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는 자극과 반응에 맞추어져 있다. 환경이 먼저 인간을 자극하고 인간은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지능의 발달은 인간이 먼저 능동적으로 환경을 자극하고 되돌아오는 반응을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방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동작을 모방한다. 그것은 능동적인 선제대응이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이다. 어린이는 에너지가 넘친다. 자체동력이 있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못한다. 어린이는 하는데 어른은 못한다. 에너지를 잃어버렸다. 흥분해야 하는데 차분하다. 설레어야 하는데 긴장한다.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어른은 도구를 쓴다. 도구는 능동적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이것저것 건드려 본다. 그런데 생각은 그렇게 못한다. 생각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옷을 입고 총을 든 문명인 앞에 알몸에 맨손인 부족민과 같다. 선제공격은 불가능하다. 수학 문제를 풀어도 공식을 펼쳐놓고 숫자를 대입해서 풀어야 한다. 공적인 자리에서 조리 있는 말을 할 때는 먼저 사건을 제시하고 그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말을 해야 한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형태가 되고 그것은 무언가를 싫어하고, 배척하고 혐오하고, 거부하고, 말대꾸하고, 남탓하고 흉보는 말이 된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주도권 문제 때문이다. 능동이냐 수동이냐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내가 판을 설계하고 주도권을 잡고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 훈련되지 않으면 그렇게 못한다. 총이 있으면 하는데 총이 없어서 못한다. 도구가 있으면 하는데 도구가 없어서 못한다. 수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자면 반응하기 좋은 쪽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방어하기 좋은 위치는 공격하기 나쁘다. 사유는 불리한 구조에 갇혀 버린다. 당구의 모아치기와 같다. 세리 기술을 쓰면 점차 구석으로 가게 된다. 구석은 반응이 빠르므로 말하기가 쉽지만 그 공간은 좁다. 사유는 협량해진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창의할 수 없게 된다. 넓은 가운데로 나와야 새로운 기술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권력문제다. 한 번 밀리면 끝까지 밀린다. 권력은 조절장치다. 상대를 조절하지 못하고 거꾸로 환경에 조절당해 버리는 것이다. 생각을 그냥 하는 사람은 답답한 사람이다. 그것은 배우지 못한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술을 쓴다는게 보여야 한다. 시를 읊더라도 압운과 평측이 있다. 마구잡이로 단어를 투척하는지 나름대로 터득한 기술을 구사하지는 단박에 알 수 있다. 대화의 상대가 되는지는 거기서 가려진다. 예컨대 이런 거다. 사실주의로 가지 않으면 내용이 협량해진다. 일본만화 슬램덩크가 그렇다. 그림체가 사실주의다. 땀방울을 하나하나 그려서 공포스러울 정도다. 스타일이 사실주의로 정해지면 할 이야기가 풍부하다. 허영만과 이현세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은 실제로 있다. 타짜의 짝귀는 가수 송창식이다. 허영만 만화에는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 등장한다. 사실주의로 가면 캐릭터간 상성이 도드라진다. 할 이야기가 열 배로 증폭된다. 경상도의 짝귀와 전라도의 아귀에 지리산의 작두를 비교하는 식이다. 전통적인 만화로 가면 복수극밖에 할 이야기가 없다. 상대가 먼저 때려서 내가 받아친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다. 복수는 갑의 행동이 아니라 을의 행동이다. 권력게임에서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상대는 자유롭고 창의적인데 주인공은 도덕이라는 굴레가 씌어져 손발이 묶여 있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다지 없다. 무협지는 동료 간에 합을 맞추는 이야기가 없다. 선하다 악하다를 비교하고 강하다 약하다를 비교하고 그다음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억지 이야기를 꾸며내므로 궁중사극처럼 음모만 난무한다. 사실주의로 가면 캐릭터들 간에 케미가 맞느냐 호흡이 맞느냐에 따라 할 이야기가 열 배는 늘어난다. 앙숙인 커플, 잉꼬부부 커플, 일방적으로 당하는 커플 등 인간관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도권이 작가에게 있다. 심리묘사는 끝이 없다. 무협지는 심리묘사가 없다.
방어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좁히면 무대가 축소된다. 점차 구석으로 몰린다. 방어할 만한 곳은 협곡과 같은 좁은 지형이기 때문이다. 방어지향적 사고는 아이디어의 적이다. 대화를 해도 비판만 하고 험담만 하는 사람은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자신의 포지션을 을로 정해놓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악당이 먼저 공격하고 주인공은 받아치는 행동만 할 수 있다. 인공지능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스스로 모방한다는 느낌이 없다. 어린이는 먼저 질문한다. '아빠 이거 뭐야?' 하고 집요하게 물어서 어른을 피곤하게 한다. 인공지능은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 능동적으로 응수타진한다는 느낌이 없다. 모방하는 인공지능이 나와야 한다. 상대를 자극하고 반응을 끌어내서 정보를 수집하는 인공지능이라야 한다. |
낚시하는 왜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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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연구자들이 생각하는 인공지능은 주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건데
인공지능이 먼저 말 걸면 배터리 귀신이 될까봐 차마 구현을 못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죠.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인공지능이 먼저 말을 못 걸게 하려면
대신 말 받아주는 놈을 만들던지해서 해결할 수는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