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4272 vote 0 2003.12.04 (20:39:36)

나그네21님의 말씀을 듣고 오행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오행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할 학문의 깊이가 있지 않다고 생각되므로 대략 생각한 바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요는 오행이 맹랑한 이론인건 분명한데 그 터무니 없는 주장이 어떻게 수천년이나 명목을 이어왔을까입니다? 잘 살펴보면 구조론과 닮은 점이 있어요.

오행의 상생관계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입니다. 근데 왜 목이 1번일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여간 순환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순환이면 일단 가짜지요. 이전에 말했듯이 진리는 1원이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

예컨대 금생수라 .. 금에서 물이 나온다는건 도무지 이해가 안돼재요. 어디서 듣기로는 금(쇠붙이)을 밤에 야외에 던져두면 이슬이 달라붙는데, 이것을 보고 금에서 물이 생겨났다고 생각했답니다. 터무니없지요. 이슬이 쇠붙이에 잘 생기는건 분명하지만 돌에도 생기고 나뭇잎에도 생깁니다. 야외에서 밤을 꼴딱 세워 보신 분은 알겠지만 밤에는 공중에서 그냥 이슬이 생겨요. 옷이 축축해지죠. 결론적으로 ‘금생수’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겁니다.

근데 ‘금생수’가 근거가 없다는 판단은 오행을 처음 지어낸 사람도 했을 터인데, 왜 그런 터무니 없는 억지를 썼을까요? 거기에 뭔가 이유가 있다 이겁니다. 즉 오행을 잘 검토해 보면 구조론과 닮은 점이 있는데 구조론은 ‘질>입자>힘>운동>량’입니다. 이 진행순서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토>금>수>목>화’입니다.

● 질>토 .. 질은 바탕인데 토는 땅이고 땅은 바탕이므로 유사한 점이 있지요.
● 입자>금 .. 입자는 프레임을 의미합니다. 뼈대이죠. 금이 단단하므로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 힘>수 .. 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는 점에서 물의 성질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 운동>목 .. 운동은 움직이는 건데 목은 생명이고 생명은 움직이므로 관련이 있지요.
● 량>화 .. 량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어떤 대상에 침투해 있습니다. 불도 비슷하지요. 장작이 없으면 탈 수 없다는 점에서 불 역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볼 수도..

대충 비슷한 점들이 있습니다. 오행이 맹랑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의 생명력을 이어온 것은 구조론과 닮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뜬금없는 ‘금생수’는 무엇인가? 즉 쇠에서 물이 나온다는건 터무니 없는 주장이고.. ‘입자>힘’이므로, 프레임의 성질을 가진 ‘금’ 다음에 ‘힘’의 속성을 가진 ‘물’을 위치시키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죠.

다시 말하면 오행을 창안한 사람은, 물이나 나무의 성질을 관찰하여 보고 이를 귀납하여 오행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 구조론적인 인과관계를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다 원소(5행)들을 대입한 결과라는 말이죠. 이건 명백히 연역입니다.

즉 귀납의 방법을 따라 먼저 원소를 정해놓고 그 원소들을 관찰하여 이론을 정립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론을 먼저 얽어놓고 거기에 적당한 원소를 짜맞추기 방법으로 대입한 결과라 이겁니다. 여기서 이론이 먼저면 연역, 원소가 먼저면 귀납.

근데 원소가 먼저이면 금생수 같은 터무니없는 중간고리가 끼어들 수 없지요. 그러므로 이론이 먼저이고, 이론이 먼저이므로 연역입니다. 잘 보면 ‘토금수목화’는 인과관계의 사슬로 얽혀 있어요. 제가 상생상극론이 귀납이 아닌 연역적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바 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기름은 물리적으로 보면 분명 ‘물’에 속하지만 오행으로 따지면 아마 ‘목’으로 분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름은 불에 잘 타니까요.(기름이 목인지 수인지는 제가 모르지만) 즉 상생상극론은 귀납적 방법이 아닌 연역적 방법을 상당부분 사용했다는 겁니다.(그러나 오행의 원소, 원자론은 명백히 귀납적 발상임)

이상 언급한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은 상생관계이고, 반대로 상극관계로는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인데 구조론과 비교하면 상생관계는 인과관계로 직접 연결되어 있는 반면 상극관계는 두칸씩 뛰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칸을 띄워 놓았다는 것은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단절시켰다는 거죠. 그렇다면 상극에도 뭔가가 있는 겁니다. 뭘까요?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 목극토(木剋土) .. 이건 귀납적 요소가 많습니다. 토극수.. 흙이 물을 이긴다? 흙으로 댐을 막아서 홍수를 막는다? 이건 넘 웃긴 결론이고.. 수극화.. 물이 불을 끄는 건 아니죠. 불은 소화기가 끄는 거고.. 과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물은 불을 방해할 뿐입니다. 기름도 어떻게 보면 물인데 불을 끄긴 커녕 돕죠. 흙도 불을 끕니다. 금도 불을 끄죠. 금가루를 퍼부으면 불이 꺼질 것.. 금극목은 금으로 만든 도끼가 나무를 자른다는 건데 도끼가 자르는 것이 아니라 실은 사람이 자르죠.. 돌도끼로 자르면 토극목이 되나요? 맹랑한 주장입니다.. 목극토.. 나무가 흙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실은 이용하는 거죠. 목과 토는 상생이라 해도 할말없을걸요. 그러므로 상극관계는 대개 엉터리로 볼 수 있습니다.

구조론으로 돌아가 볼까요. 구조론은 대략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토극수(土剋水).. 질>힘 .. 결합이 교섭을 이긴다.
수극화(水剋火).. 힘>량 .. 교섭이 침투를 이긴다.
화극금(火剋金).. 량>입자 .. 침투가 독립을 이긴다.
금극목(金剋木).. 입자>운동 .. 독립이 변화를 이긴다.
목극토(木剋土).. 운동>질 .. 변화가 결합을 이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제법 말되는 군요. 주요한 점은 두칸씩 뛰우는 방법으로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즉 위 질-힘, 힘-량, 량-입자, 입자-운동, 운동-질은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으므로 서로 배척한다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냥 관계가 없는 거죠.

예컨대 ‘질량’이라고 해서 양과 질은 가깝습니다. 그 이유는 양을 측정하는 방법이 질이고 질을 판단하는 방법이 양이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는거죠. 근데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는 인간의 작위가 개입해 있고 연역관계로 보면 양과 질은 굉장히 거리가 멉니다. 다만 양과 질은 다른 층위에서 만나고 있는데 그 층위를 무시하고 보면 가깝게 보이는 거죠.

같은 층위 안에서는 양과 질은 극단입니다. 서로 만날 일이 없어요. 다만 량은 침투하고 질은 결합하는데 침투와 결합은 비슷하므로 연결이 되는 거죠. 단 다른 층위, 다른 차원, 다른 계에서. 즉 구조론적 연역순서로는 질>입자>힘>운동>량으로 질과 양은 가장 거리가 멀지만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으로 1사이클이 끝나면 다른 층위에서 다시 질이 시작되므로 그 층위를 넘어서서 보면 가까운 겁니다.

비유하면 1학년 9 의 60번 학생과 2학년 1반의 1번 학생이 학년이 다르고 반이 달라서, 가장 거리가 멀지만 운동장 조회를 하면 바로 뒤에 줄을 서죠. 1학년의 맨 뒤에 있는 사람과 2학년의 맨 앞에 있는 사람이 가까운 겁니다. 이렇듯 양과 질의 관계는 멀고도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래서 양에 해당하는 ‘화’와 질에 해당하는 ‘토’가 만나는 겁니다. 근대 오행에서는 그 1사이클의 층위가 무시되고 바로 연결되어 순환이 되므로 대략 무효.

그러므로 오행의 목화토금수는 구조론의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와 비슷한 데가 있고 이는 옛 선인들이 경험을 총동원하여 연역과 귀납을 대충 얼버무려 놓은 것입니다. 그 오행이론이 엉터리임에도 소발에 쥐잡기로 간혹 들어맞은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부단히 오류시정을 하다보니 우연히 구조론과 비슷하게 논리정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생관계는 인과관계의 사슬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연금술이 과학이 아니듯이 오행은 과학이 아닙니다. 연금술에 일부 과학적 요소가 있듯이 오행에도 구조론적 요소가 일부 있습니다.

사물의 성질은 이 다섯 밖에 없습니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그리고 여기서 1사이클이 끝납니다. 질에서 양으로 가는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없습니다. 있다면 인식론에만 있습니다. 자연에는 없어요. 마르크스가 양질전환을 이야기하듯이 양에서 질로 가는 경우가 간혹 눈에 보이는데 그게 귀납이지요. 그건 층위 곧 차원 곧 계, 곧 1사이클을 무시한 오류입니다.

기차 두 대가 연이어 가는데 앞에 가는 차의 맨 뒤에 객차와 뒤에 오는 차의 기관차가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같은 소속의 차가 아니라 다른 차이므로 양질전환은 대략 무효, 마찬가지로 오행의 화생토도 대략 무효.

오행을 구조론에 대입하면 토금수목화에서 1사이틀은 끝. 그 성질은 결합, 독립, 교섭, 변화, 침투이고 그 침투가 다시 결합으로 되지는 않음. 왜? 엔트로피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근데 양질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흔히 착각되는 이유는? 화생토로 착각되는 이유는?

양의 성질 곧 침투 때문입니다. 양은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항상 어딘가에 침투해 있는데 다른 층위의 질에 침투해 있기가 보통입니다. 예컨대 자동차의 운동의 결과로서의 양은 자동차가 아닌 도로에 바퀴자국으로 남아있습니다.

즉 자동차의 운동을 자동차가 아닌 도로에서의 거리를 측정하여 량을 판단하므로 착각이 일어나는 거에요. 즉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린 자동차의 운동량을 자동차가 아닌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도로길이 400키로로 판단한다 이겁니다. 이는 양의 침투성질 때문입니다.

양은 언제나 침투하며 침투하기 때문에 판단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운동이나 힘은 판단할 수 없어요.

“자동차의 운동이 얼마요?”
“자동차의 힘은 얼마요?”

자동차의 힘은 100마력이고 운동은 500키로라 칩시다. 이걸 어떻게 판단하느냐? 판단불가에요. 판단하려면 계측장치를 통과시켜야 하는데, 계측장치를 통과시키려면 침투를 해야하고 침투는 양이 하거든요. 고로 휘발류가 소모된 양을 보고 역으로 추론하여 힘과 운동을 판단하는거죠. 힘과 운동은 그 자체로는 판단이 안됩니다. 왜? 측정하려면 침투해야 하는데 침투가 안되므로.

침투는 오직 양입니다. 그러므로 양으로 운동을 판단하고, 운동으로 추론하여 힘을 판단하는 거죠.

결론적으로 구조론의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양은 침투한다.” 이 원리만 알면 대략 오행이 왜 연금술임에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재요.

토는 결합하고, 금은 독립하고, 수(물)은 교섭하고, 목은 변화하고, 화는 침투한다.. 대충 그 속성이 닮았지요. 이는 상생론이 인과론의 연역적 사슬구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원자론과 같은 귀납적지식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긴 하지만 오행설을 연구하는 사람은 대개 귀납적 방법으로 접근하므로 대략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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