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868 vote 0 2003.12.09 (16:15:13)

김용옥 뛰어넘기

학문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른바 ‘지적 용기’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동양에서 학문의 목적은 ‘인격의 완성’에 있고 서구에서 학문의 목적은 ‘지식의 창달’에 있다. 이렇듯 가는 길이 다른 것이다. 이러한 본질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동서양을 떠나 학문의 진정한 목적은 ‘격물치지, 실사구시’가 아니라 첫째가 ‘인격의 완성’에 있고 둘째가 ‘사회의 통합’에 있으며 셋째로는 ‘자연과의 조화’에 있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서구에서 말하는 ‘지식의 창달’은 저 밑에 아랫동네에 속하는 하위 디렉토리다.

‘진리의 탐구’, ‘실증과 합리’는 지식을 대상화, 타자화 하는 것이다. 즉 학문이 인간의 밖에 있어서 인간이 그 학문과 대결하는 것이며, 이는 조각가가 돌을 상대하듯이, 화가가 캔버스를 상대하듯이, 음악가가 피아노를 상대하듯이 ‘상대가 있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답지 않다. 나와 나 아닌 것의 둘로 나누어서 이미 실패가 된다. 진정한 것은 깨닫는 것이며, 그것은 네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없는 것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각성하는 것이다.

세상은 일자로 부터 비롯되었고, 모두는 그 일자의 복제판이며, 그 일자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 구태여 밖에서 따로 구할 것이 없으며 이미 이루어져 있으므로 남은 문제는 ‘소통’ 뿐이다. 우리의 실패는 네트워크의 실패 뿐이며, 우리의 성공 역시 네트워크의 성공 외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깨달음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코드의 일치’를 의미한다. 코드(code)의 어원은 깎다(cut), 곧 ‘둘로 쪼개다’는 뜻이다. 목판을 둘로 쪼개어 하나씩 나눠갖고 있다가 나중 이를 맞춰봄으로서 약속의 증표를 삼은 데서 ‘코드’가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하나였으며, 그 최초의 하나로부터 갈라져 나왔으므로 언제든지 그 하나로 되돌아갈 수 있어야 하며, 그 하나를 회복할 수 있는 상태, 즉 잊어버린 본래를 회복하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학문의 첫 번째 목적인 ‘인격의 완성’은 그 하나를 회복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잊어버린 코드의 각성을 의미한다. 두 번째 목적인 ‘사회의 통합’은 그 짝짝이 된 하나와 하나를 맞붙여 본래를 회복함을 의미한다. 둘로 나뉘어 헤어진 각자의 쪽이 다시 만나 하나를 이룸을 의미한다.

학문의 세 번째 목적인 ‘자연과의 조화’는 그 모든 것의 시원으로서의 신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그러한 재통합의 범위을 인간사회를 넘어 자연에 이르기 까지 확대하므로서 우리는 그 최초의 일자로서의 신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김용옥의 문제는 동양학의 지평을 이러한 차원에 이르기까지 확대하지 못한 데 있다. 즉 그는 동양학의 김용옥일 뿐이지 철학의 김용옥은 아닌 것이다. 그는 시비하여 오는 상대와의 맞섬에 있어서 원전번역의 정확성으로 도피하는 졸렬함을 보이곤 한다.

이는 서양의 방식 곧 ‘진리의 탐구’, ‘실증과 합리’, ‘격물치지와 실사구시’의 차원이지 동양의 본래인 ‘인격의 완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김용옥에 도전하는 재야의 입장 역시 ‘진리의 탐구’ 차원이 아니라 인격의 문제를 제기함이다.

한마디로 ‘김용옥의 해석이 틀렸다’가 아니라 ‘그런데 니는 왜 싸가지가 바가지냐?’ 이런 것이다. 동양의 방식으로 말하면 '인격의 완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미학적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면 학문 역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 ‘내 번역이 맞소’가 아니라 ‘내 인격이 완성이오’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동양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것은 동양의 방식이 서구의 방식보다 더 그릇이 크다는 점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동양정신의 큰 그릇에 서양의 진리와 실증과 합리를 수용할 수는 있으나 그 반대로 서양의 작은 그릇에 동양의 큰 정신 곧 인격의 완성, 사회의 통합, 자연과의 조화를 수용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일자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가 쪼개어져 둘이 되면서 너와 나를 이루고 둘 사이에 코드를 남겼다. 코드를 각성하는 수단은 깨달음 밖에 없다. 밖에서 탐구함이 아니라 안에서 회복함이다. 그러한 기본 전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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