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을 찾으면 전율한다. 뇌가 반응한다. 그 즐거움에 빠져들어야 한다. 하나의 패턴이 하나의 존재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인간은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대신 상호작용한다. 자극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인지부조화로 나타난다. 판단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데 행위에 판단을 맞추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행위는 주변과 맞물려 있으므로 바꾸기 어렵고 판단은 머리 속에서 일어나므로 쉽게 바꿀 수 있다. 행위는 주변과 맞물려 돌아가며 탄력을 받고 흐름을 타고 있다. 행위를 바꾸는 것보다 판단을 바꾸는게 의사결정비용이 적게 든다.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쪽으로 판단을 왜곡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목적이 있고 동기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하기 쉬운 것을 하면서 이유는 적당히 꾸며내는 것이다. 다들 그러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가장 중요한데 생각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 그 문제를 지적한 사람도 없다. 생각에 대해서 생각한 사람도 없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생각이 아니라 존재다. 그에게 생각은 주어가 아니라 동사다. 어떤 주제를 두고 생각할 뿐 생각 그 자체를 생각한 사람이 1 만년 인류사에 단 한 명도 없었다면 황당한 일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 번쯤 검토해 볼 만도 한데 말이다. 아이디어는 뇌가 무의식적으로 패턴을 읽고 반응한 것이다. 촉이 좋으면 반응한다. 반응하면 정신이 번쩍 들고 몸이 뜨거워지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뭔가 밑바닥에서부터 가득 차오르는 충일감을 느낀다. 마약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 그 쾌감을 왜 포기하는가 말이다. 여행을 하면 즐거워지듯이, 낯선 사람을 만나면 흥분하듯이 패턴을 읽고 뇌가 반응하면 쾌감을 느낀다. 거기서 세상을 바꾸는 열정이 나온다.
구조론은 생각의 과학이다.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질, 입자, 힘, 운동, 량 순서대로 풀어가면 된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생쥐의 미로실험과 같다. 왼쪽에서 막히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다. 보나마나 이거 아니면 저건데 1차원 선 위에서 마주 보고 교착된 두 마리 개미처럼 꼼짝을 못한다. 2차원 평면을 모를 뿐 아니라 더욱 3차원 입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핸들을 쥐려면 4차원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대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머리에 힘 주고 있다. 그래봤자 두통이 올 뿐이다. 눈 감고 앉아서 명상을 한다는 사람이 있지만 잠이나 쏟아질 뿐이다. 천재적인 생각을 해낸 사람도 많지만 활발한 상호작용 중에 우연히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의식적으로 아이디어를 생산해야 진짜다. 그것은 공식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배우고 거기서 계와 코어와 방향과 순서와 그 변화를 알아야 한다.
사유는 패턴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패턴이다. 패턴은 뇌가 자동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촉이 좋은 사람은 더 빨리 찾는다. 발자국이 여러 개 찍힌 것을 보고 동물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안다. 패턴은 자식이 아버지를 닮는 것이다. 도장을 찍는다면 찍는 것은 부모요 찍힌 것은 자식이다. 말이 지나갔다면 발굽이 도장이다. 찍힌 것을 보고 찍은 것을 안다. 활이 화살을 쏜다. 활이 찍고 화살이 찍힌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이 하나의 구조를 카피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자연의 모든 존재가 패턴이다.
수학은 집합론으로 시작된다. 집합을 만드는 것이 패턴이다. 활이 화살을 쏘든, 사랍이 언어를 쏘든, 대포가 철환을 쏘든, 말이 발자국을 찍든, 나무가 잎을 찍어내든, 태양이 행성을 돌리든 원리는 같다. 뭔가 반복하여 찍어낸다. 산을 찍어내고 들을 찍어낸다. 세상은 온통 찍어낸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예외는 절대로 없다. 찍는 것과 찍히는 것은 서로 마주 본다. 대칭을 이룬다. 대칭에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칼이 있으면 도마가 있다. 둘은 마주 본다. 요리는 거기서 대량생산된다. 엄마와 아빠가 마주 보면 여러 자녀가 찍혀 나온다. 활몸과 시위가 마주 보면 화살이 날아온다. 좌우의 대칭이 있으면 반드시 상하의 또다른 대칭이 숨어 있다. 화살과 과녁의 대칭이 있으면 그 위에 활과 화살의 대칭, 궁수와 활의 대칭, 아군과 적군의 대칭이 더 큰 단위의 대칭으로 숨어 있다. 다섯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 대칭이 세트로 간다.
하나의 패턴을 보고 대칭을 추적하여 고구마 캐듯이 줄줄이 비엔나로 따라오니 세상 모든 친구를 다 만나게 된다. 그런데 보통은 머리 속에서 이러한 추적작업을 못한다. 인간이 생각을 못하는 이유는 원래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머리 속에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층위별로 늘어놓고 짜맞추는 사람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은 마이너스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생각은 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평면에서 선을 찾을 수 있는데 선에서 평면을 못 찾는다. 더욱 입체를 찾지 못한다. 출발점이 되는 계를 찾으려면 거기서 한 층을 더 올라가야 한다. 가장 높은 층위에서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 연역인데 연역을 못한다. 중간부터는 하는데 첫 단추를 꿰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할 수도 있다. 암산을 못하면 필산을 하면 된다. 인간이 차원을 높여가는 방향으로 사유하지 못하면 종이에 그려놓고 빈칸을 채우면 된다. 원인과 결과는 사람들이 안다. 본질과 현상은 잘 모른다. 원인과 결과는 일차원 선 위에 있다. 인과는 시간의 논리다. 시간은 선을 따라간다. 선 위에 서 있는 기관차와 객차를 구분하는 것이다. 거기서 앞에 가는게 원인이면 뒤에 따르는게 결과다. 본질과 현상은 나무의 뿌리와 가지처럼 층위가 다른 것이다. 뿌리와 가지는 동시에 있다. 시간의 선형적 사유가 아닌 공간의 입체적 사유다.
원인이 본질이고 현상이 결과이므로 같다. 원인을 알면 곧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모른다. 본질은 나무의 뿌리다. 뿌리는 상하, 좌우로 연결되는 입체를 이룬다. 외부의 흙과 연결되어 계를 이룬다. 현상은 나무의 가지디. 가지는 선이다. 본질인 계에서 출발하여 체, 각, 선, 점으로 내려가면서 현상이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나누는 단선적인 분류는 곧잘 하는데 본질과 현상으로 나누는 입체적인 분류는 못한다. 본질은 뿌리처럼 주변과 맞물려 중심을 잡고 있고 현상은 잎처럼 혼자 팔랑거리고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본질의 맞물려 있음이야 말로 모든 것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둘의 맞물림이 패턴을 무수히 찍어낸다.
사람들이 활과 화살은 안다. 활이 원인이고 화살은 결과다. 활이 먼저고 화살이 따른다. 둘의 맞물림을 모른다. 활몸과 시위는 동시에 맞물린다. 시위를 놓으면 활몸도 풀린다. 둘은 동시에 움직인다. 거기에 찾아야 할 방향성이 있다. 사람들이 시간적 순서는 아는데 공간적 맞물림의 방향을 모른다. 사유에 실패하는 이유다.
어떤 둘이 마주 보면 패턴을 대량으로 찍어낸다. 거기에 효율성이 있다. 그 효율성에 의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다. 패턴은 범주에 찍힌다. 마차 바퀴 자국은 도로에 찍혀 있다.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는 하늘에 비행운으로 찍혀 있다. 패턴을 보고 범주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범주와 패턴 사이에서 공간적 방향과 시간적 순서를 찾으면 층위가 구분되고 본질과 현상이 찾아진다. 사건을 연결하는 마디가 찾아진 것이 구조다. 세상은 원자가 아닌 구조로 되어 있다. 마주 보고 맞물림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 링크가 걸리면 의미가 통한다.
석가의 팔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으로 시작된다. 보는 눈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내 눈에 검게 보이면 다른 사람 눈에도 검게 보인다. 문제는 정사유다. 생각하지 않고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파악한다. 둘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일단 배척한다. 그러다가 인지부조화의 덫에 걸린다. 말하기 좋은 쪽으로 말한다. 왜곡이 시작되는 것이다. 행동에 말을 맞추다가 비뚤어지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변방에서 중심을 바라보고 의지하는게 잘못이다. 사회를 바라보고 집단을 바라보고 큰 것에 묻어가려고 한다. 집단과의 상호작용을 유지하려고 한다. 독립적인 사유를 못한다. 원점에서 새로 출발하지 못한다.
팔정도까지는 필요 없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기만 해도 본전은 된다. 정관점, 정사유, 정판단, 정언어, 정행동이 요구된다. 행동에 생각을 맞추면 안 되고 관점에 행동을 맞추어야 한다. 내 위치를 고정시키고 거기에 맞추어 좌표를 움직이면 안 되고 좌표를 고정시키고 거기서 내 위치를 찾아야 한다. 지도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맞물려 있는 동서남북을 정해놓고 자유로운 내 위치를 찾아야 한다. 본과 말의 구분이다.
어느 쪽이 본이고 어느 쪽이 말인가? 주변과 많이 얽혀 있는 것이 본이고 혼자 따로 노는 것이 말이다. 얽혀서 고정된 것을 먼저 찾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나중 찾아야 한다. 인간의 눈이 날아가는 파리를 쫓아가므로 움직이는 대상에 붙잡혀서 고정된 좌표를 찾지 못한다. 놀이개를 향해 달려드는 고양이와 같다. 움직이는 대상에 현혹되므로 불변의 진리를 보지 못한다. 날아가는 화살에 시선이 붙잡히므로 숨어서 쏘는 궁수를 보지 못한다. 움직이는 선수에 집중하므로 배후에서 손을 쓰는 게임의 주최측을 보지 못한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