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702 vote 0 2004.01.08 (11:52:44)

선사와 법사가 길을 가고 있었다. 탁발행을 나섰다가 산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강물이 불어 다리가 잠겨버렸다. 한 여인이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법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음을 야무지게 다져먹으며 애원 가득한 여인의 눈길을 애써 피한다. 용맹정진의 길에 여체와의 접촉은 당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강물을 건너야 할 양이면 저 여인은 필경 어둠이 내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저 자리를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돼. 이 함정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구. 이 고비를 넘겨야지.

갈등을 애써 누르는데 돌연한 일이 벌어진다. 선사가 여인을 덥석 업더니 물에 잠긴 다리를 첨벙첨벙 건너는 것이다. 고맙다고 몇 번이나 허리를 꺾는 여인에게 가벼운 목례로 답하고 그 선사는 걸음을 재촉한다. 잠시 아연했던 법사가 입술에 맴돌던 이 말을 기어이 뱉는다. "부녀자를 업고 강 건너는 일이 수도자의 행신으로 합당한 일이던가요." 하지만 선사는 묵묵부답이다. 그냥 걷기만 한다. 그러자 법사의 음성은 이제 다그치는 기색으로 변한다. "그대가 중한 계율을 깨고 말았으니 이걸 어찌 수습하리오."

뒤돌아보며 선사가 나직이 답한다. "나는 강가에 여인을 내려두고 왔지만 그대는 아직도 마음에 지닌 채 걷고 있구료. 정녕 계율이 무섭거든 여인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구려." 이 말에 법사는 답하지 못하고 땀 흘리며 말을 더듬는다.

"아니............뭐..........저........."

게임은 끝났다. 선사의 완승이요 법사의 완패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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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이해하려면 ‘미학’을 이해해야 한다. 미학을 이해하려면 송두율식으로 말해서 ‘내재적인 접근법’을 익혀야 한다. ‘내재적 접근’이란 일정한 범위 안에 하나의 동그라미를 치고, 그 동그라미 안에서 미학적으로 완성시킨다는 의미다. 동그라미란 구조론 식으로 말하면 ‘닫힌계’이다.

선사와 법사의 예화에서 동그라미는?

법사의 가치판단 기준은 사회적인 규범의 차원이다. 선사가 말하고 있는 가치판단기준은 사회의 규범을 무시하고 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예컨대 미케란젤로가 어떤 여인의 나체를 그렸을 때 관람객이 그 그림의 음란성을 지적한다면 이는 그 그림 안에서 완성된 동그라미 안의 것을 그 동그라미 바깥으로 가져나오는 일이 된다. 이는 미학적인 일탈이다. 즉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동그라미의 바운더리의 경계선을 어디서 확정지을 것인가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무수히 이런 일들에 부닥친다. 예컨대 퇴계선생이 하루는 제자들 앞에서 온갖 점잔을 떨고 있는데 마누라가 돌연히 개입하는 것이었다.

“여보 당신은 간밤에 빠떼르자세와 옆굴리기자세 등 갖은 기술을 구사하면서 그리도 난삽하더니 오늘 제자들 앞에서는 뻔뻔스럽게도 시침을 뚝 떼고 예절을 논하고 있으니 이 모순을 어이 설명하리오?” 하고 질문하여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 퇴계가 무어라고 대답했는지는 까먹었는데.. 하여간 여기서 동그라미의 구획을 잘 설정하는데만 성공해도 인생에서 부닥치는 문제의 90프로는 풀린다고 말할 수 있다.

하여간 세상에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이 있다. 그 동그라미 안에는 일정한 논리가 있고 질서가 있으며 자기완성이 있다. 미학은 그 적절하게 구획된 동그라미 안에서 논리적인 일관성과 자기완결성을 추구하여 완성시키자는 것이다.

예컨대 미켈란젤로의 그림 안에서는 색의 논리와, 빛의 논리와, 주제의 논리와, 구도의 논리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한석봉의 그림이라면 먹의 마음과 종이의 마음과 붓의 마음과 자획의 균형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요는 미켈란젤로가 그 충돌하고 있는 빛과 색와 주제와 구도의 반란들을 어떻게 완벽하게 진압하는데 성공했는가이다. 그 색과 빛과 구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미녀의 나신이 기여했다면 그 그림은 그 그림이라는 동그라미 안에서 완성된 것이며 그것으로 그 그림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석봉의 그림이라는 먹의 마음과 종이의 마음과 붓의 마음들이 충돌하는 문제를 한성복이 어떻게 자와 획에 힘을 가하고 혹은 빼는 방법으로 자획의 엄정한 질서에서 빚어지는 강한 긴장감을 통하여 그 마찰들을 용이하게 진압하는데 성공했는지를 두고 판단하는 것이다.

추사의 글씨를 한수 더 높이 쳐주는 것은 추사체는 원래 금석학을 연구하는 중에 전서(돌글자)의 마음 즉 거친 돌의 마음을 반영하는 형태로 출발하여 다시 목판(나무로 된 현판글씨)의 마음으로 발전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와 획의 균형을 무시하게 된 데 있다. 즉 석봉이 자와 획의 맞섬에서 얻어지는 긴장감을 이용하여 먹의 마음과 종이의 마음을 잠재웠다면 추사는 역으로 그 돌과 나무의 성질을 붓에 반영하여 자와 획의 불균형들을 잠재웠다고 볼 수 있다.

즉 석봉의 글씨는 자와 획이 완벽한 균형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추사는 의도적으로 불균형을 연출해놓고 그 글씨의 바탕이 되는 목판의 마음이 개입하여 그 불균형을 진압하는 형태로 역설적인 균형을 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석봉의 글씨가 두 아이가 정답게 손을 잡고 포옹하므로서 균형으로 이끌어낸 것이라면 추사는 그 두 아이가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채 그 주변에 뛰노는 강아지와 낮잠자는 황소를 배치하는 방법으로 두 아이의 다툼이 전체적인 긴장을 유발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방법을 구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미학이란 이런 식으로 어떤 범위(계) 안에서 그 계를 구성하는 제 요소들이 서로 마찰하고 있는 것을 적절한 배치와 개입을 통한 질서부여의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진압해내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며 이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하여간 이 예화에서 선사의 말씀은 법사에게 쫑코를 줘서 말재주로 이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적절한 바운더리의 구획, 즉 동그라미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방법으로 개입할 부분과 개입하지 않을 부분에 대한 경계선의 존재를 인식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각자에겐 각자의 동그라미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기다움이라 한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동그라미의 미학적 완성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부닥치는 문제의 99퍼센트는 그 동그라미가 깨어지고, 파탄나고, 함부로 개입하고, 서로 마찰하는데 관한 문제이다. 자신의 동그라미를 찾은 자 만이 평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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