을 누가 막아?

 

    극복해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본능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올라서야 한다. 김기덕이나 싸이도 마찬가지다. ‘김기덕도 싸이도 정답은 아냐.’ 하는 이면에는 평론가의 밥그릇 공간이 있다.

 

    평론가나 지식인이 독자와 상호작용하는 공간, 무속인이 밥먹는 공간, 그 공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다. 구체적인 욕망이 있다. 이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설득되지 않는다.

 

    ###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전에는 있다더니 이번에는 왜 없다느냐’ 하고 시비할만 하다. 천만에. 틀렸다. 그대는 시비할 수 없다. 왜? 발언권이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할 때의 ‘있음’과 ‘없다’고 할 때의 ‘있음’은 뜻이 다르다. 그게 왜 다르냐고 묻는다면 국어공부를 안 한 것이다. 알아듣는 말귀가 어두워서 도무지 대화가 안 통하는 답답한 장면이다.

 

    중요한 것은 그 뜻을 누가 정하느냐다. 그에 관한 기존의 견해가 있다면 거기에 연동된다. 그러나 새로운 견해를 말한다면 기존의 관점에 연동시킬 수 없다. 해석권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있다.

 

    화성의 모래알 숫자를 셀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수학자에게 있다는 점이다. 수학자는 자연수로 대답하지 않는다. 일반이 알아듣기 어려운 공식 하나를 던져줄 뿐이다.

 

    몇 개인지 자연수로 찍어달랬더니 왜 공식을 들이대냐고 항의할 수 없다. 애초에 발언권 자체가 없다. 답은 수학계가 정한다. 원래는 0은 숫자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0이 숫자로 쓰인다.

 

    0이 숫자인지 아닌지 논할 권리가 없다. 그대는 수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먼저 국어가 되어야 한다. 말귀를 알아듣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발언권이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누가 새로운 주장을 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비판할 수 있지만 맥락 안에서다. 전제와 진술 사이의 모순을 찾으면 된다. 필자의 글에는 항상 숨은 전제가 있다. 시비해도 그걸 시비해야 한다.

 

    숨은 전제가 불성의 존재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대개는 어떤가? 숨은 전제는 보지 않는다. 맨 마지막 오는 ‘동사’만 보고 성급하게 시비를 한다. 구조를 보지 않고 ‘yes / no’만 판정한다.

 

    필자가 ‘정답이 있다’고 할 때의 ‘정답’은 독자가 원하는 ‘그 정답’이 아니다. 뭐시라? 정답이 있다고? 그럼 이번주 로또번호를 찍어줘 봐!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강퇴가 정답이다. 그 정답 말고.

 

    ###

 

    어쨌거나 종교는 구체적인 삶의 정답을 찍어주고 있다. 정답은?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사도신경을 외우며, 십일조를 내고, 십계명을 지키며, 기도를 열심히 하여 천국을 가는 것이다. 근데 가짜다.

 

    중요한 것은 진짜든 가짜든 그것이 존재하며, 거기에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 거다. 살펴야 할 부분은 그 양식이다. 종교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가 ‘아닌데?’ 해봤자 먹히지 않는다. 인간은 양식 곧 스타일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종교가 그것을 제공한다. 종교의 입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인간은 양식을 추구한다. 이건 진리다.

 

    그러므로 정답이 있다. 인간이 일정한 삶의 양식을 원하고 자연에 그 양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둘이 호응관계로 인과율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종교가 답은 아니지만 그 구조는 존재한다.

 

    수학은 절대진리다. 의심할 수 없다. 룰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진리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서양의 앞선문물이 밀려들어올 때 조선양반들이 불편해 했듯이.

 

    지금은 적어도 학계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사람은 없다. 학계의 파워 때문이다. 진리가 힘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조선 말기로 되돌아가 보자. 진리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했다.

 

    사람들은 진리가 없다고 말해주길 원한다. 그래야 무속인과의 대화처럼 상호작용의 공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일방적이다. ‘1+1=2’다. 내가 적당히 조절해서 쓰면 안되나요? 안돼!

 

    진리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만 적응했다. 마찬가지다. 필자의 정답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지만 언젠가 적응한다. 상호작용의 공간을 빼앗는건 분명하지만 대신 새로운 신천지가 개척된다.

 

    인터넷이 보급되면 주판학원은 문을 닫는다. 분명히 피해자가 있다. 잃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얻는 것이 더 많으니까 일제히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필자의 정답 때문에 화내는 사람은 있다.

 

    김기덕 감독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냉소하는 지식인이 있듯이, 싸이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해도 냉소하는 사람들은 있다. 누구냐? 일본 네티즌이다. 왜?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입장은 정해져 있다.

 

    필자가 ‘정답은 있다’고 할 때 냉소하는 사람은 일본 네티즌과 같다. 그래? 싸이가 1위했다고? 그래서? 어쨌다고? 흥! 그들이 냉소하는 이유는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이다.

 

    어차피 일본인 입장에서는 과거 한국인들이 일본인의 많은 노벨상 수상 소식에 시큰둥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큰둥할 수 밖에 없다. 말춤을 따라배우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자, 한국은 피지배자로 역할게임, 포지셔닝 게임이다. 역할을 원하는 한 그들은 불편할 것이고 냉소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그냥 그렇게 짜져 있는 수 밖에 없다.

 

    아마존 원주민 조에족을 찾아가서 ‘한국이 이번에 월드컵 4강 했거든.’ 해봤자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차피 답은 없는 것이다. 소통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역할이 걸림돌이다.

 

    거시적으로 보자. 시간을 1만년 전으로 되돌려서 원시인들에게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그것은 과학이다.’ 하고 알려줘 봤자 먹힐까? 아니다. 1만년 걸리는 작업인데 말이다.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구를 찾아왔다. 근데 말이다. 1만년 전 원시인에게 과학을 알려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지구인들이 환영할까? “저 새끼 여긴 왜 왔어?” 이게 본심 아닐까?

 

    신이 오지 않았을 때는 누구나 신의 방문을 고대한다. 왜? 로또번호를 찍어줄 거니깐. 그러나 정작 신이 지구를 찾아오면 누구나 불편해 한다. 로또번호를 찍어줄 리가 없잖아. 눈치 깠다.

 

    신이 지구를 찾아오지 않으므로 신의 방문이 로또인 것이며, 신이 오는 즉 로또가 아니다. 그대는 정답을 원하지 않는다. 역할을 빼앗고 상호작용의 공간을 빼앗기 때문이다. 많이 불편하다.

 

    인류는 1만년에 걸쳐 조금씩 전진해왔다. 그리고 과학은 정답을 제시했다. 인류는 진보했다. 1만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더 향상되었다.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한번 더 인류는 점프해야 한다.

 

    구조론의 정답은 종교를 대체하는 미학적 삶이다. 미학적 삶은 관계의 밀도를 높인다. 인간은 정확하게 세상의 중심과 관계맺기를 원한다.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인류는 그렇게 창조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고 진화해 왔는지를 안다면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답할 수 있다. 인간은 관계맺기를 원하며 삶의 스타일 창조로 그것은 가능하다.

 

    정답을 말해줘도 회의하는 사람들은 있다. 로또번호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답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자기 방식의 정답을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이 정답이다.

 

    무속인은 상호작용을 한다. 좋다. 한의사도 상호작용을 한다. 좋다. 조선시대 양반도 제사를 지낸다 어쩐다 하며 활발한 상호작용을 한다. 근데 과학은? 안 한다. 양의사는? 안 한다. 그래서 싫다.

 

    종교는? 상호작용을 한다. 좋다. 매주 설교도 해준다. 법문도 해준다. 해주는게 있으니 좋아하는 것이다. 구조론의 답은 관계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해주는거 있다.

 

    인생의 근본문제는 삶이 빈곤하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본질에서 관계의 단절 때문이고 관계의 복원에 의해 삶이 풍성해지며 그 방법은 스타일의 창의다. 뼈대를 세운즉 건축이 풍성해진다.

 

    비료를 뿌린즉 열매가 풍성해지고, 화음을 세운즉 음악이 풍성해지고, 구도를 세운즉 그림이 풍성해지고, 대칭을 세운즉 문학이 풍성해진다. 정답이 있다. 관계의 밀도를 올릴 수 있다.

 

    사람은 과학을 싫어하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주기 때문이다. 해주는게 있으니까 좋아하는 거다. 근데 왜 조선시대 양반들은 과학을 거부했을까? 그땐 해주는게 없었다.

 

    과학이 뭔가 해주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한국인들이 근대과학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받아본 것은 최근 30여년에 불과하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왜 한국인들은 유난히 진보를 싫어할까?

 

    답 - 해주는게 없잖아. 복지혜택 주잖아? 안 받아봤거든. 그렇다. 한국인은 진보의 혜택을 받아본 경험이 없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아본 경험은 있다. 인간은 얄팍하게 경험을 따른다.

 

    한국에 진보 이념이 들어온지 백년이 넘었지만 그 혜택을 받아본 역사는 없다시피 하다. 과학이 들어온지 수백년이 넘었지만 그 혜택을 받아본 역사는 매우 짧다. 경험에 갇힌게 인간이다.

 

    인생의 소실점이 있어야 한다. 긴장을 연출하는 악기의 리드가 있어야 한다. 기타의 피크가 있어야 하고, 당구의 큐대가 있어야 한다. 인생이 불우한 것은 있어야 할 바로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 가면 된다. 목사가 소실점 해준다. 스님이 피리의 리드 역할 해준다. 점장이 찾아가면 된다. 당신의 속에 있는 할말 못할 말 다 들어준다. 대신 현찰을 뜯어가지만 일단 귀로 들어는 준다.

 

    목사의 소실점 역할은 가짜다. 그것은 편지를 타인이 대필해주는 것과 같다. 스님의 소실점 역할은 가짜다. 당신 안에 목사가, 스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게 창의할 스타일이다.

 

    인간은 처음 약했다. 인간이 강해진 것은 팀플레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 덕분이다. 그래도 부족했다. 문자 덕분이다. 비로소 인류는 강해졌다. 그러나 아랍은 여전히 약하다. 왜?

 

    아랍이 낙후한 이유는 모음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자가 인류를 비약하게 했지만 언어와 문자는 한계가 있다. 냉소는 곤란하다. 1만년 전 처음 문자가 만들어졌을 때 당신은 냉소했다.

 

    온당치 않다. 세종대왕이 한글 만들자 냉소했다. 그거 제대로 써먹는데 500년 걸렸다. 그래도 당신의 냉소는 온당치 않다. 언어와 문자의 공급은 혁명적인 비약이다. 이건 답이 나온 것이다.

 

    세종의 한글창제는 혁명적이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500년 후에나 써먹더라도 가야할 길은 가는 거다. 과학에 의하여 진보해 왔고 답을 찾아왔다. 과학이 당장 배를 불려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병에 걸려 죽었다. 그 과학의 혜택을 못 본 것이다.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쓸쓸하게 죽어갔다. 미국은 공군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알아준 것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왜? 전쟁해야 하니까. 미국은? 누구와 전쟁해? 당장 필요해야 덤비는게 인간. 인간은 언어와 문자 그리고 과학에 의해 위대해졌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내 로또는?’ 하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곤란하다. 인류의 언어는 결함투성이다. 언어는 사실을 조직할 뿐 관계를 조직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자가 처음으로 관계를 조직하는 문법을 만들었다.

 

    지구인에게 문자가 발명되고 그 문명이 꽃을 피우는 데는 1만년이 걸렸다. 1만년 전 어떤 사람이 처음 글자를 만들었는데 ‘뭐야? 1만년 후에 본 실력 나온다고? 집어치워!’ 이럴 것인가?

 

    답은 있다. 언어와 문자, 수학과 과학의 보급은 분명히 답이 나온 것이다. 인류는 정답을 찾았다. 그런데 종교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다. 인류가 관계의 문법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어, 문자, 수학, 과학이 정답이었듯이 필자가 제창하는 ‘관계의 문법’도 정답이다. 인류가 소통하는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린다. 인류의 아이큐를 높인다. 상호작용의 밀도를 높인다.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해도 시큰둥한 흑인은 있었다. 심지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왜? 당한 만큼 되갚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만이었던 것이다.

 

    흑인이 농장주가 되어 백인노예 등짝을 채찍으로 만 대는 때려줘야 분풀이가 될 텐데 말이다. 그들은 마음 속에 정답을 정해놓았다. 그러므로 답이 없다. 백인노예를 때려주는 수는 없다.

 

    답이 없는게 아니고 답을 원하지 않는 거다. 로또를 원하고 상호작용을 원하는 거다. 전자렌지에 햇반 데워먹는거 보다 아궁이에 장작불 지피고 군고구마 구워먹던 때가 더 좋았다는 식이다.

 

    인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의 재설정은 가능하다.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창의함으로써 관계는 바뀌었다.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를 만듦으로써 한국과 세계의 관계는 확실히 달라졌다.

 

    언제나 을이기만 했던 한국이 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애초의 시나리오를 다 바꾸어야 한다. 진보의 전략을 다 바꾸어야 한다. 개도국 수준에 맞추었던 옛 시나리오 폐기다.

 

    60년대 일본도 그랬다. 한국은 일본을 50년 뒤처져 따라가는 거다. 그렇다면 잰걸음으로 가야 한다. 역할 뺏겼다며 투덜대지 말고 변화된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과학의 공습은 피할 수 없다.

 

    정답은 있다.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받아들이면 갑이 되고 냉소하면 을이 된다. 싸이와 김기덕은 받아들였고 질투하는 일본 네티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로 망가졌다.

 

    분명한 것은 1천년 후 지구인들은 지금의 지구인들이 주기도문을 외우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시간에 다른 것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P.S.

    물론 정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일면도 분명히 있다그러한 지점이 존재하여 있다그러나 정답을 아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예술의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예술의 끝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 예술을 통 모르는 사람이 말하는 그것은 의미가 다르다바둑의 정석은 있다정석을 아는 사람만이 정석대로 둘 필요는 없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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