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아우들은 왜 들판에서 이러고 있을까? 방향성의 차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음악은 인간들에게 지적인 자극을 줘서 고상한 영감을 끌어내는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악기로 최고의 가수에게서 한 번 듣는게 논두렁에서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 최고가 아니면 쳐다볼 필요도 없다. 눈 버린다. 혹은 음악은 정서적인 안정을 돕는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안락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사람과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조용한 곳에서 분위기를 맞춰놓고 감상해야 한다. 들판에서 최악의 환경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비극이다. 혹은 음악이 인민들에게 활력을 주고 노동을 돕는 도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던대로 풍물을 잡히고 꽹과리를 쳐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 있으며 방향을 잘못 정하면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굴러간다는 점이다. 방향은 결국 순수냐 응용이냐다. 순수에서 시작해야 한다. 순수는 완전성이다. 완전한 모형이 먼저 나오고 다음 그것을 다양한 환경에 대입하여 응용하는 것이다. 응용이 순수를 앞서버리면 괴짜가 나온다. 모든 괴력난신, 신토불이, 유기농, 안아키, 초능력, 종교 따위 개소리는 응용이 순수를 침범한데 따른 후과다. 양의학은 원리를 알고 치료하고 한의학은 병만 치료하면 됐고 원리는 대충 말로 때우면 된다고 여긴다. 그럴 수도 있다. 부족민의 키니네가 말라리아를 치료한다면 원리를 몰라도 일단 처방해야 한다. 치료되잖아. 문제는 그게 방향성으로 굳어지면 죄다 비뚤어지는 것이다. 원리를 고집하고 실용을 무시하면 당장 괴롭고 반대로 실용을 앞세우고 원리를 무시하면 계속 괴롭다. 생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원리를 알고 응용을 해야 한다. 응용하려면 다양한 환경에 대입해야 하고 대입하려면 대상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 연결의 끈을 손에서 놓치 않으려고 하므로 발전이 없다.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 구조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한다. 팽팽한 긴장상태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긴장을 유지하려면 자극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그 방법은 점점 더 괴상해지는 것이다. 중학생은 머리카락으로 앞이마를 눈동자 위로 0.1밀리까지 맞춘다. 그렇게 범 지구적으로 찐따가 된다. 진따모드로 갈 것이냐 쿨한모드로 갈 것이냐. 여기서 방향이 잘못 정해진 것이다. 쿨하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이다. 이준석이 앞이마를 가리는 이유는 여전히 마마보이를 탈출하지 못했다는 표지를 부착하는 것이다. 이준석에게는 마마보이가 세상과 연결하는 끈이다.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므로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개는 목줄을 벗고 탈출하려고 하는데 인간은 목줄을 잡히고 노예가 되려고 한다. 놔두면 점점 등신이 되어간다. 괴상한 것을 추구한다. 그래야 상대의 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바보가 되는 것이 동양사 5천년의 수치다. |
순수 (general)한 이론이 발달해야, 변화된 환경에서 응용이 가능하다.
응용으로만 출발하면, 변화된 환경에서 공식이 적용이 안되서 패망한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철학을 즐기는 나라. 조선, 대한민국.
이 격변의 시기에 민주주의가 철학이 작동함을 몸소 보여주는 나라.