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6344 vote 0 2003.12.08 (15:14:51)

개미당 게시판의 질문에 대한 답변

뒤틀려 있는 이 나라의 학문풍토를 감안 할 때 김용옥과 같은 이단아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어렵다. 이단아이므로 손해보는 점이 있는가 하면 이단아 답게 별볼일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김용옥정도도 포용하지 못하는 학계가 비판되어야 하는가 하면, 학계를 비판하며 울타리를 넘어간 그 바깥에서 김용옥이 한다는 짓이 고작 그 정도냐는 비판을 할 법도 하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강단학계는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김용옥 또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할 만한 모범답안은 못되고 있는 것이다.

세가지 측면을 검토할 수 있다. 우선 학계와 그 방식의 평가 혹은 가치기준을 존중할 필요가 있는가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학계의 권위는 깨부셔져야 한다.

둘째 학계 바깥의 평가방법 혹은 가치기준으로 김용옥을 평가할 경우 과연 김용옥에게서 긍정평가 할 부분이 있는가이다. 결론을 말하면 역시 별로 보잘 것이 없다.

정리하면 김용옥에 대한 학계의 비뚤어진 시선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학계 바깥에서 김용옥이 대단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바도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강단학계의 바깥 즉 재야철학계에서 김용옥을 압도할 만한 거인 혹은 모범답안 혹은 바람직한 선례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역시 결론부터 말한다면 없다.

재야철학계는 오히려 김용옥에게 배워야 할 판이다. 기본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재야철학계에 비한다면 김용옥은 그래도 기본은 된 사람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1) 강단학계는 분명 문제가 있다.
2) 김용옥은 강단학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 바깥(재야철학계)으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3) 강단학계 바깥에는 재야철학계가 있다.
4) 김용옥이 강단학계와 대결하는 재야철학계의 모범적인 대안으로 자리매김 한 것은 아니다.
5) 재야철학계에서 김용옥에게 한 수 가르칠 정도의 자생적인 성과를 이끌어낸 바는 없다.

김용옥의 동양학 강의는 의외로 건조하다. 김용옥 특유의 색깔이 묻어나는 김용옥만의 그 무언가가 없다. 그 때문에 김용옥류, 김용옥학, 김용옥학파는 건설되지 못하고 있다.

김용옥의 인기는 김용옥만의 학문적 성과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의 열강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즉 그는 학문으로 뜬 경우가 아니라 탤런트로 뜬 것이다. 즉 그에게는 학문의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원 인기강사와 같은 ‘강의의 기술’이 있는 것이다.

그의 어지러운 행보들이 보여주는 것은 고뇌하는 학자의 면모가 아니라 뛰어난 강사의 면모이다.

그의 노자, 공자 강의는 굳이 평가하자면 ‘번역의 모범’을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김용옥의 번역은 재야철학계의 제멋대로 번역에 비하면 수준이 매우 높다. 이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김용옥이 금강경을 손댄다는 설이 있는데 역시 별반 기대할 것이 없다.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할 것은 비교적 정확한 번역 뿐이다.

물론 정확한 번역은 매우 중요하다. 역으로 김용옥을 비판한다는 재야철학계 일각의 딴지는 번역조차 안되고 있으므로 대략 무효.

결론부터 말한다면 자생철학이 나와야 한다. 사실 자생철학에 대해서는 학계 안팎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 논의만 되고 있을 뿐 싹수는 없다.

자생철학이 못되는 삿된 길이 세갈래 있는데 하나는 강단철학이고 둘은 대중철학이고 셋은 생활철학이다.

강단철학은 업종이 번역업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철학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역관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가 서구의 철학을 국내에 소개했을 때 국내의 연구가가 그 학문적 깊이를 조금 더 해볼라치면 “니는 원전도 모르면서”하는 반박이 날아오게 된다.

원전을 알려면 그 나라에 유학을 가야하고 그러다보면 ‘언어’ 가지고 씨름하다가 볼 일 다 보게 된다. 학문의 깊이를 더할 시간적 여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과거 중국에서 선종이 발달한 것이나 한국에서 원효나 퇴계, 율곡이 학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나 주자와 양명이 새로운 학풍을 진작할 수 있었던 것은 원전에 얽매이지 않고 적당히 토착화시키면서 변조시켰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 변주가 불가능한 것이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변주를 해볼라치면 원전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이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원전이 되는 서구의 스승에게 누를 끼치더라도 밀고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충실한 제자가 되어 번역업이나 할 것인가이다.

아들러와 융은 스승인 프로이드를 씹어서 떴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그것이 불가능하다. 만리 밖에 있는 스승을 씹으려면 “니는 독일어도 제대로 모르면서”하는 반박이 날아오고 여기에 재반박을 하려면 어학공부에 시간을 십년은 허비해야 한다.

결국은 ‘스승의 학문에 누가 되지 않게 번역에나 충실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나라에서 서구의 학문적 성과를 계승하는 형태로는 자생철학이 나오기 어렵다.

그렇다면 서구의 학문적 성과와는 담을 쌓고 동양학 안에서 성과가 가능할 것인가? 강증산이나 쫓아다니고 원효나 퇴계를 디벼보면 뭔가 나올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는 우선 서구의 근대과학과 동양학의 전통을 적대적인 관계 곧 이항대립의 구도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 한계를 넘어설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이 거대한 성문의 빗장을 누군가가 열어주지 않으면 동양학의 일보전진은 물리적으로 불가하다. 예컨대 서구의 방법론으로 공자 맹자를 논한다는 것은 맹랑한 수작이 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서구 근대과학과 동양학의 전통을 이항대립적 구도로 파악하는 한 동양학은 일보의 전진도 어려우며 자생철학은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과학과 동양학의 전통을 적당히 섞어서 짬뽕을 만들어볼 것인가? 이 또한 가당치 않다. 그 발상법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며 그 벽은 매우 높고 공고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양학의 전통 중 하나는 학문의 목표를 인격적 완성에 두고 있다. 서구 근대과학의 경우는 학문의 목표를 사물의 이치를 따져 밝히는데 두고 있다.

여기서 근본적인 딜렘마는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는 엔트로피의 법칙 곧 비가역성의 원리다. 다시 말해서 서구의 작은 그릇에 동양의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구의 근대과학을 동양의 철학적 전통으로 재해석 하는 것이 오히려 빠르며 동양의 전통을 서구의 근대과학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얼빠진 짓이 된다는 점이다.

요기서 더 이야기 하면 구조론 나와야 하기 때문에 딱 말을 접음.

참 위에서 빠뜨린 거 ..

삿된 길 세갈래 중 대중철학과 생활철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는데 대중철학은 아무데서나 노자 장자를 파는 재야철학계의 허접한 소리들을 말하고, 생활철학은 에세이집이나 내면서 철학한다는 김태길교수 하고 또 저서를 수백권이나 냈다는 안병욱 교수 기타 등등 많은데 대개 허투루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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