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4338 vote 0 2004.09.07 (22:14:16)

어쩌다 글을 쓰기는 썼는데 읽어줄 한명의 독자가 없어서 2년 간이나 내 컴퓨터 하드디스크 속에 잠자고 있다면 실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소.

비록 철 지난 글이기는 하나 여운이 오래가는 구절이 몇 있기로 약간 손을 보아 게시판에 올려보기로 하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쓴 글입니다. 지금 상황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일부는 고쳤습니다.』

40여명이나 되는 투숙객을 무형의 노끈으로 꽁꽁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 나 한 사람만 자유롭게 연극을 펼치는 방법을 쓰기로 한다. 주인을 불러 말한다.

『내가 오늘 하루에 700여리나 되는 산길을 갈 텐데 아침을 더 먹고 갈 것이니 밥 일곱상만 차려다 주시오.』

하여 밥 일곱 상을 놓고 한 두그릇 분량을 먹다가 숟갈을 던지며 혼잣말로. 『오늘은 먹고 싶었던 원수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들어가지를 않는구나.』하고 일 처리에 착수하였다. [백범일지]

백범이 1896년 2월 하순 대동강 하구 안악 치하포의 한 객주집에서 왜놈 간첩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을 타살하는 장면이다. 상민 출신의 지도자 김구가 무지한 상민을 다루는 방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한 끼에 밥 일곱그릇을 먹고 하룻밤에 칠백리를 가는 이인(異人)으로 보이게 연극하여 민중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 버린 것이다. 이는 민중 속에 녹아 들어가서 체화된 민중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다.

민중에 환상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서민 출신의 지도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이런 것도 강준만이 보면 마키아벨리즘이 될지 모르겠다)

백범과 노무현에게는 확실히 민중을 다루는 기술이 있다. 민중의 지도자만 가지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이후 백범이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르는 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연극적인 요소가 있다.

지식인이라면.. 지식인 사이의 토론과 교우관계에서 얻어지는 평판에 의해 인물이 부상한다. 즉 인맥 만들기다. 그러나 민중은 평등하므로 설사 뛰어난 지략이 있다손 치더라도 남의 윗자리에 오를 수 없다.  

문화일보 김용옥기자가 지적한 바 있듯이 노무현은 즉흥적인 자기연출이 뛰어난 사람이다.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과정에도 그러한 연극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민중이 노무현을 오해하는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민중의 노무현에 대한 틀린 예측을 깨뜨려 보이므로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도리어 크게 감동을 주는 장치가 있다.

유권자들이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가 불발할 것으로 예측하는 상황을 방치하였다가 그 틀린 예측을 깨뜨려 보이므로서 감동을 안겨주는 방법을 쓴 것이다.  

엘리트 출신 지도자는 자신을 키워주는 조직의 보호를 받는다.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는 서민출신의 지도자는 그러한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면 한 순간에 날아가는 수가 있다.

페루의 후지모리,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인도네시아의 와히드,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한국의 노무현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는 대중적 인기를 누린 서민적 이미지의 지도자였다는 점, 둘째는 탄핵을 당했다는 점이다.

서민 출신의 지도자는 언제나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엘리트출신 지도자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서민 출신의 지도자에게는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다.(어쩌면 탄핵은 노무현대통령의 당선 시점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후지모리, 에스트라다, 와히드는 '몽'스럽고 '100단어'스러운 대중적 인기에 편승하다가 쫓겨났고 차베스와 노무현은 살아남았다. 왜 앞의 셋은 쫓겨났고 뒤의 두 사람은 승리자가 되었는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노무현은 인기(지지도)에 연연하지 않는 지도자라는 점이 다르다. 몽스럽고 발끈해스러운 대중적 인기에 연연한 자들은 쫓겨났다. 백범이 가졌던 그 무엇이 있었던 차베스와 노무현은 승리하고 있다.  

탄핵은 당선 시점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유비가 조조의 식객으로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시험하여 볼 요량으로 영웅론을 편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유비 당신과 나 조조 두 사람 뿐이오. 하찮은 원소의 무리 따위는 염두에 둘 필요도 없소.”

유비는 흠칫 하며 젓가락을 떨어뜨린다. 때마침 먹구름이 끼며 천둥소리가 들린다. 유비는 짐짓 천둥소리에 놀라는 척 한다. 조조는 유비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버린다. 이것이 서민출신 지도자의 생존술이다.

일단은 살아남고 보아야 한다. 백범은 종종 일부러 겸손한 행동을 하여 상대방이 백범을 얕보도록 한다. 그것이 아주 체질이 되고 습관이 되어 있다.  

백범은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 후에도 이웃 마을 양반 강.이씨를 방문해서는 예전의 김창수로 돌아가서 상놈이 양반을 대하는 예를 갖추므로써 상대방을 마음으로부터 굴복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엘리트라면 지식인 사회의 평판과 공론에 의해 정해지는 서열에 의지할 수 있다. 자신의 지위를 드높일수록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애써 얻은 지위가 한 순간에 날아갈 수 있는 민중의 지도자라면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지 않으면 안된다.  

출신성분은 절대로 속일 수 없다. 서민 출신의 지도자는 자신의 지위를 높일수록 위험도 같이 커진다. 한 걸음씩 계단을 밟고 오르기는 불가능하다. 가만이 엎드려 있다가 한순간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한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10여년전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를 쓸 때부터 대통령에 도전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민주당 내부에서 계보를 만들거나 우군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왜?

야심을 숨겨야만 살아남는 것이다. 노무현이 후보가 된 이후 자기 당의 동료의원들로부터 어떤 일을 당했는지를 보라! 이인제나 정몽준, 혹은 이회창이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노무현에게만 일어난다.

서민 출신 지도자의 숙명이다.

(조직의 보호를 받지 않고, 대중적 인기에만 편승하려는 지도자는 하극상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또 다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면전에서 모욕을 가하는 방법으로 한방에 보낼 수 있다. 정몽준도 박근혜도 한방에 가는 수가 있다.

몽은 이미 갔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다. 노무현은 그 죽음의 한방을 사전에 예견하고 충분히 대비했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박근혜도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대중적 인기만 믿고 설치는 유형에 속한다. 벌써부터 당내의 하극상을 당하고 있다.)


천명을 받은 백범 김창수
『애야! 네가 이제 잡혀가서는 왜놈 손에 죽을 테니 바닷물에 뛰어들어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우리 모자(母子) 같이 다니자.』

나는 황송무지한 중에 어머님을 위안한다. 『어머님! 저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백범일지]

치하포에서 왜놈을 타살한 후 집으로 돌아와 체포를 기다리다가 3개월만에 체포되어 배를 타고 인천의 감옥으로 끌려가는 중의 일이다. 강화도를 지나던 중 일본 순검들이 잠든 틈을 타 어머니 곽낙원여사가 동반자살을 권유하자 백범이 뿌리치고 있다.

백범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은 '천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천명'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한 개인의 분노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국모보수'의 명분은 가슴에 쌓인 분노를 폭발시키기 위하여 찾아낸 구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요는 한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 세상과의 관계 맺기에 성공하느냐이다.  

상민의 아들로 태어나 양반들에게 괄시받으며 자랐다. 명성황후 시해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여 가슴 한켠에 쌓인 울분을 폭발시킨다. 세상을 향하여 고함쳐 외친다.

그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다만 하나의 커다란 외침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허나 그 시점부터 청년 김구의 운명은 김구 자신이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동기야 어떻든.. 세상과 빼도박도 못하는 관계를 맺어버린 것이다. 25시적 상황이다! 24시는 인간의 시간, 인간의 시간이 다하면 그때부터는 '신의 시간'이다.

기어코 운명의 주사위를 던져버린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김에도 마음의 절차가 필요하다. 백범이 강화도 앞바다데서 어머니의 자살권유를 뿌리친 사건이 그 마음의 신탁이 되고 제의가 된다. 이런 사건은 잘 잊어지지 않는 법이다. 거듭 반추되며 일생을 두고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인간의 인격적 성숙은 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조용한 내면의 성찰로 되는 것 또한 아니다. 10년을 두고 책을 읽어서 이 경지에 오를 수 없고, 100년 도를 닦아도 이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참된 것은 현실에서의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거듭 반추되고 되새겨진 끝에, 마침내 그것이 익숙한 습관이 되어, 몸에 맞는 옷처럼 자연스러워지고서야, 어떤 위기 순간을 당하여 위대한 결단으로 빛나는 것이다.  

무엇인가?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에서 필요한 것은 필부의 용맹도 아니고, 지사의 명예심도 아니고, 지식인의 냉철함도 아니다. 자존심도 명예심도 목숨의 위기 앞에서는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는 법이다.

소년기의 체험이 거듭 반추된 끝에 어떤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르매.. 그렇게 실천하지 않음이 몹시 불편하고 어색하여 더는 참을 수 없게 될 때, 그 어색함을 못 이기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다.  

단련되어야 한다. 부단히 연습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에서의 체험에서 얻어져야 진짜다.

선을 추구해서는 결코 선해질 수 없다. 악을 불편해 하여 기어이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 악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감에 의해 비로소 인간은 선해지는 것이다.

이후로도 김구의 삶에는 기적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무수히 일어난다. 목숨을 던져 결단을 내릴 때마다 역설적인 성공을 얻는다. 그러한 이적들을 겪으며 김구의 내면세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에 야심가 김구가 사상가 김구로 거듭난 것이다.

고능선선생의 가르침대로 벼랑에서 잡은 가지마저 놓았을 때, 야심가 김구는 죽었다. 이에 새로이 탄생한 김구의 삶은 김구 개인의 것이 아니요 이 나라의 것, 겨레의 것, 역사의 것이 되었다. 내 운명이 내 의지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노무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고상하게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악을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악을 못견뎌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진짜다.  

학습으로 도달할 수 없고 수행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지식인도 도달할 수 없고 도인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 

'천명을 받은 지도자'는 있다. 세상과의 관계맺기다. 기어이 운명을 하늘에 맡겨 버린다. 내 운명이 내 의지의 차원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도달하는 것이 있다. 오직 켜켜이 쌓여지고 거듭 반추된 체험으로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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