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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330 vote 0 2004.09.01 (15: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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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월 초, 시사월간 피플(www.zuri.co.kr) 9월호에 기고한 글을 일부 첨삭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몽골이나 흉노, 혹은 선비족의 부족집회를 뜻하는 쿠릴타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연락을 맡은 사자들이 동분서주하며 초원에 흩어져 사는 각 부족의 장로들에게 쿠릴타이의 소집을 알린다. 부족의 전사들이 가족을 대동하고 마차를 몰아 옛 부터 신탁을 들어왔던 신성한 솟대 주변에 모여든다.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에 화려한 시장이 열리고 한쪽에서는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갖가지 마상시합도 벌어진다. 처녀총각들은 타 부족의 젊은이들과 연애를 한다. 어른들은 각 부족의 천막을 돌아다니며 신랑감과 신부감을 점찍는다.
 
그동안 부족의 유력한 장로들은 ‘게르’ 안에서 날마다 회의를 한다. 회의결과는 연락을 맡은 사자들을 통하여 그때그때 부족원들에게 전달된다.
 
회의는 끝없이 이어진다. 사자들이 전해오는 회의 내용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며 부족민들의 천막촌에 일시적으로 험악한 공기가 감돌기도 한다. 전사들은 축제를 벌이는 중이라도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는 법이 없다.
 
회의는 만장일치가 이루어질 때 까지 계속된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편을 갈라 전쟁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 회의는 대개 만장일치로 끝난다. 어쨌든 전쟁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대한 제사를 열어 집회의 결과를 신에게 고하는 것으로 쿠릴타이는 완결된다. 이것이 유목민 방식의 민주정치다. 고대 희랍의 민주정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원에서의 쿠릴타이를 상기하라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democracy는 demo-와 cracy(통치)의 합성어이다. demo-는 지방에 사는 사람이다. 민주주의는 중앙이 아닌 ‘지방민에 의한 통치’인 것이다.
 
시골사람들이 왜 서울로 올라와서 통치하는 것일까? ‘소집’ 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소집’에 있다.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변방에 사는 사람들이 중앙에서 일어난 변고를 전해 듣고 일제히 달려온 것이다.
 
어원들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ban'은 원래 ‘소집’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라의 부름’을 의미했었는데, 부름에 응하지 않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금지령’을 뜻하게 되었다.   
 
‘bandit’는 무법자다. 원래는 ‘부름 받은 자’를 의미했다. 부름에 응하지 않는 행위는 금지되므로 ‘금지된 자’를 뜻하게 되었다. ‘abandon’도 원래 부름 받았다는 뜻이었다. ‘체념하여 포기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이유는, 소집을 받아 전쟁에 출정하면서 모든걸 포기하고 마을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원으로 알수 있듯이 유목민 사회에서 소집에 응하지 않는 행위는 비난받았다. 게르만족도 원래는 몽골이나 흉노, 선비와 같은 유목민이다. 쿠릴타이의 소집과 그 절차는 유목민 사회의 보편적인 민주적 전통일 수 있다.
 
유목민은 농경민과 달리 지켜야 할 가옥과 논밭이 없다. 그들은 부름받는 즉시 ‘게르’를 해체하여 쿠릴타이가 열리는 신성한 축제의 장으로 달려가곤 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의는 ‘소집절차’에 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집단의 의사결정에 관한 절차’에 있다. 절차는 곧 ‘소집의 절차’이다. 쿠릴타이는 ‘소집’된다. 민주주의의 권위는 민중이 자발적으로 그 소집에 응했다는 사실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 사실을 잊고 있다.
 
일찍이 ‘월든’의 ‘소로우’는 상비정부의 폐지를 주장한 바 있다. 전쟁방지를 위해 상비군이 철폐되어야 하듯, 정부도 상설되어서 안된다는 주장이다. 상설되지 않을 때의 대안은? 의사결정이 필요한 때 소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회는 상설된다. 헌법기관들도 영구히 상설된다. 대통령도, 대법원도 부여된 임기에 의하여 상설된다. 그러나 원래는 상설이 아니라 소집이다. 문제는 의회가 절차에 의하여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한다는 데 있다.
 
‘president’의 어원을 살펴보면 ‘맨 앞에 앉은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의장이다. 대통령이 쿠릴타이를 주재하는 의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에게 대통령은 하나의 ‘신분’으로 인식되어 있다.
 
진실은 무엇인가? 절차와 그 절차 안에서의 ‘역할’이다. 대통령이나 의원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세습신분이 아니다. 소집과정에서 부여되는 역할이다.
 
우리는 그 옛날 고원에서의 추억을 잊어버렸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소집절차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통령과 의원을 임명된 관료의 신분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 소집의 주체인 민중이 능동적인 참여에서 수동적인 추인으로 물러앉은 것이다.
 
박근혜의 망언은 논리가 아니라 심리
‘정체성’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박근혜의원이 이 단어의 의미를 알고 사용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릭슨이 처음 사용할 때의 본의로 보면 정체성은 자기 동일성(identity) 내지 자기 연속성(continutity)이다.
 
국가에 있어서 ‘자기 동일성’은 공동체의 문화와, 역사와, 전통과 ‘체험의 공유’에서 얻어진다. ‘자기 연속성’은 역사적 정통성에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논하고자 한다면 먼저 ‘공동체의 긍정’을 전제해야 한다.  
 
사회를 공동체가 아닌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박근혜가 ‘공동체 개념의 긍정’을 전제로 하는 정체성 개념을 인정할 리 없다.
 
그는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자격조차 없다. 박근혜가 정체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박정희가 자신을 혁명가로 규정하는 것 만큼이나 웃긴 소리다.(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의하면 우습게도 그는 혁명가이며 5.16은 혁명이란다.)
 
박근혜의원은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피아’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듯 하다. 이른바 ‘주적’ 개념을 연상시킨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적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을 조장하여 고정 지지층을 결속하려는 매카시즘의 수법이다.
 
또 정치대결에 있어서 능동적인 공격보다는 수동적인 방어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약자 혹은 피해자로 연출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국가를 가정에 비유할 때, 능동적인 남편의 역할보다, 수동적으로 가정을 지키는 아내의 역할을 강조하므로써 대중의 동정심을 유도하는 전술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의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심리다. 그는 당내외의 협공을 당하여 박정희의 품 속으로 도피하고 있다. 박정희를 직접 거론했다가는 반격에 직면하겠으므로 ‘정체성’을 거론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겉으로 헌법수호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박정희의 3공화국과 전두환의 5공화국을 거쳐 참여정부까지 이어져 온 현 정부의 정치적 연속성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박정희의 유신헌법을 계승한 채 정통성이 이어져 왔다는 착각을 유도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5.18과 6.10이 우리의 마지막 쿠릴타이
정체성은 자기 동일성과 자기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자기 동일성은 공동체의 성원이 그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는 데서 얻어진 바 공동체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자기 연속성은 역사적 정통성에서 얻어진다. 그 정통성은 절차적 정당성에서 얻어진다. 절차적 정당성은 집단의 의사결정을 위한 소집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 시대정신의 부름을 받아 소집에 응하였는가?
 
1919년 우리는 3.1만세의 소집에 응하였다. 1960년 우리는 4.19의 소집에 응하였다. 1980년 우리는 5.18의 소집에 응하였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의 소집에 응하였다. 그 줄기찬 민주화의 항쟁이 곧 초원에서 일어난 그 옛날의 쿠릴타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국민투표? 이건 소집이 아니다. 그때 우리는 무장하고 자원하여 소집에 응한 것이 아니다. 쿠릴타이에 다수결은 원초적으로 없다. 쿠릴타이는 만장일치여야 한다. 왜인가? 만장일치가 성립하지 않는 즉 전쟁이기 때문이다.
 
전쟁 앞에서 목숨을 건 신성한 약속이어야 유효한 것이다.
 
피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피로 소집되지 않은 소집은 참된 소집이 아니다. 무장한 채 자원하여 달려가지 않은 소집은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다. 박정희의 특기인 국민투표는? 피로 기록되지 않은 그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무장하여 달려간 즉 전쟁의 눈앞에서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목숨을 걸지 않았으므로 절차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가치는 평가절하 된다.
 
시대정신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그 옛날 그 사람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걸어간 길을 우리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주어진 나의 두 발로 힘차게 대지를 디디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변방의 사람들이 중앙을 향하여 내 두 다리로 행진하여 갔을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거기에 온전히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는 행진하지 않는다. 4.19는 마라톤으로 추억되고 있지만, 5.18도 6월도 우리는 기념하여 행진하지 않는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가 고원의 기마민족이었을 때 족장의 소집명령에 응하여 달려갔던 그 추억의 행진대열을 잊어버렸다.
 
왜인가? 박정희가 술수로 막았기 때문이다. 조중동이 세뇌하여 우리의 기억에서 애써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다시 기억해내야 한다.
 
그리이스의 시민병들이 스스로 무장을 갖추고 다투어 전선으로 달려갔듯이, 기마민족이었던 우리의 조상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신성한 장소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의 현장을 찾아 달려갔던 그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내는데 성공해야만 한다.
 
우리는 농경사회가 발명한 관료주의의 타성에 젖어 ‘소집’과 그 소집에 응하여 달려갔었던 민주주의의 절차를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절차를 생략하는 편법에 익숙해 있다. 그 모든 것이 ‘소집과 참여’라는 절차에 의하여 얻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원래부터 있었던 기관으로 착각하고 있다.
 
문제에 부닥칠 때는 최초의 출발점을 상기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념적 동질성과 역사적 정통성은 3.1만세와 4.19혁명과 5.18 싸움과 6월항쟁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 우리의 선배들은 시대정신의 부름받은 바 스스로 자원하여 무장하고 쿠릴타이의 현장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 역사의 페이지 마다 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인터넷 유목민 시대이다. 인터넷은 유목민의 말과 같다. 언제든지 ‘접속’이라는 방법으로 간단히 ‘소집’에 응할 수 있다. 지금이야 말로 드넓은 인터넷 초원에서의 쿠릴타이가 필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헌번전문을 읽어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덧글.. 법으로 따질 일은 아니지만, 굳이 법으로 논한다 해도 헌법전문에 씌어있듯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만세와 4.19이념 그리고 임시정부를 계승함에 있다.
 
임시정부는 백범에 의해 좌우합작을 이룬 채로 해방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백범의 좌우합작정신을 살려 통일을 이루는데 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정신과 4.19정신을 계승하여 일체의 반민족세력과 투쟁하고 통일을 달성하는데 있다.
 
3.1의 '민족', 4.19의 '민주', 임정의 '통일'이 오롯한 우리의 헌법정신이며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은 대한민국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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