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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9936 vote 0 2004.08.25 (16:22:25)

나는 노무현주의자다. 노무현주의자 아닌 ‘노빠’들을 도처에서 만난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 노무현의 ‘자궁’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대통령 노무현이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인간 노무현이 부모도 없는 고아로 보인다. 그들은 고아인(?) 노무현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은 선의(善意)를 가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노무현을 돕고자 나선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그들은 ‘기회주의자’로 보여진다. 중간에서 끼어든 세력으로 보여진다.
 
자궁을 갖지 아니한 채로 태어난 아이는 없다. 노무현은 부모 없는 천애고아가 아니다. 노무현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노무현은 위대한 대한민국 5천년 역사의 산물이요, 반만년 역사에서 주요한 하나의 성취요, 도도한 시대정신의 항해과정에서 얻어진 굵직한 하나의 매듭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아는 노무현은 백범의 아들이요 함석헌의 조카이며, 장준하의 후배이다. 그는 결코 돌출적으로 출현한 고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 순수한(?) 마음의 노빠들이 노무현을 가로챌 수 없다. 누구도 노무현을 독점(?)할 수 없다.
 
백범주의자가 아니면서 노무현주의자일 수 없다. 장준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노무현을 말할 수 없다. 반만년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노빠일 수 없다.
 
물론 이상은 나의 혼자만의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믿는 백범주의, 노무현주의의 완성을 위해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설사 대통령이 노무현주의를 버린다해도 나는 노무현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노무현이 내게로 오기 이전부터 내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21세기는 무엇인가?
21세기는 ‘인문주의’‘반지성주의’ 간의 투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문주의라면 아무래도 지식인이 그 전위가 된다. 반지성주의는 부시의 야만을 통해 폭로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모순과 아이러니가 있다. 예컨대 중국의 혁명과정은 지식인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문화혁명은 일종의 ‘지식인 사냥’이었다.
 
비슷한 예는 북한과 구소련에서도 있었다. 스탈린은 지식인을 대량학살한 장본인이다. 그 흐름 역시 반지성주의의 일종으로 본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지식인이 전위가 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반지성, 반지식의 경향을 일정부분 포함하고 있다. 파시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주의 안의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뉴튼의 기계론적 사고, 곧 요소환원주의적 발상이 그 뿌리가 된다. 원자론적 발상이 문제다.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의 과도한 의존’ 말이다. 민노당의 한계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시스템에의 지나친 의존이 가지는 반인간, 반지성주의 경향 말이다.
 
거기에 파시즘의 요소가 일정부분 잠복해 있다. 박정희의 독재 또한 반지식, 반지성의 경향을 숨기지 않은 노골적인 파시즘이었다.
 
지식인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이민을 가야 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독일에서 광부가 되어야 했고 미국에서 접시닦이가 되어야 했다.
 
우리는 파시즘이라는 이름의 노골적인 반지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잠복한 반지성주의 사이에서 협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대안은 무엇인가? 물론 여기에는 많은 토론과 대화가 필요하다. 필자가 임의로 선언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나는 심중에 있는 것을 기회가 닿는대로 피력하고자 한다.
 
누가 세계 인문주의의 새 장을 열어제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21세기 인터넷 ‘신문명시대의 집현전’을 열어 인문학의 부흥을 알릴 것인가?
 
누가 지구촌 인류를 전쟁의 야만과, 자본의 비인간성과, 종교의 편협으로 부터 구하여 보편적 지성이 제안하는 바, 인류의 보편가치로 귀일하게 할 것인가?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오! 강단에서 뛰쳐나온 훌륭한 지식인이? 아니오! 혁명의 이름을 파는 한 노동자가? 아니오!  
 
힘은 세 곳으로 부터 나온다. 하나는 총구 곧 권력이다. 둘은 자본 곧 시장이다. 다른 하나는 지식이다. 누가 이들, 세 힘들 사이에 '균형과 질서'를 부여할 것인가?
 
후진국은 독재의 총구가 대거 먹고 있다. 선진국은 자본이 크게 먹고 있다. 정답은? 그 어디에도 없다. 대안은? 이제부터 하나씩 만들어가야 한다.
 
마르크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밑바닥에서 부터 물적 토대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신돈과 정도전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신돈은 공민왕과 손을 잡았고, 정도전은 이성계와 손을 잡았다. 물론 팽을 면하지 못했다. 지식인은 언제나 팽 되는 운명이다.
 
혁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식인은 '점화'의 역할을 맡지만 곧 제거되고 만다. 지식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다. 결국은? 힘을 가진 자가 먹는다.
 
누가 최종적으로 먹는가? 산업화시대에는 자본이 대거 먹고 있다. 왜? 사회변화의 동인이 되는 힘이 자본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지구촌에서 사회변혁의 동력원이 되는 본질적인 힘이 자본에서 나오는 비중이 가장 크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정보화시대에는 누가 먹는가? 지식인이 다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지식인은 소수이고 가진 힘도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지식인이 제 몫을 주장하며 머리를 디밀게 되는가?
 
지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가? 미디어다. 인터넷과, 방송과, 영화와, 문화분야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언제 가능한가? 우리의 철학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고, 문화가 바뀔 때 가능하다.
 
역사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선례를 발견할 수 있는가? 있다. 예컨대 종교국가는 어느 면에서 지식인(사제, 승려) 집단이 지배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물론 승려를 지식인으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유교사회는?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선비’라 불리는 집단은 일종의 지식인집단이다.
 
조선은 일정부분, ‘지식인 사회의 공론’에 의해서 사회질서가 유지된 측면이 분명히 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러한 가능성을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식인의 공론에 기초한 ‘보편적 상식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는 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국경도, 종교도 넘어서야 한다. 지식이 대중화된 사회, 전 인류가 지성인이 되는 사회는 가능하다. 보편적 상식의 합의가 공론을 도출하여 이끌어 가는 사회는 가능하다.
 
그것이 백범이 말한 ‘문화국가의 비전’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회 현실에서 ‘보편적 지성에 의한 지배’와 가까운 인물은 대학총장이다. 그러나 대학 총장이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카톨릭의 김수환추기경이나, 기독교의 조용기목사나, 조계종의 법전스님이 나름대로 큰 세력을 하나씩 형성하고는 있지만 절대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수 없는 것과 같다.
 
본래 지식, 혹은 종교의 힘과, 시장 혹은 자본의 힘과, 군대의 힘이 있었다. 민주화로 하여 군대의 물리력은 독재국가나 왕조시대의 전설로 되었다.
 
현재로는 유권자인 시민, 그리고 그 시민을 소집하고 있는 정당과, 그 정당이 표방하는 계급성이 과거의 군대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첫째 자본의 힘과, 둘째 지식의 힘과, 세째 시민을 소집하고 있는 정당의 계급성이 가지는 힘이 마주치는 정점에 위치한 자가 대통령이 된다.
 
누가 지식과, 자본과, 계급이라는 세가지 파워가 마주치는 꼭지점에 서 있는가?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가지 힘에 '균형과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한 이 과정에서 자본과 계급성이 가지는 힘에 대해 ‘지식의 우위’ 라는 원칙을 견지해낼 수 있는가? 나는 백범이라고 본다. 왜?
 
백범의 정치적 성장과정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또 노무현이라는 한 인물의 정치적 성장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권영길과 민노당은 계급성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먹물에 불과하다. 지식을 얻은 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노동자 계급과의 제휴를 통해서 얻으려 한다.
 
소집되지 않은 시민은 시민이 아니다. 조직되지 않은 계급은 계급이 아니다. 한나라당은 중산층계급의 대표성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본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은 시민에 의해 소집된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정당의 시스템 내부에 소집과정과 절차가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재벌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이 사회에는 실질적인 세가지 힘이 존재한다. 지식의 힘, 소집된 시민의 힘(정당), 자본의 힘이 그것이다.
 
보수정당은 대개 지식인 집단의 변방세력이라 할 종교집단과 자본의 결합체이다. 진보정당은 학교를 중심으로 한 지식과 일정부분 소집의 형태를 갖춘 계급대표성의 결합체이다.
 
지식의 일부는 종교의 형태로 주로 보수정당과 제휴하고 있고, 또 다른 일부는 학교와 언론의 형태로 진보정당과 제휴하는 경향이 있다.(조중동은 언론도 아니므로 논외.)  
 
서구정신의 한계와 동양정신의 대안
서구중심 인문주의의 한계는 기독교의 한계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사상의 저변을 이루는 원죄의식과 말세사상에 기초한 비관론적 경향과 현실도피적 태도 말이다.
 
기독교의 영향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서구지성은 기본적으로 비관적 전망을 제시한다. 지식이 제안하는 최대한은 과거의 ‘성찰’에 그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서도 원죄의식을 가진다. 원죄의식에 따른 반성과 참회가 서구 지성사가 제안하는 유일한 대안 비슷한 것이다.  
 
반성과 참회, 그리고 성찰을 지식의 경쟁력으로 해서는 인문주의에 미래가 없다. 그들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기독교사상의 선과 악에 관한 이원론적 사고 또한 버려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이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요소환원주의, 기계론-결정론적 태도가 가지는 한계와 더불어 서구정신의 한계를 근본에서 규격하고 있는 틀이다.
 
동양정신의 대안은? 물론 동양정신에도 유교주의의 이원론적 경향이 문제가 된다. 모든 차별과 독선의 밑바닥에 유교주의 가치관의 이원론적 경향이 도사리고 있다.
 
불교철학과 도교사상의 현실도피적 태도 역시, 내세구원을 희구하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대안의 부재에 해당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동양정신에서도 일원론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서구정신의 비관적 전망을 극복하고 낙관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씨앗이 동양정신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최근의 녹색당 붐이나 환경운동 혹은 일각에서 말하는 율려사상 어쩌구 하는 모색들도 대부분 기독교 말세사상의 변주에 불과한 측면이 있다.
 
현실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를 낙관할 수 있어야 한다. 긍정적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로소 대안을 말해야 한다.
 
기계-결정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즉, 시스템에 집착하여 일정부분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고 반지성주의의 태도를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인문주의의 부흥이 도래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신지식인 중심의 집현전이 필요하다. 인터넷에 의해 대중화되고 보편화된 신지식에 의해 그 역할이 수행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지식인이 강단의 ‘위’에서 광장의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한 그들은 절대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강단의 그들에게는 민중이 물가에 내놓은 어린이로 보여진다. 그들에게는 온통 걱정과 노파심 뿐이다. 그들은 강준만처럼 비관한다.
 
눈높이를 낮추어야 한다. 민중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아야지만 하늘이 보인다. 아래에서 위를 향해야만 미래가 보인다.
 
그제 대안이 보이고 전망이 보인다. 비로소 낙관할 수 있다.
 
결론하면.. ‘무엇으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가’이다. 종교로? 아니다. 자본으로? 아니다. 소집된 시민의 파워로?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아우르는 그 무엇이 있다.
 
자궁이 없이 태어난 자식은 없다. 우리는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군대가 아니다.
 
‘누가 우리를 소집하였는가’를 생각하라! 나는 그것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가 만들어낸 저력이라 믿는다. 그 바닥에서의 힘이 백범을 낳고 장준하를 낳고 노무현을 낳았다고 믿는다.
 
노무현의 얼굴을 바라보지 있지를 말고, 노무현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지점을 포착하여 보라는 말이다.
 
도올 김용옥이 노상 표현해 내려고 애써 얼굴을 찡그리고 목의 울대를 세우고 있으나, 종내에는 표현이 어색하여 마침내 온전히 전달하는데는 실패하고 마는 바로 그것 말이다.
 
노빠를 자처하는 기회주의자들
그들은 노무현이 고아라고 믿는다. 그들은 고아인 노무현이 우연히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고아인 노무현을 보호하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고아인 노무현이 길에서 우연히 지갑을 줏었다고 믿는다. 고아 노무현은 그 지갑에 든 자산을 잘 관리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선의에서 비롯한 도움 제안을 거절하고, 추종자들과 더불어 비뚤어진 길을 가고 있다며 화를 낸다.
 
누가? 기회를 잡지 못한 기회주의자 강준만. 기회를 잡을 뻔 했다가 기회를 놓친 기회주의자 정진수. 기회를 잡는데 성공한 기회주의자 김우식. 아니다. 이들은 진짜가 아니다.
 
노무현은 고아가 아니므로 선의에서 비롯한 그들의 제안은 처음부터 넌센스. 오늘 노무현의 존재는 이 나라 반만년 역사가 진통 끝에 잉태한 거대한 성취였다.
 
그 뿌리가 깊고 샘이 깊었다.
 
노무현 이전에 도도히 이어온 맥과, 노무현 이후에 꽃피울 전성시대와 그 웅대한 흐름에서 답을 찾지 않고, 대통령 노무현 한 개인에 집착하여 말하는 자는 모두 기회주의자다.
 
노무현이 얻은 지갑은 백범과 함석헌과 장준하가 물려준 것이다. 무수한 노무현주의자들이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개입하여 왈가왈부할 계제가 못된다.
 
따지려면 대통령 노무현에게 따지지 말고 반만년 역사의 노무현주의에 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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