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은 2천 년이 지나도 유태인이다. 변하는 것도 있지만 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호남 사람은 자기네가 백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남이 백제가 된 역사는 길지 않다. 간접적으로는 근초고왕 이후 300년, 직접적으로는 동성왕 이후 160년이다. 가야도 비슷한 시기에 신라와 백제에 나누어 흡수되었다. 가야권은 가야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호남도 마찬가지다. 충청도가 확실히 백제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서울, 경기는 조선이 가져갔고. 호남은 마한의 정체성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야 이야기가 매끄럽다. 문제는 영산강 서부와 동부다. 영산강 서부는 왕건 편을 들어 고려에 가담했고 동부는 견훤 편이었다. 왜 그럴까?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 있다. 고조선은 영토국가가 아니다. 영토국가는 등자와 말안장이 전해진 다음 이야기고 고대국가는 무역거점이다. 지도에 줄 긋고 색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국과의 무역 이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경에 대규모 민족이동이 있었다. 연나라의 고조선 침략과도 관계가 있지만 더 큰게 있다. 기장농사 짓던 요하 지역 사람들이 한반도로 몰려와 한국어를 만든 것이다. 삼한은 기원전 3세기경 대규모 민족이동 때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어 및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렉산더 보빈의 부여어족설과 근래의 요하지역설을 절충하여 판단할 수 있다. 이때 마한의 건마국이 등장했으며 건마국이 삼한의 맹주로 생각된다. 3한으로 나누어진 것은 고조선의 멸망 이후고 기원전 3세기경에는 고조선과 진국이 남북국을 이루고 있었다. 진국의 무역거점이 익산의 건마국으로 비정되는 것이다. 지금은 지명이 익산시 금마면으로 바뀌었다. 건마는 큰마 곧 큰 마한이 된다. 백제는 왕을 건길지라 불렀는데 지는 존칭이므로 건은 큰이다. 신라의 건모라(큰 마을)와 같다. 건마, 건길지, 건모라의 건을 큰으로 볼 수 있다. 큰 마한인데 한은 칸이고 칸은 왕이다. 신라는 간지라고 하고 가야는 한기라고 하는데 같다. 고조선이 망하고 진국 땅에 삼한이 들어섰는데 문제는 유민들의 이동이다. 고조선 유민이 건마국이 있는 익산을 빼고 북쪽의 목지국과 남쪽의 신미국(침미다례)로 나뉜 것이다. 천안 주변에 목자 들어간 지명이 많다. 신미는 섬이다. 침미다례를 탐미다례, 토무타레로 읽는데 제주도 탐라와 같으므로 침미다례는 섬들이다. 신미제국 29국이 있었고 이들의 종주국이 나주에 있었던 것이다. 백제는 먼저 목지국의 제후국들을 포섭하였다. 제후국이 종주국을 치는 하극상을 유도한 다음 삼키는 전략으로 목지국을 먹었다. 신라도 배워서 결혼동맹으로 가야를 이간질한 다음 먹는다. 백제는 같은 방법으로 신미제국을 이간질해서 먹었다. 이때 이간질에 의한 반목은 고려 왕건과 견훤의 대결로 이어진다. 백제가 목지국을 먹으려고 공작하고 있을 때 건마국은 백제의 편이었다. 목지국은 북쪽의 백제와 남쪽의 건마국 사이에 끼어 망했는데 건마국은 원래 진국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새로 떠오른 마한의 수장 목지국이 얄미웠을 법하다. 이후 백제가 건마국으로 수도를 옮기려 한 것을 보면 건마국은 거의 친백제였다. 마찬가지로 신라는 상주 지역을 중요시했다. 거기서 견훤이 성장한다. 견훤은 상주 출신이므로 충성심을 인정받아 광주(무주)에 파견된다. 견훤은 곧바로 독립했지만 따르는 부하들이 모두 신라의 노른자위인 상주 일대 출신이므로 반독립 상태로 어정쩡하게 간다. 공산전투에서는 왕건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다. 공산 일대는 상주와 가까우므로 견훤이 그 지역에 대해서는 빠삭하다고 봐야 한다. 왕건은 모르고 견훤의 본거지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한 것이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을 주름잡았는데 신라 문성왕의 배반으로 청해진이 해체된 후 장보고의 잔당들은 신라구가 되어 일본을 털어먹고 있었다. 수달로 알려진 능창은 신라구로 볼 수 있다. 같은 해상세력 왕건이 공격하자 나주와 해안의 섬들은 모두 왕건 편에 붙었다. 이후 왕건은 나주를 중시하여 특별기구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했고 현종은 서경과 개경에서만 하는 팔관회를 나주에서 개최했을 정도로 나주는 특별대접을 받았다. 지리적 구조가 중요하다. 한국 정치도 이념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본질은 지리다. 조국이 나서는 이유도 나주가 중요했던 것처럼 지금 부산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재의식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주 일대는 일본식 전방후원분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의미가 있다. 개로왕 사후 백제가 일시적으로 망하자 독립을 시도한다. 전방후원분은 모여있지 않고 나주 변두리 곳곳에 흩어져 일시적으로 나타난다. 해상세력인 나주세력이 왜인의 힘을 빌려 독립을 시도한 것이다. 고조선과 낙랑의 평양, 목지국의 천안, 백제의 서울, 건마국의 익산, 신미국의 나주, 가야의 김해는 바다와 연결된다. 빙하기 이후로 갑자기 바다가 올라왔기 때문에 강의 수심이 깊었다. 북유럽의 피요르드와 같다. 서해바다 바닷물이 대동강까지 올라왔고, 아산만으로 천안까지, 한강으로 풍납토성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당시 나주 시내는 물론 목포, 무안 일대가 모두 섬이었다. 선사시대는 밀양평야가 바다여서 조개무지가 있다. 이후 토사가 떠내려와서 강바닥이 높아진 것이다. 마을을 말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한자로 마인 것을 보면 마한의 마는 마을일 수 있다. 옛날에는 마을에 모여 살았으며 흩어져 사는 야인은 보이는 대로 죽였다.
전방후원분이 있는 지역은 당시 섬이었거나 섬 주변의 갯벌 혹은 습지로 볼 수 있다. 육지와 분리하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지리적인 격리를 꾀하고 있다. 여러 곳에 흩어놓은 것은 세력화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모두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
뿌듯합니다. 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